985화 구겨진 편지
"없었어요!"
야율헌일은 매우 똑똑히 알아보았다. 그래서 월령안의 질문에 야율헌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현음 장공주와 만날 수 있게 만남을 주선할 수 있나요?"
"어…… 그건……."
야율헌일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부황의 명령이 없다면 전 월 가주와 현음 장공주의 만남을 주선할 수 없습니다."
월령안이 자기에게 실망할까 봐 야율헌일은 또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말을 전해 줄 수는 있어요."
"제가 지금 편지를 쓸 테니 부디 절 도와 현음 장공주에게 전해 주세요."
월령안은 바로 이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북요 황제가 그녀와 현음 장공주가 만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율헌일에게도 북요 황제의 감시를 피해 그녀와 현음 장공주가 만나게 할 능력이 없었다.
그녀가 이 요구를 먼저 한 것은 협상의 방법일 뿐이었다.
그녀가 먼저 야율헌일에게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를 한 뒤, 난이도가 좀 작은 요구를 또 제기한다면 야율헌일은 분명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매우 다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만 그녀는 야율헌일이 먼저 얘기를 꺼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시름을 덜었다.
월령안이 돌아서서 바로 편지를 쓰는 것을 보고 야율헌일은 왠지 월령안에게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월령안을 도와 말을 전하는 것은 그가 먼저 말한 것이었다. 월령안이 그의 배 속에 있는 회충도 아니고 어찌 그가 먼저 말할 줄 알았겠는가?
야율헌일은 한참 생각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자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가 스스로 응한 일은 꿇어서라도 완성해야 했다.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와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잘 알지 못하다는 것은 그나마 표현을 순화한 것이었다.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를 본 적도 없었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만 아는 낯선 사람이었다.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에게 편지를 쓸 때,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도 안 되고 너무 소원하게 굴 수도 없었다. 선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약간 골머리를 앓고 나서야 자기가 보아도 그나마 만족스러운 편지를 써냈다.
"이렇게 하죠."
한번 검사한 뒤, 빠뜨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월령안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구를 봉하지 않고 편지를 내놓았다.
입구를 봉하는 것은 군자나 방어할 수 있었지 소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요의 야만인들이 만약 정말 편지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한다면 그녀가 입구를 봉하든, 안 하든, 결국에는 똑같았다.
쓸데없는 경계를 하는 것보다 마음 편하게 내려놓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야율헌일은 그녀가 자기를 믿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역시, 야율헌일은 월령안이 자기에게 건네준, 입구를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자 연이어 장담했다.
"월 가주, 걱정하지 마세요. 전 절대 월 가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어요."
'내가 생각이 많았군. 월 가주는 이토록 떳떳한 사람인데 어찌 날 속일 수 있겠어?'
"우리는 동맹 관계잖아요. 제가 삼황자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겠어요?"
'저버리든 말든, 이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녀는 야율헌일이 문을 나서자마자 이 편지가 북요 황제의 손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북요에서 야율헌일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 * *
편지의 입구가 봉해지지 않아 야율헌일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안심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편지를 들고 공주부로 갔다.
그러나 그가 별궁을 나서자마자 북요 황제의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반항하려고 했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목에 칼이 겨누어졌다.
시대의 중대한 상황이나 객관적인 형세를 알 수 있는 자는 걸출한 인물인 법. 야율헌일은 이 사람들이 자기가 황자여서 감히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야율헌일은 북요 황제의 사람과 함께 입궁했다. 그는 북요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월령안이 그에게 준 편지를 황제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의 아부 섞인 행동은 북요 황제의 호감을 얻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북요 황제의 멸시가 담긴 말을 들었다.
"무능한 것! 역시…… 몸의 절반은 주나라의 피가 흐르고 있군. 참 쓸데없어!"
야율헌일은 얼굴이 벌게져서 두 눈으로 증오의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아들이 무능하니 부황께서 벌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이런 행동도 북요 황제의 눈에는 무능한 표현으로 비춰졌다.
"쓸모없는 놈."
야율헌일은 고개를 더욱 떨구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반박하지 않았던 것도, 반항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약했다.
그의 반박과 반항은 더욱 심한 수모와 학대를 가져올 뿐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을 수 있었다.
야율헌일은 북요 황제가 욕하게 내버려 둔 채로, 조금의 불만도 나타내지 않았다. 북요 황제가 월령안의 편지를 그의 머리에 내던져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서 이 편지를 현음 장공주에게 전해 주거라. 현음 장공주가 답신을 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아들이 알고 있으니 부황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아들은 반드시 현음 장공주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야율헌일은 그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편지를 주워서 꼼꼼히 접었다.
그는 계속해서 수모를 당하지도, 계속해서 무시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월령안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는 반드시 자기를 무시했고 괴롭혔던 사람들을 모두 발아래에 짓밟을 것이다.
야율헌일은 편지를 몸에 잘 지니고 몸을 굽힌 채로 일어났다. 비굴하고 아첨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대전을 나갈 때까지 허리를 펴지 못했다.
당연히, 북요 황제도 그의 눈빛에 담긴 증오와 살의를 보아내지 못했다.
북요 황제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자 야율헌일은 별로 공을 들이지 않고 편지를 현음 장공주의 손에 넘겨주었다.
현음 장공주는 편지를 보고 한마디 물었다.
"답신을 써야 하나요?"
야율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령안은 답신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황은 현음 장공주의 답신을 봐야겠다고 했다.
"삼황자, 잠시 기다려 주세요."
현음 장공주는 편지를 접고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대국 공주의 존귀함과 대범함이 넘쳤다. 그녀의 앞에 서 있으려니 야율헌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져 감히 직시할 수 없었다.
그가 반응하기 전에 현음 장공주는 이미 떠나갔다. 야율헌일은 방금 전에 현음 장공주 앞에서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을 몰래 후회했다.
곧이어 현음 장공주는 답신을 다 썼다.
월령안과 마찬가지로, 현음 장공주는 입구를 봉하지 않았다.
"수고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야율헌일은 활짝 열린 편지 봉투를 바라보며 자조적인 눈빛을 했다.
전에 그는 월령안이 편지의 입구를 봉하지 않은 것이 그를 믿어서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월령안이 진작부터 그가 이 편지를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일부러 입구를 봉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령안은 소리 없이 편지를 본 사람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난 네가 볼 줄 알고 있어. 내가 얼마나 다정한지 봐. 네가 봉투를 뜯을 필요도 없잖아."
"난 역시 너무 어렸군."
야율헌일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현음 장공주의 회답 편지를 가지고 입궁했다.
편지를 입구를 봉하지 않았지만 야율헌일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부황의 사람들이었다. 그가 훔쳐본다면 부황은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지금 부황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현음 장공주의 편지를 북요 황제에게 바쳤다. 북요 황제는 힐끔 보더니 낮게 욕지거리를 했다.
"무엇이라는 거냐!"
북요 황제는 편지를 들고 펼치며 여러 번 읽었지만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화를 내며 다시 편지를 구겨 야율헌일에게 던졌다.
"월령안에게 가져가거라. 짐은 월령안이 편지를 본 뒤의 반응을 알아야겠다. 알겠느냐?"
"네, 부황."
야율헌일은 고개를 숙이고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눈앞의 구겨진 편지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갈망을 느꼈다. 권세에 대한 갈망을…….
그의 부황은 자기가 월령안과 현음 장공주가 주고받은 편지를 본 사실을 월령안이 아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권세가 가져온 저력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그도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이해득실을 따질 필요도,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야율헌일은 구겨진 종이를 집어 들고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로 대전을 나갔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눈에는 증오 말고도 억제할 수 없는 야심이 담겨 있었다!
* * *
월령안은 무덤덤하게 구겨진 편지를 펼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더없이 정상적인 일을 마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야율헌일은 한 시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월령안과 절대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너무 멍청했다!
월령안은 편지를 읽고 난 뒤, 야율헌일에게 예를 올렸다.
"삼황자께 폐를 끼쳤네요."
"미안해요, 월 가주의 기대를 저버렸네요."
야율헌일은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그는 월령안이 감사 인사를 하자 창피하여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이건 삼황자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것은…… 세도의 잘못이지요."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야율헌일이 깊이 생각하기 전에 월령안은 손에 든 편지를 흔들며 웃었다.
"전 그저 현음 장공주께 문안 편지를 올렸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없어요. 북요 황제 폐하께서 보시고 싶으시면 보셔도 괜찮아요."
그녀가 현음 장공주에게 쓴 편지는 길지 않았다. 간단하게 이 몇 년간 변화가 좀 큰 변경의 몇 곳을 쓰고 주요하게 춘일연 얘기를 했다.
그녀는 현음 장공주가 미혼일 때, 춘일연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것을 기억했다.
월령안은 편지에서 현음 장공주에게 변경의 상원교(狀元橋)를 기억하는지, 변경의 춘일연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또 현음 장공주가 없는 춘일연은 그 색채가 예전보다 많이 못하다고, 사람들이 모두 현음 장공주를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만약 현음 장공주가 내년의 춘일연에 출석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현음 장공주가 월령안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간단했다.
"고국의 산수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고 고국의 백성들은 늘 내 마음속에 있다."
북요 황제는 월령안의 편지를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음 장공주의 편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 말 한마디는 무슨 뜻이지?
월령안과 현음 장공주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고 직감이 말해 주었다.
그러나 북요 황제는 현음 장공주의 편지를 뒤집어보기도 하며 여러 번 읽었지만 현음 장공주의 이 말 한마디에 담긴 깊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