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영감님의 편지
"누군가 일부러 이 소식을 막았습니다."
암위는 아무래도 염 황숙이 손쓴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직 염 황숙만이 그들이 전하려는 소식을 막을 수 있었다.
"염 황숙의 병세가 악화된 건가요?"
암위가 짐작할 수 있으면 물론 월령안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염 황숙이 손써서 소식을 막아 그녀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한 것을 보면 오직 염 황숙의 건강 상황뿐이었다.
암위는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모릅니다. 황궁에서 전해진 소식은 없습니다."
염 황숙이 알리려 하지 않는 소식에 대해서 그들은 진실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물러가세요."
월령안은 암위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 황숙이 직접 손을 잡고 가르쳤다. 염 황숙의 능력에 대해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암위를 내보내고 나서도 그녀는 서둘러 편지를 읽지 않고 손에 들고 바라보기만 했다.
"뭐라고 답신했을까? 육장봉처럼 내게 당신들은 태어나서부터 존귀하고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태어나서부터 비천해, 죽어도 헛된 죽음이라고 변명했을까?"
월령안은 비웃듯이 웃음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육장봉이 그녀에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불평등하다."
육장봉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불평등했다. 주나라의 백성으로서 주나라의 조왕과 대장군부의 후계자를 위해 죽었으면 값진 죽음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냉혹하고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된 그 순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현실도, 이성적이다 못해 잔인한 변명도 아니었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태도였다.
그녀는 육장봉의 태도, 염 황숙의 태도를 보고 싶었다.
십일 년 전, 육장봉과 염 황숙은 그녀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죽은 뒤, 그녀의 감정이나 생각을 개의치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명은 그녀와 가장 가까운 웃어른이고, 한 명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들의 태도에 아무 변화도 없단 말인가.
후회도, 죄책감도, 미안함도 없단 말인가.
육장봉의 태도는 그녀를 더없이 실망시켰다.
그녀는 염 황숙이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영감님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죽고, 살아남은 것은 주나라의 염 황숙뿐일 것이다.
월령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눈을 떴다. 시선은 편지 봉투에 떨어졌고 더는 망설이지 않고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꺼내자마자 그녀는 편지지에 찍힌 손자국을 보았다. 동그라미까지 선명하게 찍힌 지문이었다.
물론 편지지에는 그녀의 지문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편지지를 서둘러 펴지 않고 아무렇게나 여러 번 눌러 보았다. 이변이 없이, 편지지에 손을 대면 지문이 남게 되고 절대 지워지지 않았다.
"영감님은 참 영감님답군요. 이 편지는 밀봉하지 않아도 감히 볼 사람이 없겠어요."
월령안은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편지지를 펼쳤다.
편지지에는 세 구절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단락
"다시 한번 되풀이되면 육장봉과 조계안이 자생자멸(自生自滅)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두 번째 단락
"그해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인 사람들은 신비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겨냥해 온 것이다. 육장봉과 조계안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천신만고 끝에 겨우 북요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신분이 특별하기에 나는 위에 보고하지 않고 사적으로 공과가 서로 상쇄된 것으로 처리했다."
세 번째 단락
"네 마음이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거라. 영감님은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해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세 단락을 제외하고 또 아주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꼬마 령안……, 울지 마. 그러면 이 영감님 마음이 아프단다."
후두둑,
월령안은 거기까지 읽고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물이 방울방울 편지지에 떨어지면서 마지막 작은 글씨가 번졌다.
그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그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북요에서 장사를 했다.
북요에서 두 사람은 노인의 명령에 따라 위험에 처한 육장봉과 조계안을 구하러 되돌아갔다.
그리고 월씨 가문이 만든 신비한 조직에 암살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사건들이 두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또 필연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손쓴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횡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노인도, 육장봉과 조계안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죽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떠넘길 수 없는 책임이 있게 되었다.
사람마다 잘못이 없지만 또 사람마다 잘못이 있기도 했다.
그녀는 사실 자신이 남을 탓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광란 증세를 보일 때 말했던 것처럼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녀 때문에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북요로 가게 되었다. 그녀야말로 원흉이고 죄인이었다.
육장봉의 이성적이면서도 잔혹한 변명은 그녀를 분노하게 하고 원망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분노하고, 간접적으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살해한 범인을 좋아한 자신을 원망했다.
노인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모든 책임을 본인에게 돌렸다. 이는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노인은 그때 당시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암황으로서 그의 직책은 주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육장봉과 조계안이 북요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주나라는 피동에 처했을 것이고 심지어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노인은 그때 당시 주나라에 가장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다만 이 결정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에게도 너무나 잔인했다.
"나 어떡해야 하나요?"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노인을 탓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십 년 동안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노인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만큼 중요했다. 만약 이 때문에 노인과 소원해지고 관계를 단절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일찍부터 노인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그 문제를 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조사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두려웠다.
조사해 낸 것이 지금과 같이 그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일까 두려웠다.
월령안은 편지를 꼭 움켜쥐고 소리 없이 통곡했다.
그녀는 항상 결단력이 있고,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며, 더욱이는 감정에 휘둘러 결정하지 않았다.
노인은 일찍 그녀가 일 처리에 과단성이 있고 이해득실을 잘 판단하는 것이 천부적인 결정권자라고 여러 번 칭찬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그녀의 머릿속은 흐리멍덩해서 아무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월령안은 탁상 위에 엎드려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하지만 너무나 억제된 탓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오직 어깨의 떨림만이 그녀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한참 울다가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야?"
방 안에서 두 번째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월령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재빨리 얼굴의 눈물을 닦아 내며 마음속 슬픔을 거두었다.
눈물에 씻긴 눈동자는 맑고 밝았다. 눈빛에 비꼈던 고통의 감정은 조심성과 경계심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대부분 몸을 어둠 속에 숨기고, 가면을 써 두 눈만 보이는 육장봉을 보게 되었다.
"당신이군요."
월령안은 경계심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우더니 일어나서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대장군께서 이리 깊은 밤에 방문하시다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육장봉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월령안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육장봉은 월령안 앞에 이르러 발끝은 그녀의 발끝에 맞대고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대신해 가볍게 그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닦아 주며 말했다.
"다음번에 울 때는 내 품에 기대 울어도 되오."
얇게 굳은살이 밝힌 손가락이 볼을 스쳐 지나자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꾹 잡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움직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월령안은 손을 들어 밀쳤지만 밀어내지 못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당신의 말을 듣겠소. 내가 움직이지 않을게."
육장봉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피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쉬고 가라앉았다. 분명 어떤 감정의 기복도 없었지만 깊은 정을 담고 있다는 착각을 주었다.
그는 손으로 월령안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움직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밖에 드러낸 눈은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이 그 눈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불빛 한가운데는 바로 월령안의 모습이 있었다.
불빛은 그의 항상 차기만 하던 눈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월령안의 축소된 모습은 그의 눈빛에 어린 위엄을 부드럽게 해 줘, 그의 눈이 유달리 애틋하고 정이 넘쳐 보였다.
"사기꾼!"
월령안의 눈물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전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통곡이 아니라, 소리 없는 눈물로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띠고 있었다.
"육장봉, 이 사기꾼!"
십 년 동안 그에게 감격하고 했고, 그를 구원으로 여기게 했으며 그녀의 마음마저 속여 앗아갔다.
만약 그때 당시, 그녀가 진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육장봉을 마음속 유일한 희망, 유일한 영웅, 유일한 의지로 간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멍청하게 십 년간 그를 뒤쫓으며 자신을 그와의 감정에 더욱더 깊게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한 방을 먹여 그때 당시 그녀의 아픔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당신을 속인 게 아니오. 그때 당시 나는 정말 몰랐소. 나중에……."
육장봉은 월령안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스르르 내려 그녀의 등으로 옮겼다.
"나중에는 그때 당시 살인범을 찾아낸 다음, 당신과 말하려고 했소."
그는 배후 주모자를 찾아내면 월령안이 그렇게 화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주모자를 찾는 등 그의 행동을 봐서라도 그에게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그를 만나고 싶지 않고, 얼굴조차 보려고 하지 않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일에 조금 진척이 있게 되자 조계안, 이 비루먹을 자식이 다짜고짜 사실을 밝힐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와 월령안이 더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조계안은 자신이 서둘러 도망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만약 강남에 계속 남아 있으면, 그는 조계안이 평생 가면을 쓸 필요가 없게 흠씬 두들겨 주었을 것이다.
"기만하고 속이고. 육장봉, 당신 대단하군요."
월령안은 살구씨 같은 눈동자를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육장봉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이를 갈았다.
"말해 보세요. 또 무슨 제가 모르는 일이 있나요? 당장 모두 털어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