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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928)화 (928/1,004)

928화 제발 자기 자신을 놓아주시오

"다음번에 다른 곳을 찌르시오. 이곳은 단단해서…… 당신 손가락이 아플 거요."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면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녀는 그의 정중한 말투만 들을 수 있었다.

"좀 놓으세요."

월령안은 화가 나서 힘껏 손을 빼내려 했다.

이번에 육장봉은 재빨리 손을 놓았다. 월령안은 괜히 자기가 한 번 이긴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육장봉과 실랑이질할 정도로 유치하지 않았다.

"말해 보세요. 또 무슨 저를 속인 일이 있나요?"

"정말 한 가지 사실을 미처 알려 주지 못했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분노가 아직 채 가라앉지는 않았으나, 그전과 같이 전혀 대화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닌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염 황숙이 월령안에게 편지를 보내게 재촉한 것이 정확한 한 수였다.

"무슨 일이에요?"

월령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육장봉과의 간격을 벌렸다.

육장봉의 존재감은 너무 강했다. 그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가 너무 의식되었다. 그녀는 왠지 자신이 육장봉에게 포위되고 그의 사냥물이 되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육장봉은 허리에 매달았던 비단 주머니를 끌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월령안의 손을 잡고 비단 주머니를 그녀의 손에 놓았다.

"이번에 바다로 나가서 질이 좋은 진주를 좀 얻었소. 원래는 당신 몰래 봉관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는 감히 못 만들겠소."

육장봉은 비단 주머니를 내려놓고 즉각 물러났다. 월령안이 불쾌해할까 몹시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감히 만들지 못할 거라면서, 왜 주세요?"

월령안은 그를 흘겨보더니 눈길을 내려 손바닥에 놓인 비단 주머니에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비단 주머니를 알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육장봉을 위해 만든 것으로 안에 따뜻하고 매끄러운 옥을 넣었었다. 그녀가 육장봉에게 주었던 생일 선물 중 하나였다.

"음, 감히 숨기지 못하고, 감히 몰래 만들지도 못하겠소."

육장봉의 목소리에는 억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는 월령안을 위해 봉관을 만들고 하루빨리 그녀를 맞아들이려는 마음으로 강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월령안의 환희에 찬 웃는 얼굴을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월령안이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는 수백 리나 쫓아갔지만 콱 차여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이지, 생각만 하면 당장 변경에 날아가 조계안을 한바탕 두들겨 주고 싶었다.

"감히 만들지 못하겠으면, 그냥 만들지 마세요. 돌려 드릴게요."

월령안은 비단 주머니를 열어 보지 않고 곧바로 육장봉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고는 돌아앉더니 손이 가는 대로 장부책 하나를 꺼냈다.

"저는 아직 장부책도 보아야 해요. 대장군께서는 다른 일이 없으면 저 이만 실례할게요."

"장부책을 보지 말고 나를 보시오."

육장봉은 월령안 수중의 장부책을 한쪽에 던져 버리고 강압적으로 의자를 들어 방향을 바꾸었다. 월령안이 그를 바라보게, 그리고 오직 그만 볼 수 있게 했다.

"월령안,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오. 우리 대화 좀 합시다."

육장봉은 가면을 벗고 몸을 아래로 기울였다. 얼굴에는 엄숙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월령안은 거절하려다가 그의 눈빛 가운데 비친 매서움에 놀라고 말았다.

월령안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켜 버렸다. 그러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낙담해서 말했다.

"무슨 대화를 할 건가요?"

그녀는 또 한 번 육장봉의 끈질김에 패했다.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사냥감으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월령안, 제발 자기 자신을 놓아주시오. 안 되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에 따라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다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빛에는 온통 안타까움뿐이었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월령안, 모든 게 뜻밖의 일이었소. 당신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횡사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오.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고 두 사람은 당신을 위해 죽은 게 아니오. 당신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범인이 아니오.

사건의 진정한 범인은 북요, 그리고 청주 월씨 가문을 멸족시키려는 월씨 동족들이오. 월씨 가문 사람들을 방임하고 비호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준 북요라는 말이오.

그리고 소심하고 나약해 진범에게는 복수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복수하는 월씨 동족들이오. 월령안, 모든 잘못을 떠안으려고 하지 마시오. 당신은 잘못한 적이 없소……."

그는 그녀의 곁을 여러 날 뒤따르며, 매일 밤 장막 밖에서 그녀를 지켰다. 그리고 밤마다 그녀가 꿈속에서도 낮게 흐느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책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내려놓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 자신이야말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한 원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탓하고, 염 황숙을 탓하지만, 가장 심하게 탓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만약 매일 밤 꿈속에서조차 흐느끼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는 심지가 굳고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월령안이 그때 당시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여태껏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때 당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미봉하려 했던 어린 소녀였다.

뚝……. 뚝…….

월령안은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끊임없이 훌쩍여서야 비로소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하게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조계안이 그때 당시의 일을 끄집어내고 노인과 육장봉까지 연루되어서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여태껏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는 육장봉을 탓하고 노인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했다고 탓했지만 더욱이는 자기 자신을 탓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한 자신을, 육장봉을 사랑하게 된 자신을, 그리고 노인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간접적으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만든 육장봉을 사랑하고, 간접적으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한 노인을 웃어른으로, 유일한 가족으로 생각했던 그녀 같은 인간이 어찌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희생에 미안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가장 아끼던 딸로서, 여동생으로서 자격이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는 온통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비난하는 소리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양심이 없다고, 살아갈 자격도, 월씨로서 자격도, 그녀의 딸이 될 자격도 없다고 욕하며 그녀를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반반으로 갈라진 것만 같았다. 절반은 노인과 육장봉 쪽에 서서, 그녀에게 노인과 육장봉은 무고한 것으로 그들한테 화풀이하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아프게 하고 원수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다른 절반은 육장봉과 노인이 없으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육장봉과 노인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살해한 하수인이므로 그들을 절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마음속 고통을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육장봉은 그녀에게 자신이 그 고통을 알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더러 스스로를 놓아 주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해야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아직 내려놓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월령안은 슬프게 울었다. 눈에는 슬픔, 망연함과 무기력함이 있었다.

그녀가 내려놓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더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이토록 취약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월령안을 본 적이 없었다. 육장봉은 심장이 조이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그의 어린 아가씨는 너무나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좀 더 일찍 위로하지 못하고 그녀 혼자 이런 일들을 마주하게 한 것이 후회되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육장봉은 월령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내 어깨에 기대고 등을 돌리고 있으면 누구도 당신이 우는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오."

"흑……. 흑……."

월령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어깨에 엎드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었다.

'육장봉의 말을 믿어야 할까? 나는 정말 원흉이 아닐까?'

육장봉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마치 그때 당시 월씨 가문 저택 밖에서 낯선 여자애를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여자애가 망연자실할 때, 입을 열어 마음을 풀어 주고, 끝나면 더는 말하지 않고 여자애가 스스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울음 때문에 결렸을 때, 등을 다독여 주면서 누군가 관심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녀가 슬퍼서 울 때면 함께 있어 주면서 여자애가 더는 혼자가 아니고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촛불이 가물거리며 밝아졌다가 어두웠다가 했다. 땅바닥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있었다. 마치 동일체처럼 일렁이는 촛불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려도 두 사람의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고 시종일관 겹쳐져 있었다.

* * *

월령안은 오랫동안 울다 보니 목이 잠겼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야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새빨개진 두 눈으로 육장봉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만약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도 이처럼 난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소. 하지만 당신이 내려놓을 수 있소. 무릇 지나간 것은 모두 앞으로의 서막이 될 거요. 모든 미래는 희망적이오."

육장봉은 월령안 앞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시선을 그녀와 나란히 했다.

"아무것도 다시 시작할 수 없소.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소. 우리만의 미래 말이오."

"미래?"

월령안은 입술만 가볍게 움직였다. 눈에는 온통 씁쓸함뿐이었다.

만일 그녀가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을 원한 속에 가두어 둔다면, 그녀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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