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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91)화 (891/1,004)

891화 역시 대범하십니다!

"거래라고요?"

월령안이 웃었다.

"제 방주께서는 역시 연세가 드셔서 기억을 잘 못하시네요. 제 손에 제 방주께서 서명하신 차용증이 있습니다."

제운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월령안의 손에 차용증이 있어?'

월령안은 한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두드렸다.

"제 손에 든 차용증이 위조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마세요. 그러신다면 저는 관부의 사람을 찾아와 판결을 내려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제운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바로 그는 평소대로 회복했다. 그는 이마를 탁, 치고 후회하듯이 말했다.

"내 기억력 좀 봐.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안 좋군. 령안 조카, 차용증을 가져와 보여 주게. 내가 하인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시켜 갚도록 하지."

제운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옆에 늘어뜨린 손은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그때 월씨 가문이 그토록 혼란스러운 가운데 차용증을 보관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구두쇠군. 몇십만 냥만 빌렸을 뿐이데 이렇게 오래도록 내가 돈을 갚기 기다렸다니. 월씨 가문이 망한 것이 참 쌤통이야.'

"제 방주께서 기억이 나쁘셔도 괜찮아요. 제가 기억하면 되지요. 십삼 년 전에 제 방주께서 찾아오셔서 육십만 냥을 빌리셨죠. 그때 정한 것은 고정 이자여서 일 년에 육만 냥입니다. 십삼 년이면 칠십팔만 냥이에요. 본전에 이자까지 하면 제 방주께서 우리 월씨 가문에 백삼십팔만 냥을 갚으시면 됩니다. 조방은 재산이 많고 사업도 크게 하시니 이까짓 작은 돈을 신경 쓰시지 않으시겠죠. 그럼 저도 우수리를 떼지 않을게요."

월령안은 제운이 그녀를 좀생이로 여겨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빚을 지면 돈을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다시 말해 조방이 갚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돈을 갚지 않고 심지어 채권자의 딸인 그녀를 만나고도 없는 일인 척하는 것은 돈을 갚기 싫었던 것이었다.

'백삼십팔만 냥?'

제운은 월령안이 말한 숫자를 듣자 얼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좋아. 내일 내가 사람을 시켜 돈을 준비하라고 하마."

"내일이라고 하지 마시고 돈을 준비하실 필요도 없어요. 은은 너무 무거워 들고 다니기도 힘들잖아요. 제 방주, 집안의 사람들더러 은표를 가져오라고 하세요.'

월령안은 제운이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제운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월령안은 배시시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은표가 불편하시면 조운의 주식으로 주셔도 저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운은 반짝이던 눈빛을 거두고 얼굴의 웃음기도 싸늘해졌다.

"월 가주, 욕심을 부려 너무 큰 걸 삼키려 들면 크게 탈이 날 걸세!"

'우리 조운까지 탐내다니. 배 터져 죽을까 두렵지도 않은가!'

"젊으니 잘 먹어요. 제 방주께서 걱정하지 마세요. 전 소화시킬 수 있어요."

'날 월 가주라고 부르는 게 맞지. 말끝마다 조카라고 부르면서 내 앞에서 윗사람의 틀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거울을 들고 자기가 그럴 낯짝이 있는지 비춰 보지 그래.'

"그렇게 말하면…… 일을 좋게 마무리할 수 없다는 건가?'

제운도 연기를 집어치우고 온화한 가면을 벗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월령안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

오히려 월령안이 여전히 홀가분하고 생글거리는 얼굴로 여유 있게 말했다.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으면 우리 월씨 가문에 빚진 돈을 먼저 갚아야지.'

월령안은 뒷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자세를 취했다.

"월 가주, 능력이 좋군."

제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몇 번이나 옷소매를 떨치며 떠나가고 싶었으나 억지로 꾹 참았다.

그는 오늘 찾아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황성사의 일을 알아보지 않더라도 그는 월령안과 조정이 조운을 조사하는 일에 대해 의논해야 했다.

그는 이렇게 가 버릴 수가 없었다!

"돈을 꾼 사람이 다 어르신인걸요. 돈을 받아내려면 능력 없이 어디 되겠어요?"

월령안은 제운이 자기를 칭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 방주, 방주께서는 돈을 갚으시겠어요? 아니면 조운 주식으로 바꾸셔서 저한테 주시겠어요?"

제운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문을 나서기 전에 달력을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오늘은 분명 외출하기 좋은 날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돈을 날리는 날일 테니 말이다.

"지금 바로 사람을 시켜 은표를 가져오겠네!"

월령안은 예전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확실히 보여 줬다.

그러나 조운의 주식을 내놓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는 조방에서 독단적인 결정권을 가지는 것에 익숙해져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뭘 하든 돈을 벌고 돌도 금덩이로 만든다는 월령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제 방주께서는 역시 신용을 지키시는 분이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차용증은 제가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제 방주께서 은표를 가져오시면 제가 바로 차용증을 돌려드리지요."

월령안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제운이 그녀가 미리 준비했다는 것을 알아도 상관없었다.

"좋네."

제운은 비록 화가 났으나 자기의 목적을 떠올리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 있던 하인에게 분부하여 하인더러 은표를 가져오라고 한 그는 돌아앉아 또 웃는 얼굴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가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머리를 꺼내자마자 월령안이 다른 화제를 내밀었다.

"한참 얘기했더니 제 방주께서도 배가 고프실 것 같네요. 우리 월씨 가문 주방장의 솜씨를 한번 보시겠어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제운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하인더러 간식을 내오라고 분부했다.

제운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화가 나 사람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참고 말았다.

월씨 저택에서 억지로 간식 한끼를 먹은 제운은 울화를 억지로 참으며 한 시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심복이 은표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복은 은표를 제운에게 넘길 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주, 우리가 너무 급히 요구해서 그 상인들은 호시탐탐 돈을 갈취하려고 해요. 이 백만 냥은 빌려 온 것인데 매달 이자는 이만 냥이고 해마다 일 할씩 증가합니다. 삼 년 안에 갚지 못한다면 조운의 주식 일 할을 내놓아야 합니다."

조방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돈이 필요한 곳이 많아 수중의 유동 자금이 점점 줄어들었다.

월령안이 급히 돈을 달라고 하자 조방은 일시적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없어 강남의 상인들에게 빌렸다.

"알겠네."

제운은 속으로 똥이라도 삼킨 것처럼 역겨웠다. 그는 속으로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상인들을 한바탕 욕하고 난 뒤, 월령안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만 냥이 넘는 돈일 뿐인데 월 가주가 이토록 재촉하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쌓은 월 가문이 가난뱅이가 된 줄 알겠네."

상인은 돈이 부족할 때일수록 돈이 부족한 티를 내지 않고 강하게 나가야 한다.

"제 방주, 과찬이십니다. 막대한 부라니요? 우리 월씨 가문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제 방주야말로 백삼십팔만 냥은 손만 들면 가져오실 수 있는 돈이시겠지만 우리 월씨 가문은 정말 이런 능력이 없어요. 우리 상사는 최근 손해가 엄중해 이 돈으로 수중의 사업을 살릴 생각이었어요."

월령안은 돈을 무척 반기는 모습으로 나무함을 받아 육삼에게 넘겨주었다.

"비록 제 방주께서 돈을 적게 주셨을 리는 없겠지만 돈 같은 것은 함께 있을 때 확실하게 세어보는 것이 좋겠네요."

"네, 큰아가씨."

육삼은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는 월령안과 제운의 앞에서 은표 수를 세었다.

"큰아가씨, 정확하게 백삼십팔만 냥이 맞습니다. 산서대동(山西大同)의 은표입니다."

"제 방주, 역시 대범하십니다! 제 방주께 감사드려요!"

월령안은 감사를 표한 뒤, 육삼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차용증을 제 방주께 드리거라."

육삼은 잠깐 멍해졌으나 월령안이 전에 그에게 비단 주머니를 건넨 것이 생각이 다급히 비단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역시 그 주머니 안에는 가치가 백삼십팔만 냥에 달하는 차용증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육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엄마야…….

이렇게 가치 있는 물건이면서 월 낭자는 말도 안 해 주고 대충 나한테 던져 주었단 말이야? 나더러 잘 보관하라고도 말하지 않고.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거나 물에 젖어 찢어지면 어떡할 뻔했어? 월 낭자는 참 대범해! 무려 백삼십팔만 냥이잖아! 방금 전에 내가 이렇게 큰 돈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니. 정말 부유했어!'

육삼은 으쓱해져서 차용증을 제운의 심복에게 넘겼다.

제운의 심복은 자세히 살펴본 뒤, 제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제운의 뒤에 가서 섰다.

"월 가주, 우리 자리를 바꿔 후의 일을 얘기할까?"

큰돈을 손해 본 제운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다시 보니 이미 날도 저물었다. 제운은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그는 월령안이 자기를 농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수중에 차용증이 있으면 그더러 은표를 준비하고 찾아오라고 해도 되었을 것이다. 그가 부탁할 것이 있는데 설마 돈을 갚지 않겠는가?

꼭 그가 찾아온 다음에야 돈을 갚도록 핍박하는 것이 어떻게 보아도 시간을 끄는 것 같았다.

몰래 숨어들어서 그들이 한참 알아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한 황성사 사위를 떠올리자 제운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말할 때도 인내심이 줄어들고 급박함이 느껴졌다.

월령안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요!"

'이 정도면 됐어.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잖아. 더구나 제운 같은 강하고 야심 찬 사람은 더욱 그래.'

그녀가 조계안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은 했으나 전력을 다해 조계안을 위할 생각은 없었다.

제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의 의심이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령안은 정말 단지 그에게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를 일부러 잡아 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제운은 생각이 많아지고 월령안에 대한 경계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녀를 낮잡아 보지 않았다.

월령안은 제운의 의견을 물은 뒤, 그를 서재로 데려왔다. 그러나 서재의 뜰로 들어서자마자 제운은 마당 한쪽의 돌 탁자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월 가주, 우리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되나?"

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걸어갔다.

그 돌 탁자와 의자는 마당의 동남쪽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 얘기를 나누기 좋았다.

월령안은 미소를 짓고 느긋하게 걸어가서 제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월 가주, 광명정대한 사람은 뒷공론을 하지 않는 법이네. 내가 어떻게 해야 월 가주가 우리 조방을 봐주겠나?"

제운은 불안해졌다. 그는 자신이 조급해할수록 월령안이 터무니없이 큰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의 직감은 항상 맞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위험에 대한 직감으로 인해 그는 많은 화를 피하였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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