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화 문을 닫게 만들 겁니다
그런데 뭇사람들이 아무리 야단법석을 떨어도 월령안은 마냥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었다. 마치 그들이 수모를 주려고 하는 이가 그녀가 아닌 듯싶었다.
반면 최일은 당장 얼굴빛을 바꿔 손을 들어 탁자를 확 치려 했다. 하지만 월령안이 그를 잡았다.
"별일 아니에요."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은 여인에게 공평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변경에서 장사를 시작할 때, 변경의 상인들은 여인과 장사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돈을 주고 대장군 부인의 맛을 볼 생각은 있다는 말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어떠한가?
월령안은 변경에서 내로라하는 대상인이 되었다. 반면 그녀를 욕보이던 상인들은 하나같이 쪽박 신세가 되어 평생 가난에서 허덕이며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절망 속에서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최일은 여전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저자들이……."
"그들을 혼내 주는 데는 저 혼자면 충분해요."
월령안은 최일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만개하며 말했다.
"여러분은 제가 춤추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며 뭇사람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유감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마 안 될 것 같군요. 저는 춤에는 소질이 없어요."
"월 가주……."
누군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월령안은 차갑고 날카로운 말투로 바뀌더니 공격성이 다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재물을 바치는 데는 능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보고 싶다고 하신다면 제가 만족시켜 드릴 수 있네요."
짝! 짝! 짝!
그녀의 얼굴에 피었던 미소는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가져와!"
뭇사람들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특히 연회 전에 강호 마을 팔 할의 경영권을 월령안에게 양도한 범씨 가문 대공자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홍문연(鴻門宴 -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연회)을 준비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표가 누구인지를 몰랐고, 그저 자기가 아니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들이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월씨 가문의 하인이 이미 베껴 놓은 장부를 들고 줄지어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훈련이 잘되어 걸음걸이가 일치하고 소리도 없었다. 그들은 뭇사람들 곁에 다가가서 손에 든 장부를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장부책 하나를 내려놓은 뒤,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인당 하나씩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최일 앞에도 하나 놓여 있었다. 다만 이는 월령안이 단독으로 그에게만 주는 것이었다.
"최 대인, 이는 제가 특별히 당신께 헌납하는 것입니다."
최일은 월령안을 힐끔 보고는 장부책을 열어 신속하게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금세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뻔뻔한 것들!"
다른 사람들은 최일보다 장부를 늦게 받았다. 최일이 화내자, 원래 볼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즉시 일어나 열어 보았다.
열어 보고 나서 뭇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이 바뀌어 놀란 표정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는 듯했다.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가?'
그러나 월령안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을 방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들 몇 사람은 장부책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그들 몇 상사에서 물난리를 이용해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를 속속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고 두 눈이 멍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끝장이야! 끝났어!'
이 장부책을 최일에게 바쳤으니, 최일은 틀림없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물론 속이 시커멓고 담대한 자도 있어 장부책을 훌쩍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뭔 잡동사니를 우리 앞에 가져온 것이오. 여자는 역시 여자군. 아무 능력도 없이 어디서 허튼소리를 주워듣고, 사실인 양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마구 써 대는 거야. 뭐 혼자만 쓸 줄 알고, 계산할 줄 아는가 하나 봐."
속이 더 시커먼 자는 그냥 월령안도 끌어들이려 했다.
"이런 장부책이 월 가주는 얼마나 필요한가? 나중에 내가 당신네 월씨 상사의 이름을 써넣고 하나하나 계산해 주지. 월 가주가 얼마로 계산하겠으면 요구대로 쓸 수 있네. 아무튼 그냥 손목을 놀려 글 몇 자를 쓰면 될 일 아닌가. 월씨 상사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상사들은 모두 계산해 줄 수 있다네. 어차피 붓은 내 손에 있고, 어떻게 쓰는지는 내 마음이니까. 여러분, 이런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나오자 몇몇 연루된 상사의 주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얼굴로 월령안을 날카롭게 질책했다.
"어린 아가씨가 참. 놀기 좋아하고 장난을 치는 건 괜찮다네. 하지만 장사는 장사지. 월 가주는 장사를 하려면 그래도 규칙을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이런 수단으로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비열한 짓이네."
"우리가 월 가주에게 밉보인 것이라도 있는 건가? 월 가주가 왜 우리를 이렇게 골탕 먹이려는 것이오? 오늘은 우리 몇몇이 월 가주에게 밉보인 모양이군. 내일…… 무릇 월씨 상사의 길을 막고, 돈을 벌 수 있는 장사를 가로챈 이는 모두 이렇게 장부책에 적어 둘 것인가?"
다른 상인들은 원래 이 일에 참견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듣자 하나같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앞줄에 앉았던 대상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장부책을 내려놓았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
몇몇 상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오늘 월령안이 규정을 무시하고, 그들이 사사로이 가격을 올려 돈을 번 장부를 관아에 보낼 수 있다면, 앞으로 그들이 월씨 상사의 장삿길을 막을 경우,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대처할 수도 있었다.
상인들은 관아와 연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들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일심전력으로 백성을 위하는 관리들을 두려워했다.
관리들이 일말의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고 그들의 뒤를 샅샅이 캘까 두려워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방석을 몇 개씩은 깔고 있는 대부자들이었다.
관아의 빠짐없는 조사에 온전히 견뎌 낼 사람은 몇 없었다. 정말 제대로 조사하면 하나같이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욕심이 많고 사심이 큰 관리들도 두려워했다.
그 관리들의 배를 채워 주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그 관리들이 돈은 있지만 힘이 없는 상인들을 살찐 양으로 생각해 잡아먹을까 두려워했다.
그 몇몇 상사들이 물난리를 틈타 돈을 번 것은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율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다.
장사라는 게 원래 쌍방 협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건 값이 올랐을 때, 큰돈을 벌지 않으면 언제 돈을 벌겠는가.
게다가 관아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지금 이 일을 폭로한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녀가 고상하고 일심으로 조정을 위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인가.
그들은 강남 상인들을 밟고서 조정 및 최일 앞에서 공적을 과시하는 소인배와 한배를 탈 생각은 없었다.
최일 앞에서, 장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상인들은 월령안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월령안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수염이 하얗게 센 대상인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 가주가 만든 장부책이 참 정교하군. 이 늙은이가 집에 가지고 가서 천천히 보겠습니다. 최 대인, 그럼 저는 이만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누군가 선두를 떼자, 곧이어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같은 이유로 최일에게 작별을 고했다.
최일은 현재 강남에서 가장 높은 관리였다. 그들은 최일에게 감히 밉보일 수도 없고, 밉보여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는 잠시일 뿐이었다.
강남에는 조만간 총독이 있을 것이고 조정에서도 다른 관리를 파견해 강남 각지의 빈자리를 메울 것이다.
최일은 월령안과 사이가 좋아, 그들이 최일에게 연줄을 댈 수 없다면, 그들은 한번 제대로 손써서 최일이 강남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면 되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적지 않게 했다.
기껏해야 돈을 좀 더 써서, 최일에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어 승직시키면 되었다.
그것도 안 되고 별다른 수가 없다면, 그들은 또 돈을 써서 최일에게 약간의 사고가 생기게 하면 되었다.
물론 그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절대 조방의 바보들처럼 살수를 파견하면서도 돈을 쓰기 아까워서 결국 사람을 놓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작별하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심지어 가운데 앉아 있던 물난리로 돈을 번 상사의 주인들도 함께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했다.
최일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연회장은 텅텅 비었다. 오직 앞줄에 앉았지만, 전혀 존재감이 없는 범씨 가문 대공자만 남게 되었다.
"범씨 대공자는 안 가시나요?"
뭇 상인들이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일일이 자리를 떠도, 월령안은 눈꺼풀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남아 있는 범씨 대공자를 보고 의아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월 가주, 오늘 강남 모든 상인들에게 밉보이시게 되었습니다. 알고 있나요?"
범씨 대공자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강호 마을 팔 할을 월령안에게 떼어 주었다.
강남 지역에서 그와 월령안의 이익이 한데 얽매여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보다는 깊게 연관돼 있었다.
월령안은 손쓰자마자 강남의 크고 작은 상인들에게 모두 밉보였다. 범씨 대공자는 화가 나서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르고 싶었다.
그는 연회 전에 월령안과 계약서를 체결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만약 월령안이 연회에서 이렇게 큰일을 저지를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강호 마을이 자기 손에서 망하게 할지언정, 월령안과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어요."
월령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젓가락을 들어 앞에 있는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최일에게도 권했다.
"이 용정하인(龍井蝦仁)은 맛이 좋네요. 최 대인, 드셔 보세요."
"좋아요."
최일은 장부책을 잘 건사하고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월령안이 건네준 장부를 보고서 그녀가 왜 화를 내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 무리 패잔병에 불과하다. 그녀로서는 화낼 가치가 없었다.
"알고 있다면, 어서 후한 예물을 사 들고 찾아가서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범씨 대공자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 만약 최일이 자리에 없었다면 아마 탁자를 뒤엎었을 것이다.
"오늘 강남에서 이름깨나 하는 상인들은 모두 참가했어요. 당신이 그들에게 밉보이면 앞으로 당신네 월씨 가문은 강남에서 장사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들은 상업계에서 당신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매일 깡패 몇 명씩 보내 소동을 일으켜 월씨 가문 가게가 문을 닫게 만들 겁니다."
강한 용도 그 지방의 뱀을 이기지 못한다는 도리도 모른단 말인가.
월령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의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우리 월씨 가문이 강남에서 장사할 수 없으면, 당신네 범씨 가문에서 좋아해야 할 거 아닌가요? 범 대공자께서는 왜 그리 급하게 구시는가요?"
"나는……."
범씨 대공자는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화나서 말했다.
"만약 당신이 강호 마을 팔 할의 경영권을 사기 쳐서 가져가지 않았다면, 나도 당신의 생사를 상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범씨 대공자는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고는 월령안이 말을 받지 않자 답답해서 한마디 했다.
"우리 범씨 가문이 그래도 강남에서는 체면이 좀 있습니다. 후한 예물을 준비하면 제가 함께 그들을 만날게요. 그들이 어지간히 저의 체면을 봐줄 거예요."
"범 대공자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네요."
월령안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