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5화 산산이 조각 난 관계
"폐하, 월령안은 멀리 북요에 있습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염 황숙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염 황숙의 수중에 뭔가가 있다고 해도 월령안에게 남길 기회가 없고요."
육장봉은 황제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바로 황제가 숨기고 있는 속내를 훤히 드러냈다.
"명월 산장은 서 선생만 제외하고 전부 폐하의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실 것이 뭐가 있습니까?"
"육! 장! 봉!"
다른 사람이 없더라도 황제는 화가 나 안색이 변했다.
"폐하, 어떤 일은……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염 황숙은 주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고 세운 공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전혀 자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막을 몰라 황제가 효성이 지극하여 염 황숙이 궁에서 휴양할 수 있게 특별히 허락한 줄로 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모르는 사람이나 속일 수 있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모를 리 있겠는가?
"넌 오늘 반드시 짐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것이냐?"
황제는 화가 나 숨을 들이쉬었다. 원래도 울긋불긋하게 멍든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육장봉은 옷자락을 들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신은 다른 뜻이 없습니다. 다만 염 황숙께서 마지막 시간을 좋아하시는 곳에서 보낼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폐하께서 안심되지 않으신다면 심복을 파견해 함께 명월 산장으로 보내십시오."
염 황숙은 궁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나 즐겁거나 행복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염 황숙이 궁에 있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괴롭힘을 받았다.
염 황숙이 이 황궁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해도 그들 몇몇 조카들까지 모르겠는가?
염 황숙의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염 황숙을 그가 가장 싫어하는 황궁에 가두고 있었다. 황제의 이 행위는 염 황숙은 물론, 그조차도 역겹게 느껴졌다.
월령안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그는 입을 열어 염 황숙이 궁을 나갈 수 있게 황제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공을 세운 신하는 박대당하면 안 되었다.
황제는 차갑게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짐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신은 폐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육장봉은 곧게 꿇어앉았다. 그는 아무런 협박의 말도 하지 않았으나 실제적인 행동으로 황제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곳에 꿇어앉아 황제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지금 짐에게 강요하겠다는 것이냐?"
황제는 자기가 만약 월령안에게 손을 쓴다면 육장봉이 틀림없이 찾아와 따질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육장봉이 월령안을 위해서……
아니, 월령안을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월령안이 신경 쓰는 염 황숙을 위해서 육장봉이 황제인 그를 핍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마음이 차가워졌다.
이토록 오랫동안 함께한 형제가 여인 하나 때문에 형제 사이도 포기하고 척을 지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그렇다고 여기시면 그런 것이지요."
육장봉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되었다.
"육장봉! 넌 아직도 네 신분을 기억하느냐? 네 이상을 기억하느냐?"
황제는 노발대발했다. 입가의 상처가 터져 매우 아팠으나 지금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입가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팠다.
그는 육장봉이 여인 하나를 위해 이렇게 그를 핍박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육장봉은 지금 그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과가 어떠하든 육장봉은 이미 이렇게 했으니 형제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군신 사이에서도 서로 거리감이 느껴질 것이다.
"신은 감히 잊지 못합니다!"
육장봉의 시선은 평온한 것이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시선에서 비웃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제가 형제 사이의 정을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월령안에게 손을 쓰는데 그가 왜 신하의 신분으로 황제를 강요할 수 없겠는가?
황제는 그렇게 했으면서 왜 그는 못 하게 하는 것인가?
"그러면 너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지?"
황제는 실망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이해득실을 따져 보았다.
결국 그는 육장봉의 고집을 꺾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일이 커진다면 황제인 그가 당하는 망신이 더욱 클 것이다.
"네."
그가 결정한 일을 언제 타협했었던가?
"네가 이겼다!"
황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말은 매 글자마다 모두 폐부에서 나오는 것처럼 소리가 잠겨 있었고 무거웠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육장봉은 고개를 조아리고 일어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육장봉이 문을 열고 확고한 발걸음으로 난각을 나서는 것을 보자 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손으로 옆에 있는 벼루를 잡고 거세게 바닥으로 내리쳤다.
"고얀 녀석!"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벼루가 산산조각이 났다. 먹물이 바닥에 가득 튀었으며 황제의 옷자락에도 군데군데 묻었다.
황제는 먹물이 묻은 손을 내밀며 소리 없이 냉소를 지었다.
"깨끗이 씻거라. 흔적을 남기지 말고."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황제의 시선은 산산조각 난 벼루 위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이 벼루처럼 깨진 것은 깨진 것이었다. 다시 붙인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짐은 잘못하지 않았다! 짐은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황제는 갑자기 옷소매를 떨치면서 고개를 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떨어졌다.
육장봉은 난각에서 나온 뒤, 난각에서 전해지는 소리를 들었다. 화풀이 같기도 하고 자기를 설득하는 말 같기도 한 황제의 고함 소리를 들으면서 발걸음을 멈춘 채, 가볍게 가슴을 눌렀다.
월령안을 도마관에서 풀어 주고 변경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그와 황제가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마쳤다.
다만 비록 준비를 마쳤어도 정작 여기까지 오게 되자 그의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진작부터 돌아갈 수 없었다.
황제의 만류도 뿌리치고 기어이 월령안을 선택한 순간부터 그와 황제 사이에는 틈이 생겼다. 다만 그와 황제 모두 서로가 필요했다. 또 큰일을 마치지 못했기에 언쟁이 무효하게 끝난 뒤, 암묵적으로 이 일을 눌러 두고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눌러 둘 수 없었다.
육장봉은 길게 숨을 내쉬고 가슴에 얹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비록 아팠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눈을 감고 시선에 담긴 복잡한 기분을 감췄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평온함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황제에게 번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육장봉은 난각을 나서자마자 염 황숙의 거처로 곧게 갔다. 그리고 염 황숙과 약왕곡 곡주 손불사를 데리고 함께 궁을 나섰다.
염 황숙은 이미 병이 심하게 들어 정신이 반쯤 또렷하다가 반쯤 의식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육장봉이 자기를 데리고 궁을 나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명월 산장에 도착한 뒤였다.
눈 앞에 펼쳐진 익숙하고도 낯선 배치를 보자 염 황숙의 어둡고 흐릿하던 눈동자에 그리움과 기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그 기색은 바로 꺼졌다. 그는 우울하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곧 죽을 날 위해 이렇게까지."
'왜 나 때문에 황제와 다투고 척까지 지느냐?'
육장봉이 말할 필요가 없이 염 황숙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알 수 있었다. 황제를 끝까지 핍박하지 않는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데리고 궁을 나오기 위해 육장봉과 황제 사이의 원래부터 얄팍했던 형제애가 조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주나라의 대장군입니다. 누구도 절 대체하지 못하지요."
육장봉은 염 황숙이 많은 생각을 할까 봐, 낮은 소리로 둘러댔다. 그러나 아쉽게도 염 황숙은 듣지 못하고 혼절했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손불사를 바라보았다. 손불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감님은 지금 하루에 반 시진 동안 의식이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상세가 좋지 않으십니다."
"염 황숙께서는 얼마나 더 사실 수 있나요?"
육장봉은 염 황숙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눈빛으로 손불사에게 나가서 말하자고 눈치를 줬다.
두 사람은 방을 나섰지만 손불사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기껏해야 삼 일에서 오 일 정도지요."
손불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는 며칠 더 살 수 있었으나 영감님은…… 죽기로 마음먹었어요."
"주인님께서는 큰아가씨가 북요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약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투명 인간처럼 서 있던 서 선생이 앞으로 나서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기절해 계실 때, 줄곧 큰아가씨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주인께서는 큰아가씨를 걱정하시지만 또 큰아가씨가 북요로 가는 것을 막으실 수 없으시니 몹시 괴로워하시고 자책하셨어요. 주인님께서는 정신이 맑을 때 말씀하셨는데 만약 큰아가씨께서 북요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죽어도 스스로를 용서하실 수 없다고 하셨어요."
"염 황숙께서 어찌하시든 폐하께서는 그를 믿지 않으실 겁니다."
황제가 월령안을 핍박해서 북요로 보낸 것을 염 황숙이 묵인했다고 해도 월령안이 염 황숙의 마지막 모습을 만나게 될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황제는 염 황숙을 믿지 못할 것이다.
염 황숙은 월령안과 만나지 않고도 수중의 세력을 월령안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대장군, 주인께서 큰아가씨가 북요로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것은 폐하의 마음이나 신임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요에서 언젠가 큰아가씨께 손을 뻗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서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자고로 천 일 도둑질하는 사람은 있어도 천 일 동안 도둑을 방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대장군께서 천하 사람들에게 당신이 큰아가씨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린 순간부터 큰아가씨는 이 화를 피할 수 없게 되셨어요."
북요인은 주나라의 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나라의 군사는 북요 철기(鐵騎)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북요인들은 육장봉을 두려워했고 육장봉 수중의 병사들을 두려워했다.
북요인은 금방 대장군에게서 패배를 맛보았으니 손에 비장의 패가 없었다면 무모하게 주나라에 병사를 파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월령안이었다.
월령안을 잡는다면 육장봉의 약점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점은 북요인들도 알고 있었고 황제도 알고 있었다. 북요에 있는 현음 공주도 잘 알고 있었다.
북요에서 내란이 일어나 원기가 회복하지 못한 틈을 타 월령안을 북요로 보내 북요에게 비장의 패를 더한 뒤, 북요를 꼬드겨 다급히 병사를 파견한 것은 바로 현음 공주가 계획한 일이었다.
월령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북요인이 월령안을 잡으려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북요인이 어떻게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
현음 공주가 모든 사람을 파악하고 꿍꿍이를 꾸몄다고 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