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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923)화 (923/1,004)

923화 형을 힘들게만 하는 동생

하지만 어린 내관의 얼굴을 본 순간, 이반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난화지(蘭花指)를 쳐든 채 상대방을 가리키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너…… 나를 찾아 무슨 일이 있어? 나, 나, 내가 말하는데 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이반반을 불러 세운 사람은 염 황숙을 시중드는 어린 내관이었다.

이반반은 황궁에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염 황숙에게 한번 혼쭐나고서는 염 황숙과 그 신변의 사람들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는 염 황숙의 이름만 들어도 온몸이 다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어린 내관은 이반반에게 예를 올리고는 손에 든 편지를 이반반에게 바쳤다.

"주인님께서 이 편지를 월 낭자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편지? 편지 한 통만 가져가는 거야? 다른 건 없어?"

이반반은 떨리는 목소리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마디 물었다.

"편지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일은 없습니다."

어린 내관은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이반반은 멍해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또 울 뻔했다.

염 황숙의 편지를 전하는 것, 역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반반은 눈물을 머금은 채, 고통스러우면서도 비위를 맞추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반드시 직접 편지를 월 낭자에게 전할 테니까, 염 황숙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해라."

그는 너무나 힘들었다. 황궁의 상전들은 하나같이 그의 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린 내관은 시종일관 낯빛 한번 바꾸지 않은 채, 편지를 이반반의 손에 쥐여 주고는 뒤돌아 가 버렸다.

이반반은 제자리에 서서 눈물을 머금고 어린 내관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린 내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이반반은 봇짐을 동행하는 시위에게 던져 주고는 편지를 든 채 이를 악물고 난각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는 염 황숙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 * *

이반반은 수중의 편지를 황제에게 바쳤다.

"폐하, 염 황숙께서 소인더러 월 낭자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소인은 이 편지를 전해야 할지 말지를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는 봉하지 않았구나."

황제는 탁상 위의 편지를 힐끗 훑어보고 차가운 눈빛으로 이반반을 바라보았다.

이반반은 흠칫 떨며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인은 편지를 받자마자 달려왔습니다. 절대 꺼내 보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럴 담이 없는 것을 짐도 안다."

황제는 한마디 했다. 이반반은 황제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헤헤 웃었다.

"소인은 간이 콩알만 합니다. 저에게 담이 백 개 정도 있다 해도 어찌 감히 염 황숙의 편지를 훔쳐볼 수 있겠습니까."

"말이 많다!"

황제는 편지를 뜯으려던 손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가 지금 열어 보면 훔쳐보는 게 아닌가.

'아니지. 황숙께서 봉하지도 않았는데 한 번 봤다고 해서 훔쳐봤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이반반 이 노친네 말도 틀리지 않았잖아. 황숙께서 월령안에게 보낸 편지를 내가 꺼내 보면 결국 훔쳐본 것이잖아. 그만두자. 그만두자…….'

염 황숙은 이반반더러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면서 봉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거리낌이 없는 것을 봐서는 편지에 있어서는 안 될 내용이 없는 게 분명했다.

황숙이 이처럼 그를 믿는데, 조카로서 그 역시 황숙을 믿어야 했다.

'모두 이 노친네 때문이야. 하마터면 몰래 황숙의 편지를 뜯어볼 뻔했잖아. 황숙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퍼할지도 모르겠군. 아니지……. 이반반은 편지를 받자마자 난각으로 달려왔다. 염 황숙이 알면 무슨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시기에 황숙께서 나를 오해하고, 나와 틈이 생겨 지지하지 않으면, 내가 더욱 참담해질 텐데……. 이 노친네가 하마터면 나를 함정에 빠뜨릴 뻔했잖아!'

황제는 이반반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탁상 위 편지를 들어 이반반을 호되게 내리쳤다.

"황숙께서 너더러 편지를 전하라고 했으면 네가 전하면 될 거 아니야. 짐한테 가져와서는 어쩌라는 것이냐. 네가 남에게 매수당해 짐과 황숙 사이에 알력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가벼운 편지가 황제의 손에서 모든 것을 압도할 기세로 뿌려졌다. 황제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폐, 폐하……."

이반반은 편지를 맞고 멍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는 또다시 철퍼덕 소리 나게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폐하께서 통촉해 주십시오."

그에게 어찌 그럴 담이 있겠는가. 그는 기껏해야 관성으로 가기 싫을 뿐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서 멍해서 뭐 하는 것이냐? 어서 관성으로 가지 못할까."

이반반이 충성심이 강해 관리들에게 매수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는 틀림없이 이반반이 고의로 편지를 가져왔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기에, 어떤 조그마한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었다.

일단 염 황숙이 그와 멀어져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조정의 대신들은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려 조계안과 황성사가 강남에서 사건 처리 수단이 과격했다는 것을 핑계로 황성사와 조계안을 탄핵할 것이었다. 황제더러 조계안과 황성사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할 게 뻔했다.

대신들과 십 년 가까이 싸워 온, 그로서는 그 무리들이 얼마나 간사하고 교활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안 돼. 황숙을 찾아가서 한마디라도 변명을 해야겠어. 절대로 이런 시기에 황숙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지. 황숙께서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야.'

* * *

황제는 어쨌든 황제였다. 설령 염 황숙에게 변명한다 해도 급하게 헐레벌떡 달려가서 이반반처럼 가슴팍을 두드리며 충성심을 보여 주고 그러지는 않았다.

황제는 효도한다는 명의로 염 황숙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염 황숙의 바퀴 의자를 밀고서 궁전을 한참 동안 거닐고, 또한 점심 식사도 함께했다.

반나절이나 염 황숙과 함께 한담을 주고받다가 티가 나지 않게 이반반이 편지를 들고 왔으나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했다.

물론 황제는 몰래 대신들을 고자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이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니 절대 그들에게 놀아나지 말라고 암시했다.

염 황숙은 그 말들을 귀담아들으며 수시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제에게 듣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사실 염 황숙은 시종일관 황제에게 긍정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염 황숙은 단지 미소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황제가 가자마자 서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터운 담요를 가져다가 염 황숙의 무릎을 덮어 주었다.

"어르신께서 역시 선견지명이 있으십니다. 편지를 봉하지 않으니 폐하께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시는군요."

"내가 비록 늙었지만 위엄은 아직 있잖느냐. 그가 계속 나를 쓰려면 당연히 내 생각을 유념해야지."

염 황숙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온몸의 정기가 반쯤 흩어지더니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서 선생은 몰래 탄식하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염 황숙은 겉으로 보기에만 기운이 있지 속은 이미 문드러져 약과 침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폐하는 인내심이 있어. 하지만 아쉽게도 말썽을 부리기 좋아하는 동생이 있지."

염 황숙의 눈빛은 차가웠으면 그 속에는 빛이 반짝였다.

"사람을 보내 조계안을 불러오너라!"

서 선생은 대답하고 나서 염 황숙을 밀고 방으로 돌아갔다.

서 선생이 바퀴 의자를 집 안으로 밀고 가자, 염 황숙은 바퀴 의자에 기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조계안은 염 황숙이 월령안에게 관계 단절 편지를 썼다는 소식을 받았다.

"관계를 단절한다고? 확실해?"

조계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의 상처가 다시 찢겨 피가 줄줄 흘러도 그는 살펴볼 겨를 없이 어린 내관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린 내관은 깜짝 놀라 흠칫 떨고는 서둘러 말했다.

"소인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염 황숙이 이반반에게 맡긴 편지는 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봤고 궁전에도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큰일 났군!"

조계안은 일을 갈며 낮은 목소리로 저주했다.

"일으켜 줘."

"전하, 상처가……."

어린 내관은 앞으로 다가가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입 닥쳐! 나를 부축해 황숙을 뵈러 가자."

지금도 상처를 살펴볼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염 황숙이 정말로 월령안과 관계를 단절하면 그는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게 그의 입이 가벼운 탓이었다. 할 일이 없이 왜 함부로 아무 말이나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었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때 당시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월령안이 너무…… 그의 화를 돋우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참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았다. 조계안은 그렇게 애써 위안했다.

사실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뒤, 그도 후회되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마음속으로 이미 어지간히 짐작하고 있었고, 마침 육장봉도 강남에 있었다. 육장봉이 옆에서 월령안의 화를 풀어 준다면 일이 커지지 않고, 적어도 염 황숙에게까지는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염 황숙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으면, 그는 그리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의 성격이 그렇게 강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뜻밖에도 염 황숙에게 직접 진상을 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만약 두 사람이 정말 관계를 단절한다면, 염 황숙은 틀림없이 그를 때려죽일 것이다.

조계안은 이튿날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날 밤, 염 황숙을 찾아갔다.

염 황숙은 조계안을 괴롭히지 않았다. 설령 한밤중이라도 조계안을 만나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조계안이 나가자마자 염 황숙은 혼절했다. 손불사와 어의들이 급히 달려와서야 겨우 병세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모두들 얼굴빛이 무거웠다.

"황숙께서는 어떤가?"

황제는 늦게 도착했다. 그의 얼굴빛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염 황숙에 못지않게 나빴다.

그는 오늘 밤에 비를 간택했다. 그리고 한창 비와 열렬하게 교류하던 도중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폐인이 될 뻔했다.

염 황숙의 상황은 극도로 나빠 어의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도 어의들의 성격을 알고 있으므로, 시선을 손불사에게 옮겼다.

손불사는 못마땅해하던 중이었다. 황제가 묻자 그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 황숙께서 당장 가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노기 때문에 의식이 혼미해지고 심장과 폐에 손상이 간 것입니다. 잘 요양하면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만약 한두 번만 더 이렇게 화내면 아마 그 자리에서 가시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닐 겁니다."

황제는 멍해져 있었다. 왠지 말을 듣고 있자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왕은 어디에 있느냐?"

돌아오는 길에 황제는 사실의 경과를 대강 알게 되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염 황숙이 노기 때문에 의식이 혼미해진 것은 조계안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는 돌아,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내관이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워낙 화가 나 있던 황제는 대뜸 울화통을 터뜨렸다.

"당장…… 조왕더러 짐 앞에 달려오라고 해."

그에게는 왜 이렇게 형을 힘들게만 하는 동생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숙을 기절시켜 놓고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돌아가다니? 도대체 감정이라는 게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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