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화 어차피 쓰게 된 덤터기
지금 일어서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이다.
물론 무릎을 꿇어도 모두 헛수고였다.
"좀 전에 했던 말을 아직도 그대로 전할 것이냐?"
황제가 또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 조계안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한 동생!'
자초지종을 알고 보면 그는 불쌍한 동생이 염 황숙에게 당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하세요. 다만 말을 바꾸세요. 염 황숙께서 강남에서 과격한 제 행위에 불만을 가지고 저를 꾸짖었는데, 제가 불복해 황숙과 언쟁을 벌이다가 황숙께서 화가 나서 쓰러졌다고 하세요. 그래도 제가 여전히 불복해 계속 논쟁하다가 황숙께서 피를 토하셨다고 하세요."
어차피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죄명이 하나 더 많아져도 별 상관이 없었다.
황성사를 제외시키고 조정의 대신들이 황성사를 겨냥하지 못하게 한다면 무릎을 꿇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가치가 있기는 개뿔!'
무릇 염 황숙이 이렇게 악랄하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겨룰 줄 알았다면, 그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 좋은 점도 얻지 못했으니 정말로 어지간히 손해 본 게 아니었다.
"안 된다."
황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절했다.
"모든 일을 너에게 떠넘길 수는 없어. 네가 강남에서 한 일은 짐이 허락한 것이다.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 잘못이다."
조계안은 고개를 저었다.
"황형, 부황의 말씀을 잊으신 건 아니죠? 천자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범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천자는 영원히 옳으며 반드시 옳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자는 절대로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며, 잘못을 인정하면 더욱 안 되었다. 일단 이런 사례가 생기면 앞으로 수많은 잘못이 천자가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너한테……."
"저 말고는 누구도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건 본래 제 잘못이에요. 제가 책임지는 게 마땅해요."
조계안은 잠깐 피곤함을 느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한마디 물었다.
"황형, 염 황숙이 월령안에게 보낸 편지에 뭐라고 적었었나요?"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짐은 보지 않았다."
조계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가 역시 변변치 못하군요."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마침 밤에 그의 귀에 전해졌고, 마침 황제가 후궁으로 가서 그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는 염 황숙을 탓할 수 없었다. 탓하려면 그 자신이 소홀히 했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별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염 황숙이 파 놓은 함정에 뛰어든 것이었다.
"황형, 황숙은 황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장악하고 있습니다."
조계안은 고리에 고리를 끼워 맞추려면 수하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주나라 간첩은 황숙이 길러낸 것이다."
황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네가 장악하고 있는 힘도 황숙이 너에게 기꺼이 맡기고 싶은 것이야. 만약 그분이 너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단다."
염 황숙이 수중에 얼마나 많은 힘을 장악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패가 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염 황숙이 모든 것을 내놓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황숙은 그에게 또 새로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것이 바로 월령안이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해도 그녀가 다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염 황숙의 비장의 무기를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그는 월령안에게 선뜻 손쓰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염 황숙이 월령안과 접촉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마침, 이 기회를 빌려 제가 황성사를 내놓고 암부의 일에만 전념할게요."
조계안은 고개를 들어 염 황숙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눈에는 또다시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결코 계속 지기만 하지 않을 것이다.'
* * *
이튿날 조회에서 대신들이 탄핵하기 전에, 황제는 명을 내려 조계안의 작위와 업무를 빼앗고 시간을 정하지 않고, 그가 잘못을 시인할 때까지 종인부(宗人府)에 감금하기로 했다.
조정의 대신들, 특히 어사(御史)들은 어젯밤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내고 밤새 상주서를 써서 조계안을 탄핵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상주서를 내놓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조계안을 처리했다.
마치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허공만 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지만 성취감이 없었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기운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 승상과 같은 몇몇 원로대신들은 이와 상반된 모습이었다.
황제가 조계안을 종인부에 감금해 잘못을 뉘우치게 하겠다고 선포하자, 최 승상 등 몇 명은 얼굴빛이 굳어졌다.
황제가 조계안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조계안이 강남의 일 때문에 중벌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강남의 관리들은…….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곧이어 두 번째 어명을 선포했다.
강남 총독 여서는 참수형을 즉각 집행하고, 그 가문의 남자는 유배 보내며 삼대 내에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여자는 교사방(敎司坊)에 집어넣었다.
조방 방주 제운의 구족을 멸하고, 조방의 기타 모든 사람은 참수하며, 조계안을 암살하는 데 참여한 사람은 삼족을 멸한다고 했다.
이 두 주범을 제외하고, 강남의 기타 관리, 황명을 받고 사건을 조사하러 갔으나 강남 관리의 협박에 못 이겨 조정을 배신한 흠차 대신을 포함해, 모두 파직당하고 처벌되었으며 가산을 몰수하는 한편, 혐의의 경중에 따라 유배 보내거나 참수했다.
주나라는 줄곧 문관을 우대했다. 강남 관리들이 부정부패하지만 그들이 범한 잘못이 가장 엄중한 것은 아니었다.
주나라가 건국된 이래, 적지 않은 관리들이 범한 잘못은 강남 관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남의 관리들이 가장 엄한 벌을 받게 되었다.
황제가 어명을 내리자, 적지 않은 대신들이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황제가 명을 거두어들이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줄곧 말이 잘 통하던 황제였지만 이번에는 전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차갑게 한마디 했다.
"지금 짐에게 어떻게 일하라고 가르치려는 것이냐?"
이 말을 내뱉자, 대신들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황제에게 어떻게 일 처리를 하는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제(先帝)뿐이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탐관오리들을 위해 줄곧 사정하는 게, 혹시 그들과 한 패거리인 것은 아니냐?"
황제는 대신들에게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짐이 황성사에 자네들을 잘 살펴보라고 해야겠구나."
"폐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신들이 어찌 감히."
뭇 대신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상 온화하고 기품이 있던 황제는 어딘가 사라져 버렸다.
최 승상 등 몇은 매우 침착했다. 그들은 심지어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황제가 울화가 치밀어 강남 관리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그들에게 화풀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 승상 등 몇의 인솔하에, 대신들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황제를 배웅했다.
황제는 황위 앞에 서서 여느 때보다 더 공경스럽고 겸허한 대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문득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절대적 권위를 누리는 군주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황제가 과단성 있게 처리함에 따라 강남의 사건은 빠르게 재판되었다. 사건이 확정되고 새로운 관리도 부임되었다.
최일은 강남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승진했으며, 변경으로 돌아와 이부에 임직했다.
최일은 변경으로 가기 전에 이미 강남에 판을 짜 놓았다. 강남 관리들은 칠 할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수는 최씨 가문에 줄을 대고 있었다.
유경장은 이 기회를 틈타 강남에서 수운을 관리하는 관직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최일이 배치한 것이었다. 오직 월씨 상사가 강남에서 순조롭게 발전하기를 바라서였다.
월령안은 소식을 받고 강남의 일을 알게 되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최일에게 또 한 번 큰 인정 빚을 지게 되었다.
강남의 물갈이는 월령안의 여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강남 관리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앞에 일을 잘하라고 당부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관성으로 가는 길을 다그쳤다.
가는 내내 육장봉은 뒤따르며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실제 행동으로 월령안에게 '당신을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한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 준 것이었다.
월령안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뒤로 갈수록 무뎌졌다.
말하면 통하지 않고, 싸우려면 상대가 안 되고, 욕하면 듣지 않는데 그녀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설령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육장봉이 가는 내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기에 이번 길은 그녀가 상단을 따라다니면서 겪은 것중 가장 편안한 여정이었다.
관성에 도착할 때, 그녀를 제외하고 동행한 호위들은 모두 살이 쪘다.
길을 서두르면서도 살이 쪘다니, 이번 길에서 그들이 얼마나 잘 먹고, 얼마나 편히 지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설령 그녀가 육장봉이 베푸는 친절을 거절한다 해도, 그녀 수하 사람들은 좀처럼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는 내내 수하 사람들이 육장봉을 도와 숨기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찌 한 번도 육장봉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안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었다.
다행히도 여정이 아무리 멀어도 도착하는 날이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관성에 도착했다.
상천은 진작 소식을 받고 사람을 거느리고 성문 앞에서 월령안을 맞이했다.
상천은 멀리서 월령안이 입성하는 것을 보고는 곧 앞으로 마중 나갔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를 띠었다.
"큰아가씨께서 오셨으니 저도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상천 외에, 관성의 수비 척연과 태수 온조도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월령안을 마중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신분으로는 그들 두 사람이 직접 나와 맞이할 리가 없었다. 그녀도 마음속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관복을 입고 신변에 많은 관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고 공적인 사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두 사람에게 읍만 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그녀는 마차에 올라탔다.
"큰아가씨, 조정에서 사신을 관성에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상천도 마차에 올라 마차 안에서 월령안에게 관성의 사무를 보고했다.
"무역지역 개업 때문에 온 것이냐?"
무역지역 개업을 제외하고, 요즘 관성에는 다른 큰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