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화 아직 구할 길이 있을까?
월령안은 가마에 앉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자기가 한 방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방 안의 배치와 구조는 청주에 있는 그녀의 규방과 똑같았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 지금 청주의 월씨 대저택에 있는 줄 알 것이다.
월령안은 일어나서 손발이 약간 무력한 것 말고도 입었던 옷이 전부 달라졌고 평소에 착용했던 장신구와 반지 등이 모두 제거된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머리도 풀어헤쳐졌다.
'참 나를 잘 아는군.'
월령안은 가볍게 웃고 잠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눈에 들어온 것은 모두 그녀가 익숙한 장면이었다.
화초와 나무는 물론이고, 가짜 산에 오솔길까지 전부 청주의 월씨 대저택과 똑같았다.
"이럴 것까지?"
월령안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회랑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 북요에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이곳은 절대 청주의 월씨 대저택이 아니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청주에서 그녀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그녀의 조카는 크게 애를 쓰고 나서야 그녀를 북요로 이끌어 왔다. 그러니 절대 그녀를 청주로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월령안이 뜰을 나서자마자 성문에서 그녀를 맞이했던 미모의 소녀가 나타났다.
"큰아가씨, 작은 도련님께서 화청에서 아가씨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작은 도련님?"
월령안은 고개를 돌리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미모의 소녀는 살짝 웃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월령안은 단번에 이 소녀들이 하나같이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이며, 그녀들의 입에서 뭔가를 알아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월령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소녀더러 길을 안내하게 했다.
사실 소녀들이 길을 안내하지 않아도 월령안은 화청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저택은 청주의 월씨 대저택과 구조가 똑같았기 때문에 월씨 대저택에서 나고자란 그녀는 눈을 감고서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중정(中庭) 화원을 지나서 그들은 식사를 하는 화청으로 갔다.
미모의 소녀는 월령안을 화청까지 안내한 뒤, 조용히 물러갔다. 곧 화청에는 월령안 혼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입구에서는 화청 안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화청의 중앙 부분에 있는 칸막이용으로 설치된 병풍만 보였다.
월령안은 급히 들어가지 않고 화청 밖에 서서 익숙하고도 낯선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부득이함과 서글픔뿐이었다.
월씨 가문의 따스함의 상징이었던 이 병풍이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야수처럼 커다란 입을 벌리고 그녀의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온정까지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들의 가족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방안에서 맑고 밝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 전 고모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언제까지 서 있으실 건가요?"
바퀴 의자에 앉은 소년은 의자를 움직이며 천천히 병풍 뒤에서 나왔다.
"장평아."
소년을 바라보는 월령안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전, 소년은 창백한 얼굴로 허둥대며 온통 불안함과 망연함을 드러냈었다.
비록 약간의 위화감이 있었으나 월령안은 소년의 과거가 남들과 달라 약간의 속셈이 있는 것은 정상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나 그 얼굴에는 차가운 한기, 결단만 감돌 뿐, 감정이 없었다.
이토록 한기가 감도는 소년의 얼굴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마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랬던 것 같았다. 월령안은 더 이상 눈앞의 소년을 보호하고 불쌍하게 여겨야 할 아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정말 역겨워 죽겠어요. 장평은 무슨. 명이 길고 평안해? 참……. 참 우습네요. 고모는 저의 이 꼴을 보고서도 명이 길 거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소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했다. 불만을 말한다고 해서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지 않았다.
"장평아……."
"됐어요, 고모, 우리 다시 인사하죠."
소년은 월령안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바퀴 의자를 굴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는 정확하게 월령안이 있는 방향으로 왔다.
그는 바퀴 의자를 월령안의 앞에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알이 파여 텅 빈 구멍만 남은 눈으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입가를 움직였다.
"전 월씨이고 이름은 진절(盡絕)이에요! 청주 월씨 가문의 월, 월씨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진, 월씨 가문을 멸절한다는 절. 고모, 이 이름이 어때요? 아주 멋지지 않아요?"
소년은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비록 소리를 냈으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복어(腹語)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의 시선은 소년의 복부에 닿았다. 그녀는 씁쓸함뿐이었다.
"육장봉이 여러 번 날 일깨워 줬었지. 넌 선한 부류가 아니라고, 나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나더러 널 멀리하라고. 특히 이번에 그는 재차 날 가로막으며 북요로 오지 못하게 막았지.
나도 알고 있었어. 너한테서 많은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을. 넌 절대 네가 드러낸 것처럼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이번 납치도 십중팔구는 네가 스스로 짠 판이라는 것도, 날 죽음의 길로 유인하는 함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러나 난 그래도 왔어. 뻔히 알면서도 난 왔어."
후회하냐고?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의심이 드디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저도 고모가 이렇게 멍청한 줄 몰랐어요. 진짜로 오시다니요. 사랑하는 고모, 오셨으니 가지 마세요."
소년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무 인간처럼 창백한 얼굴에는 기괴하고 음산한 기운만 있을 뿐, 인간이 가져야 할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멍청한 게 맞아. 난 그저 스스로 넌 비록 네가 보여 주는 것처럼 나약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너의 눈은 볼 수 없고, 다리는 걸을 수 없고, 입은 말할 수 없으니 네가 강하다고 해도 네 몸은 허약하니 내 도움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했어."
월령안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설령 네가 나에 대해 악의로 가득하다고 해도 너처럼 약한 아이가 날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한다고 해도 날 죽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 넌 그저 날 참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겼고 오직 내 앞에서만 약한 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월령안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자조적이었다.
"날 봐. 난 멍청할 뿐만 아니라 오만하기까지 해."
"어른들은 항상 자기가 대단하고 똑똑한 줄 알죠. 이건 고모의 잘못이 아니에요. 고모는 단지 어른들이라면 다 저지르는 잘못을 범한 것뿐이에요."
소년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곡선은 점점 기괴해졌고 얼굴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홍조가 드리웠다.
월령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년은 흥분되고 격앙된 소리를 냈다.
"고모, 제가 듣기로 그들은 고모의 눈이 참 예쁘대요. 참, 사랑하는 고모, 고모는 눈알을 맛보신 적이 있으세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 눈알의 맛은…… 참 맛있어요. 한입 물면 팍, 하고 핏물이 터지면서 입안 가득 육즙이 넘치죠. 씹어서 터진 눈알은 입안에서 통통 튀는 게 식감도 아주 좋아요."
"장, 장평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이 아이가 말을 잘못 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얘가 일부러 날 겁주려는 건가?'
"고모, 고모는 또 제 이름을 잘못 부르셨어요. 고모, 말조차도 제대로 못 하는 혀는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마지막으로 용서해 드릴게요. 다음에 또 한 번 그러신다면 전 고모의 혀를 뽑아 고모가 드시게 할 거예요."
소년 얼굴의 홍조는 지나갔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복부도 잠잠해졌다. 그의 소리는 또 원래의 청아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월령안의 귀에는 음산하게만 들렸다.
그녀는 소년이 그녀를 겁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지했다. 아니, 진지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소년의 평소 모습이었고 소년의 진짜 모습이었다.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하고 살아남은 그는 그를 학대하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또는 사람이 아니라 악귀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조카가 상처를 받은 후, 소년이 전에 보여 줬던 대로 겁이 많고 나약하고 사람이 다가가는 것을 싫어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기를 바랐다.
지금 모습은 사람도, 귀신도 아니었다. 마음속에는 증오만 남아 섬멸만을 마음에 품은 채, 아무런 온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가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의 조카는 이미 그녀가 모를 때, 악귀로 변해 버렸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해 버렸다.
"난 역시…… 오만했군."
그녀는 오만하게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리라고 생각했다. 또 소년의 다친 마음도 치유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진작이 마음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그가 어렸을 때, 온갖 고난을 당하며 그의 마음은 진작에 뒤틀려져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다.
소년의 파인 두 눈과 소년의 혀가 잘린 입, 그리고 소년의 텅 빈 종아리를 바라보며 월령안은 고통에 차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조카가 지금 이 모양이 된 것이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소년의 잘못인가?
아니면 고모인 그녀의 잘못인가?
눈물이 월령안의 손가락 틈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감정을 꾹꾹 참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민감하게 발견했다. 그는 비꼬는 소리를 냈다.
"고모, 우세요? 벌써 겁을 먹고 울다니. 너무 하찮네요."
"그때 너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월령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슬픔을 억눌렀다.
"그럼요!"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모는 설마 제가 고모처럼 다른 사람이 제 복수를 해 주기만 기다릴 정도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고모, 알려 드릴게요. 그 사람들은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몹시 비참하게 죽었어요. 무려 삼 년이나 고통받다가 죽었어요. 그 삼 년 동안, 저는 밤마다 그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는데 너무 잠이 잘 오는 거예요. 그들의 비명소리는 무척 듣기 좋았어요. 마치 저의 예전처럼요."
소년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으나 말하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기분이 좋은 것이 분명했다.
"넌 월씨 가문의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싶다고 했지. 나만 죽으면 넌 스스로를 놔줄 수 있다는 말이야?"
월령안은 절망에 가깝게 물었다.
'나의 조카는 아직 구할 길이 있을까?'
"고모는 참 순진하네요."
소년의 입꼬리가 다시 움직였다.
"제가 지금 이 꼴로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너는 모든 사람을 다 망가뜨리고 싶은 거야?"
월령안의 동공이 확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