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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95)화 (895/1,004)

895화 가주를 뵙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월령안은 호위에게 분부한 뒤, 투명한 수정길에 올랐다.

그녀는 빨리 걷지 않았다. 그러나 발걸음이 가볍고 몸놀림이 민첩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월령안은 지금 땀을 흠뻑 흘린 채,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복잡하고 아무런 규칙이 없는 숫자를 부르고 있었다. 발걸음이 느리지는 않았으나 보기처럼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다.

월씨 가문의 가주로서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많은 함정 장치가 숨겨져 있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걸어 수정석의 장치를 건드린다면 순식간에 추락할 것이다. 뾰족한 칼에 찔리지 않는다고 해도 칼끝의 독에 당해 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이런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 수정석으로 만들어진 길은 길지 않았다. 겨우 이십여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월령안이 걷는 속도도 느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전부 월령안에게는 고역이었다. 그녀가 철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평생을 걸은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몰래 숨을 내쉬어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을 풀어 준 뒤, 월령안은 허리춤에 걸어 두었던 도장을 꺼냈다. 그리고 도장을 자물쇠 심에 찍었다. 그러자 철문이 열리면서 철문 뒤의 세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러나 바로 이때, 월령안이 데려온 두 호위 중 하나가 갑자기 손을 쓰더니 다른 한 호위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 훌쩍 몸을 날려 수정길에 들어섰다.

찰칵.

호위는 수정길에 들어섰다.

펑!

호위가 수정길로 뛰어드는 순간, 그 길은 갑자기 터져버렸다.

호위의 발이 닿은 부분뿐만 아니라 월령안 발아래의 수정도 순간 부서졌다. 투명한 수정 파편들이 날아다니자 월령안도 곧이어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수정으로 된 층이 없어지자 발아래는 온통 퍼런 칼날이었다. 떨어질 것도 없이 그 칼날들을 스치기만 해도 월령안은 당장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호위의 이번 행위는 그녀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다.

'월씨 가문 사람은 역시 독하구나!'

추락하는 순간, 월령안의 눈에는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바로, 그녀 시선에 드리운 슬픔은 확고함으로 대체되었다.

그녀가 온 것은 사람 목숨을 취하기 위한 것이지 목숨을 내놓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월씨 가문의 영역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하다니. 그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이었다.

팍!

추락하는 순간, 월령안에 손에 든 암기를 뿌려 철문 위쪽에 박았다.

월령안의 발끝이 곧 퍼런 칼날에 닿으려는 순간, 월령안은 암기에 달린 끈이 당겨지는 힘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철문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 있던 등 굽은 노인은 진작부터 사라졌다. 그녀가 데려온 두 호위 중, 한 명은 무덤 앞에 쓰러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월령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복도 안을 바라보았다. 칼날에 몸에 꿰뚫린 채, 점차 핏물이 되어가는 시체를 바라보던 그녀는 조롱과 처량함이 담긴 미소를 흘렸다.

만약 어느 날, 그녀가 죽는다면 그녀는 절대 적수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일 것이다.

한눈만 보고 월령안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침착하게 왼손을 달 모양의 문양에 대었다.

철컥철컥.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문이 천천히 열리며 뒤쪽에 월씨 가문의 오보(烏堡)가 나타났다!

백 년 전, 그때의 천궁각 각주가 솜씨 있는 기술 장인들을 데리고 월씨 가문의 오보를 만들었다. 방어와 공격이 일체화된 오보였다.

원래는 월씨 가문 조상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은신처로 만든 것이었다. 나중에는 어찌 된 일인지 월씨 가문이 해적과 수하를 키우는 곳이 되었다. 또 가주에게만 전해졌다.

월령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척결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월령안은 암기를 거두고 뛰어내렸다.

땅에 닿자마자 키가 작은 노인이 어딘가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안은 채, 예를 올렸다.

"가주!"

월령안은 뒤에 있는 복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독약에 녹아 절반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있었다.

"해명하거라!"

그녀가 알기로 이 길은 잘못 가서 함정을 밟아야만 추락한다고 했다. 틀리게 가면 전체 길이 모두 날아간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선조께서는 자기의 수하조차 지켜보지 못하는 가주는 여기서 죽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흑의 노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허……."

월령안은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흑의 노인은 온몸이 긴장했다. 월령안이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월령안은 시선을 거두고 태연자약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조상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군. 길을 안내해!"

"가주, 여기로 드시지요."

흑의 노인의 긴장했던 근육이 풀리면서 옆으로 한걸음 움직여 월령안을 데리고 오보 안으로 걸어갔다.

월씨 가문의 오보는 네모반듯한 것이 회(回)자 모양을 띠었다. 사방은 성벽이고 성벽 위에는 가시와 늑대 이빨 등 물건이 놓여 있었다.

흑의 노인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체 오보는 조용하고 음산한 것이 햇빛도 안 들고 인기척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거기다 산에서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까지 더하니 귀신 성 같았다.

이런 곳은…….

월령안은 이미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월씨 가문의 선조는 역시 매우 개성이 넘쳤다. 이곳은 무덤으로 하기 매우 적합했다.

유일하게 나쁜 점은 바로 반드시 그녀가 호랑이굴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월씨 가문의 퇴로인데 어찌 그것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장치를 밖에 남겨 두었겠는가?

탁! 탁! 탁!

그때, 갑자기 오보 위쪽 성벽 위에 회색 옷의 소년들이 나타났다.

소년들은 낡은 옷을 입고 몹시 지저분했으나 두 눈은 몹시 흉악했다. 그들은 손에 나무막대기를 들고 힘껏 땅을 두드리며 공격성과 폭력으로 가득한 소리를 냈다.

이 소리는 갑자기 울렸고 소년들도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월령안은 안색을 바꾸지도, 심지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매우 엷은 미소를 드러냈다.

위세를 부리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녀였기에 망정이지 여느 소녀 같았더라면 이 사람들에게 놀라서 죽었을 것이다.

월령안을 놀라게 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두드리는 소리는 곧 그쳤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기골이 장대한 남자들이 나무막대기를 들고 회자 형 오보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성벽 위의 소년들보다 훨씬 흉악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난폭한 기운이 번뜩거렸다. 피를 묻힌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탁! 탁! 탁!

그들은 월령안을 둘러싸고 빙빙 돌았다. 걸으면서 손에 든 나무막대기를 두드렸다. 월령안을 보는 그들의 시선은 마치 사냥감을 본 굶주린 늑대처럼 금방이라도 덮쳐들어 월령안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았다.

"허!"

'보아하니, 위세를 부리는 것뿐이 아니구나.'

월령안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그녀에게 길을 안내한 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건 위세를 부리는 것이냐? 아니면 반역하려는 것이냐?"

탁! 탁! 탁!

나무막대기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인과 월령안은 모두 듣지 못한 척했다.

육장봉이 데리고 나온 철혈 장사들을 보았던 그녀가 이런 녀석들을 무서워하겠는가?

노인은 평온하게 월령안과 시선을 마주쳤다.

"가주의 말씀을 소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위세를 부리다니요? 반역이라니요?"

"위세를 부리는 것이라면 내가 싫다! 반역이라면……."

월령안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난 너희들을 죽이겠다!"

"가주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소인은 가주께서 오신 것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흑의 노인은 월령안과 정면승부를 하지 않았지만 월령안에 대해서 아무런 경의도 나타내지 않았다.

"싫다고 말했다."

자기와 팔 하나 사이의 거리만 두고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며 월령안은 자신의 살의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날 믿거라. 너희들은 내 기분을 언짢게 한 결과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네, 가주!"

흑의 노인은 잠깐 멍해졌다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다급히 손을 들어 예를 올렸다.

그의 목적은 가주라고 하기 힘든 가주가 그들의 명맥의 소재를 알고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보니 월령안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아무것도 모르고서 어찌 홀로 왔겠는가?

흑의 노인은 눈을 내리깔고 내키지 않은 시선을 감추었다.

그는 손을 저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물러나거라!"

"네!"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월령안의 주위를 맴돌던 살기등등하던 장수들이 거의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사방의 구석으로 들어가 오보로 물러갔다.

그들뿐만 아니라 성벽 위, 선해 보이지 않던 회색 옷의 소년들도 분분히 물러났다.

그들은 몹시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가주인 월령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역시 부유하나 부모가 없는 고아 여인이 가장 만만했다.

향혈해 저 자존심은 하늘보다 높고 팔자는 종이보다 얇은 놈은 그렇다 쳐도, 지금은 월씨 가문의 암부까지도 주인인 그녀를 배반하고 있었다.

살기 어린 위세를 경험한 뒤, 주인인 월령안은 드디어 오보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에는 나이가 반백이 넘고 머리에 온통 서리가 앉은 노인 세 사람이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월령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세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일어서서 월령안에게 예를 올렸다.

"가주를 뵙습니다!"

"장로 세 분, 일어나십시오."

월령안의 눈빛은 세 사람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두 눈은 맑고 깨끗했으며 사람을 볼 때는 무형의 위엄이 드러났다. 설령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더라도 감히 그녀를 낮잡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가주,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몸을 일으켰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세 사람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다시 한번 월령안에게 읍했다.

"저 녀석들이 나가서 가주를 맞이하는 것은 오보의 규칙입니다. 다른 가주가 오셔도 이렇지요. 가주를 놀라게 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부축하는 척했다.

"대장로 생각이 과하시네요. 고작 그들로는 절 놀라게 할 수 없어요. 오히려 제가 갑자기 찾아와 몇몇 장로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나요?"

놀라다 못해 그녀의 호위를 부추겨 그녀를 죽이게 꾸미다니. 이 세 장로도 참…….

간이 큰지, 아니면 작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더러 간이 작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월 가주 수중에 그들의 목숨이 달린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배신하려고 했다.

그들더러 간이 크다고 하면 또 감히 직접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서 걸어 들어오게 했다. 정말 그녀를 실망시켰다.

그녀는 아버지가 말하던 무림제일 마두(魔頭) 굽은 등 스님의 대단함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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