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화 월령안, 당신은 바보요
척연은 군령을 받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몰래 탄식하고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대장군, 말을 준비해 드릴까요?"
"필요 없네."
육장봉은 손을 번쩍 들어 장군복을 벗어 개더니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챙겨. 나 간다."
'말이 없이 어떻게 가려는 건가? 혹시…….'
척연은 잠깐 멍하니 있었다.
육장봉은 몸을 솟구치더니 곧 막사에서 사라졌다.
척연이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서 나갔을 때는, 번개같이 빠른 그림자만 보았을 뿐이었다.
"설마 장봉은 경공으로 도마관까지 달려가려는 건가?"
척연은 눈을 부비며 다시 봐도 자신이 본 게 틀림없었다. 그는 놀란 나머지 수중의 영패를 떨어뜨렸다.
"내가 미친 건지, 육씨가 미친 건지 모르겠네."
* * *
척연이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육장봉은 확실히 미쳤다.
척연이 짐작한 것처럼 육장봉은 경공으로 질주해서 도마관으로 달려갔다.
육장봉은 도중에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잠깐도 쉬지 않으며 사흘간의 노정을 기어이 하루 밤낮으로 줄였다. 그리고 관문을 닫기 직전에 통과해 북요 경내에 들어서기 전에 월령안을 따라잡았다.
"월령안, 멈춰!"
멀리서 월령안 일행을 보자, 육장봉이 고함을 질렀다.
월령안은 대오 가운데 있고 좌우에는 호위들이 있었다. 그녀 주변 호위들은 듣지 못했으나 그녀는 왠지 느낌이 닿아 갑자기 말을 당겨 멈춰 세웠다.
"큰아가씨?"
월령안이 멈추자 호위들도 따라서 멈추었다.
다행히 그들은 관문을 통과한 뒤 길을 다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갑자기 멈춰도 혼란을 빚지는 않았다.
"대장군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한참 바라봤다. 옆에 있던 호위가 웃으며 농을 건넸다.
"큰아가씨께서는 대장군이 그리워서 환청이 생긴 모양입니다.
대장군께서는 만운산에 계십니다. 박차를 가한다고 해도 이틀은 더 걸려야 합니다. 대장군께서 날개가 달리셨다고 해도 오시기 힘들 겁니다."
"월령안!"
호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가까워졌기에 자연히 더 선명했다.
"아닐 거야?"
호위들은 잠깐 굳어져 있다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육장봉이 그들 뒤에 나타났다.
월령안은 진작 육장봉의 모습을 보았다.
천천히 그림자가 멀리에서 가깝게, 작던 데에서 크게, 어렴풋하던 데서 또렷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월령안은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한없이 쳐들렸다.
역시 육장봉이었다. 그녀가 잘못 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장군이다."
호위들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곧바로 월령안의 말 앞에 가서 손을 뻗어 사람을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어둡고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월령안, 당신은 바보요. 그들이 북요로 부르면 그냥 가는 것이오? 그들이 월씨 가문 상사와 표호를 내놓으라고 해도 다 내놓을 거요?"
하루 밤낮 길을 다그친 육장봉은 눈가가 검푸르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가득 섰을 뿐만 아니라 안구가 건조해 핏빛이 돌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흙먼지투성이로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 자라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존귀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거친 사나이로 거듭난 육장봉은 궁색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강호 협객으로 보였다.
월령안은 망설임 없이 육장봉에게 손을 내밀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말에서 안아 내리게 내버려 두고 그의 불만을 고분고분 다 들어주고서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준비가 다 됐어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엇을 준비할 수 있단 말이오?"
육장봉은 월령안을 앞에 끌어다 놓고 털끝 하나 손상된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얼굴의 노기가 조금 옅어졌다.
"북요 삼 황자 야율헌일에게 변방 요새에 와서 저를 맞이하라고 전갈을 보냈어요."
야율헌일은 절반은 조나라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 비록 황자지만 북요 황제에게 중시를 받지 못했다.
애당초 북요 황제는 그를 볼모로 주나라에 보냈었다. 만약 월령안이 그를 위해 주선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북요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돌아갔다고 해도 야율헌일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모족(母族)의 지지가 없고 또 절반이 조나라 혈통인 그는 북요 황제의 중시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요 거의 모든 귀족들로부터 배척당하기도 했다.
월령안이 암암리에 그를 도와 돈과 힘으로 인맥을 뚫어 주지 않았다면, 그는 북요에서 발붙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또 야심이 컸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북요 황제의 자리를 노리려 했다. 그러므로 그는 월령안의 지지를 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가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자기를 맞이하러 나오지 않을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야률헌일이 그녀를 맞이하러 오면 북요에서 그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맞이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는 북요에서 발붙일 수조차도 없었다.
둘 다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야율헌일은 똑똑한 사람이니, 월령안은 그가 어떻게 선택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쓰는구먼."
북요의 상황에 대해서, 육장봉은 월령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므로 물론 그녀의 속셈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유장봉은 여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야율헌일은 자기 한 몸도 간수하기 어려운 처지요. 당신 덕에 겨우 자리를 잡았단 말이오. 당신은 무슨 자신감으로, 야율헌일이 당신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오?"
야율헌일이 워낙 능력이 없는 건 둘째치고, 설령 그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났다 해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누가 월령안을 보호해도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야율헌일이 저를 지키지 못해도 괜찮아요. 당신이 있잖아요."
월령안은 육장봉과 마음이 통해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육장봉의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월령안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일부러 홀가분하게 말했다.
"우리 둘 사이 관계면, 결정적인 순간에 현음 공주께서 저를 외면하시지는 않겠죠?"
월령안은 단정 지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현음 공주를 자신의 뒷심 중 하나로 간주하지만, 결코 현음 공주에게 바라지 않고, 또 현음 공주에게 희망을 걸지도 않았다.
현음 공주는 육장봉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북요에서 작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혹여 현음 공주에게 도움을 청해 인정 빚을 짐으로써, 이를 기회로 현음 공주와의 사이를 한층 더 가까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큰 어려운 문제, 생사에 관련된 문제 같은 것은 분명 현음 공주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을 것이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현음 공주가 그녀를 구해 주지 않을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육장봉의 체면을 봐서라도 현음 공주는 그녀의 생사를 유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녀는 과분하게 남의 도움을 바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이 장악하고 해결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녀는 남을 귀찮게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과의 관계 때문에, 현음 공주를 도덕적으로 강요해 그녀를 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너무 시정배같이 느껴졌다.
육장봉은 잠시 침묵하더니, 월령안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월령안은 아파서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일깨워 주려 했다. 이때 육장봉이 자조가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분은 외면할 거요. 그분은 난감해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오."
월령안은 멍해졌다.
'육장봉은 방금 뭐라고 했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육장봉이 잘못 말한 건가?'
현음 공주가 이리 개성이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현음 공주를 귀찮게 하지 않고,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육장봉은 그녀에게 현음 공주는 전혀 난처해하지 않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 현음 공주는 설령 육장봉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녀를 구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음 공주에게 있어서, 육장봉의 체면도 전혀 값어치가 없단 말인가.
그녀는 왠지 육장봉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여전히 우습게 생각되었다. 한편 얼마간 현음 공주를 높이 보게 되었다.
현음 공주는 자기 힘으로 북요에서 발을 붙이고, 북요에서 주나라 정보망을 구축한 여인답게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 월령안은 곰상스레 현음 공주에 대한 존경심을 거두었다.
육장봉은 자기 생각에 잠겨 월령안의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오. 그분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나라뿐이오. 당신은 물론이고, 나도…… 다시는 구해 주지 않을 것이오."
십일 년 전, 북요에서 그의 어머니는 냉정하게 알려 주었다. 그를 한 번 구해 주는 것은, 어머니로서 그의 뜻을 묻지 않고 그를 낳은 데 대한 보상이라고 했다.
이후부터 그들 모자의 인연도 다하고 그녀는 더는 그의 생사를 관여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물론 육장봉도 그녀의 생사에 대해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월령안은 부모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육장봉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현음 공주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현음 공주를 비난하거나 타박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는 육장봉이 현음 공주를 책임감이 없다는 둥, 어머니 자격이 없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음 공주는 좋은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월령안은 아예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곧 화제를 돌렸다.
"뭐 강대한 조력자가 한 분 줄기는 했네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토사(菟絲) 꽃이 아니라고요.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여자가 아니에요."
현음 공주는 그때 화친 공주의 신분으로 북요에 갔다. 주나라의 힘이 약해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고, 의지할 곳조차 없던 상황에서 그녀는 북요에서 발붙였다. 그런 그녀가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육장봉이 더는 걱정하지 않도록, 월령안은 자신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저는 주나라의 상인, 월씨 가문 표호의 주인으로 삼 황자 야율헌일의 요청을 받고 북요로 가는 거예요. 저는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그리고 떳떳하게 북요로 가기에 그들이 설령 손쓰려 해도 암암리에 마수를 뻗쳐야 해요."
그녀의 눈매가 차갑고 날카롭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