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화 이 망할 놈의 돈 냄새
은표로 바꿔 보내려 했던 월령안은 잠시 멈칫하였다.
육백여만 냥 은을 은표로 바꾸면 함 두 개면 족했다. 함을 닫으면 누구도 그 속에 든 것이 은표인 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은으로 바꾸면 완전 달랐다.
월령안은 잠깐 생각한 끝에 온 태수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상천, 소연지를 찾아가 현금을 마련해 봐라. 관성에 있는 현금을 모두 꺼내도록 해. 십만 냥을 비상금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온 태수에게 보내라."
육백여만 냥의 반짝반짝 빛을 뿜는 은 덩어리들은 모든 사람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상천은 흠칫 떨었다.
"큰아가씨, 현금으로 온 태수에게 가져다주는 겁니까?"
'큰아가씨는 지금 정말 온 태수의 명을 재촉하는 게 아닌가?'
그는 현금을 받은 온 태수가 얼마나 죽고 싶어 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완안유는 금나라 혹은 북요의 정탐꾼만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나 거액의 현금은 금나라, 북요의 강도들뿐만 아니라 주나라의 강도들까지도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것이다.
온 태수와 척 수비가 이 돈을 무사히 변경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마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금나라 황제는 적어도 수십 개의 성곽을 바꿀 수 있다. 이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온 태수는 잘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 대량의 현금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끌면 누구도 이반반을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반반이 몰래 완안유를 데리고 변경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상천은 잠깐 멍해 있다가 엄숙하게 말했다.
"소인이 지금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주나라에게는 돈 보다는 완안유의 신변이 훨씬 더 중요했다.
돈은 없으면 다시 벌면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 황제는 하나뿐이었다.
상천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산서 전장의 소주(少主) 소연지를 찾아가 현금을 요구했다.
산서 전장은 월령안의 무역지역이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량의 현금을 조달해 상인들이 현금을 대량으로 인출하는 것을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많이 준비했다 하더라도 무역지역의 일일 매상고가 일억 냥에 달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준비한 현금으로는 무역지역의 거래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대다수 상인들은 월씨 가문 표호가 잘나갈 거라 생각해 표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히 현금으로 환전하지 않았다. 산서 전장에서 준비한 현금은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전장에서는 단번에 육백여만 냥의 현금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으로 준비해도 이백육십만 냥 정도입니다."
소연지는 전장 주인들과 반나절 계산하고 나서야 정확한 수치를 내놓았다.
"왜 이렇게 적습니까?"
상천은 며칠간 다룬 돈이 모두 천만 냥을 단위로 하다 보니, 이 숫자를 듣자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적다고?'
소연지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하루 안에 이백여만 냥의 현금을 모았다. 이게 어디를 봐서 적은 돈인가.
국고를 제외하고, 어느 전장에서 이렇게 많은 현금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월씨 가문 표장에서 이 며칠간 만진 돈을 떠올리자, 소연지는 원망하려던 말을 되삼켜 버렸다.
월씨 가문이 돈을 버는 속도에 비하면 이백만 냥은 확실히 적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는 내놓을 수 있는 현금이 이 정도뿐이었다.
"소주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상천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연지의 비분에 찬 표정을 보고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호위와 함께 현금을 끌고 갔다.
상천은 현금을 가지고서 곧장 태수부로 달려갔다.
* * *
온조, 온 태수는 상천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듣고 머리가 아팠다.
"지금 내가 자리에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이냐?"
"대인, 상 소가(小哥)가 무역지역의 장부책과 돈을 가져왔습니다."
하인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듯, 당황하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온 태수는 금세 크게 기뻐했다.
"어서 들여라."
상천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하인의 안내를 받아 화청에 들어섰다.
온 태수는 상천이 예를 올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다.
"상 소가, 수고했네."
"대인께서 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상천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 결코 온 태수의 '상 소가'라는 호칭에 우쭐해서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수중의 장부책을 온 태수에게 바쳤다.
"대인, 이는 무역지역의 장부책입니다."
상천은 장부책을 건네고 또 한마디 했다.
"또, 소인이 현금을 가져왔습니다. 대인께서 이 자리에서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좋아, 좋네, 좋고말고!"
온조는 되는 대로 장부책을 두어 장을 뒤적여 보았다. 그는 위에 적힌 액수가 큰 거래들을 보면서 얼굴의 기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드디어 큰 공을 세울 것 같군.'
"대인, 자리를 옮기시죠."
여든 개가 넘는 상자에 꽉 담긴 현금을 화청에 들일 수가 없었다.
상천은 현금을 태수부의 바깥뜰에 놓아두고 호위들을 지키게 했다.
온 태수는 그 시각 머릿속에 온통 돈밖에 없었다. 상천이 밖으로 청하자,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덩달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 나가자마자, 뜰이 꽉 들어차 있는 사람 키 절반 높이의 커다란 상자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많은가!"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금이 다가 아닙니다."
상천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그중 한 상자는 은표라는 사실을 온 태수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상자 하나가 뜰에 가득 쌓인 현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깜짝 놀랐네. 난 또 모두 현금인가 했지."
온 태수는 몰래 숨을 고르고서 뒤돌아 의미심장하게 권했다.
"상천, 큰아가씨한테 이르게. 모두 자기 사람이니 이리 사양하지 말라고. 다음번에는 돈을 보낼 때는 이렇게 멋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그는 이게 모두 현금인 줄 알고 괜히 기뻐했다.
'참, 허탈하군.'
상천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년처럼 여전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 이 중 여든 상자는 현금이고, 나머지 작은 상자는 은표입니다."
상천은 손을 들어 호위에게 은표를 든 상자를 올려오라고 명했다. 그러고는 상자를 열어 온 태수 앞에 올렸다.
"회통 전장의 은표입니다. 모두 만 냥짜리 은표로 사백만 냥입니다. 대인, 한번 확인해 보세요."
"사, 사백만 냥?"
온조는 상자에 가득 찬 은표를 보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꾹 눌렀다.
그는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놈의 심장, 이런 때에 이렇게 빨리 뛰면 어떡하나. 너무 변변치 못한 거 아닌가.'
"맞습니다."
상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뜰에 가득 쌓인 현금을 가리켰다.
"그 외에 은 이백육십팔만 냥이 있습니다."
상천의 말이 떨어지자, 호위는 은이 담긴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젖혔다.
한순간 전체 뜰이 은빛으로 밝게 빛났다. 그야말로 으리으리하고 찬연했다.
"내…… 내가……."
온조는 심장을 움켜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백에 이백을 더하면……. 맙소사!'
무역지역은 단지 사흘간 영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조정을 위해 육백여만 냥의 돈을 벌어들였다.
그럼 월령안은 얼마나 벌었을까.
'아차! 아니군.'
그가 잘못 기억한 것이었다. 월령안은 조정보다 적게 벌었다. 무역지역 거래에서 뗀 수수료에서 큰 몫은 조정에서 가져가고, 월령안은 작은 몫만 남겼다.
작은 몫, 절반밖에 안 되어도 삼백여만 냥이나 되었다.
'어쩐지!'
변경의 사람들이 어째서 월령안을 돌도 금으로 만들고, 재신이 안아 키운 친딸이라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돈 버는 능력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대단했다.
'장봉이 삼 년씩이나 월령안이 빛을 못 보게 했군.'
온조는 수중의 은표와 뜰을 꽉 채운 '돈 냄새'를 풍기는 현금을 보면서 입을 딱 벌린 채 한참 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이 망할 놈의 '돈 냄새'가 그는 너무나 좋았다.
* * *
상천은 온 태수와 현금 인계를 마치고 떠났다. 온 태수는 상천을 보내고서도 일약 벼락부자가 된 기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술에 취한 것처럼 그냥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꿈만 같아 보이고 두 발은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나른한 것이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허황된 느낌은 빌어먹을 행복감이었다.
이번에는 결코 조정만 벼락부자가 된 게 아니었다.
그들 온씨 가문 또한 어지간히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상금도 열몇 배 정도가 불어났다. 이는 그야말로 돈을 뺏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돈을 번 것이다.
"그러니까 월령안이 돈을 뺏는 게 너무 느리다고 했지. 진짜잖아. 무역지역에서 돈을 버는 속도가 누군가에게서 돈을 빼앗아 오는 것보다 훨씬 빠르네."
온 태수는 입이 헤벌쭉해서 얼간이같이 웃었다.
척연, 척 수비는 소식을 받고 서둘러 달려왔다. 그는 그때까지도 바보같이 좋아하고 있는 온조를 보고 화가 나서 얼굴이 새카매졌다.
"온씨!"
"왜, 왜 그래? 싸움이 난 거야?"
온조가 깜짝 놀라 자칫하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척연의 표정을 보고 긴장해서 질문을 던졌다.
"싸움 같은 소리!"
척연은 손을 들어 온조를 한 대 쥐어박았다.
"네가 미친 거야, 아니면 월령안이 미친 거야? 수백만 냥의 현금을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관아에 끌고 오다니. 우리 관병들이 얼마나 힘들어질지 생각이나 해 봤어?"
"척씨, 너 그만해."
온조가 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주먹에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난 안 끝났어. 오늘 너를 죽이지 못하면 성을 갈 테다."
척연은 헛주먹질을 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서 또 발길질을 했다.
"어이쿠!"
온조는 문관으로서 허약한 몸을 가졌기에 달리기에서 척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러려니 하고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서 척연이 마구 때리게 내버려 두었다.
좌우지간 척연이 그를 때려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온조는 두어 주먹 맞아 주다가, 척연이 그의 얼굴에 손을 대려 하자 연신 손을 들어 저지했다.
"척소연, 어지간히 해두자. 사람을 때려도 얼굴은 치지 않는다고 하잖아. 내일 얼굴에 시퍼렇게 멍들면 남들은 우리 집 포도 넝쿨이 넘어진 줄 알 거야."
"무슨 좋은 생각을 하는 거야. 관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네 부인은 화가 나면 너를 밖으로 쫓거든. 포도 넝쿨이 넘어지는 거 좋아하고 자빠졌네. 네 집에 포도 넝쿨이 어디 있냐?"
척연은 갑옷으로 전신 무장을 하고서 온조를 뒤쫓느라 한참을 뛰어다녀 지치기도 했다. 그는 때맞춰 손을 거두고 온조 옆에 널브러졌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온조는 척연을 흘겨보며 더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어 물었다.
그는 척연에게 반나절이나 쫓겨 다니며 얻어맞고도 왜 얻어맞았는지 몰랐다.
"너 정말 몰라?"
척연도 마찬가지로 온조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못마땅함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