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조방의 방주 제운(齊運)
조방 방주는 수하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조방은 조운(漕運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자원을 움켜쥐고 있었고 월씨 가문은 장사를 하는 가문이었다.
월씨 가문의 화물이 주나라 경내에서 운수하려면 조방을 건너뛸 수가 없었다. 월령안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들의 이 수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최 승상이 갑자기 조운을 조사하면서 그들은 손 쓸 틈이 없이 당하고 말았다.
조방 방주는 억울했다. 그는 이렇게 월령안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몹시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버틸 수 있어도 그의 수하와 각 지방의 관리들은 버틸 수 없었다.
세금을 허위로 보고하거나 소금, 철 밀매에서 그들 대부분은 엮여 있었다. 엮여 있지 않다 해도 직무 태만의 죄에 해당되었다.
최 승상은 지금 상인만 조사하고 있어 그들은 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최 승상이 계속해서 조사한다면?
만약 계속해서 최 승상이 조사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모두 끝장날 것이다.
조방에서 이 일을 반드시 빨리 해결해야 했다.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증거를 없애서 그들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다.
한두 관리가 압력을 가하면 조방 방주는 그나마 버틸 수 있었으나 관련된 모든 관리들이 다 와서 압력을 가하자 조방 방주는 정말 버틸 수 없었다.
더구나 조방 안의 배를 탔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조정 관졸들에게 끌려가자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하며 배를 안 타는 것은 물론 하나같이 연루될까 두려워 도망치고 싶어 했다.
도의에 들어맞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많고 도의에 어긋나면 도와주는 사람이 적은 법. 돕는 사람이 없다면 조방 방주가 조운의 생사 대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최 승상이 조운을 조사하라고 명을 내린 셋째 날, 조방 방주는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월령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언제가 편한지 물어보거라. 그때 내가 가서 사과하겠다!"
월령안은 조방 방주의 체면을 세워 주는 편이었다. 약속한 이튿날 오후, 그들은 그녀의 별원에서 만나겠다고 했다.
조방의 사람을 보낸 뒤, 월령안은 조계안을 찾아가 이 일을 보고했다.
말하고 보니 그녀도 억울했다.
그녀가 거드름을 피우며 여 총독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계안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계안은 그녀더러 누구를 만나도 그의 눈앞에서 만나야 하지 절대 그 몰래 만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주나라의 친왕으로서 조계안의 신분이 얼마나 높은가?
조계안은 머슴처럼 월령안을 따라 도처에 뛰어다닐 수 없었다. 월령안이 사람을 만나려면 별원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두 가지를 비교해 보았다. 여 총독더러 그녀를 만나러 별원에 오라고 하거나 그녀가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 만나지 못하겠다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거드름을 피우고 더욱 쉽게 미움을 사겠는가 비교한 뒤, 그녀는 바쁘다고 하고 여 총독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거절한 뒤, 여 총독이 압력을 못 이겨 그녀가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 총독은 바로 조방으로 그녀를 억눌렀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여 총독 같은 권력이 강한 남자의 눈에는 그녀 같은 상인 여인이 아마도 원숭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를 평등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여 총독이 그녀를 만나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치면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주러 가는 것과 같은 적선이었다.
그녀가 거절했으니 여 총독의 체면을 깎은 것이었다. 여 총독이 어찌 고귀한 신분을 낮추어 그녀를 만나러 오겠는가?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비장의 패가 있었다.
조계안은 이때 화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 바로 육장봉이 손수 만든 그네 위였다. 그네는 월령안의 키에 맞춰 만든 것이어서 그네와 땅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조계안은 긴 다리를 놓을 곳이 없어서 억울한 대로 일어났다.
그네 의자에는 늑대 가죽을 깔았는데 양쪽의 굵은 밧줄에는 손수건과 조화를 감아 두어서 아늑하고 예뻐 보였다.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었다.
조계안이 흑의를 입고 귀신 가면을 쓴 채, 소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네에 앉아 있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 가득한 황성사 사위가 두 명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너무 아름다웠다. 월령안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조계안에게 보고할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기도 했지만 까치집을 차지한 비둘기 같은 조왕도 보고 싶지 않았다.
육장봉이 떠나자 이 그네는 조왕에게 점령당해 조왕의 전용 그네가 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그네가 육장봉이 조계안을 위해 만든 것인 줄 알 것이다.
물론, 조계안은 월령안이 앉으려는 것을 금지시킬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월령안더러 그와 함께 그네를 타자고 초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어찌 그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함께 그네를 타기는커녕 조계안이 이 그네에 앉은 뒤부터 그녀의 눈에는 이 그네가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앉기는커녕 만지기도 싶지 않았다.
"오후 이때, 아주 잘했어. 네가 말한 대로 해."
그네를 타서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월령안이 '온순'해져서인지 조계안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조계안은 월령안에게 트집을 잡지 않고 칭찬을 한 뒤, 조방 방주를 잡고 시간을 끌고 있으라고 하고 월령안을 보냈다.
"네, 전하."
월령안은 조방 방주를 얼마나 잡고 있으라는지 묻지 않았다. 또 왜 조계안이 자기더러 조방 방주의 시간을 끌라고 하는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하고 예를 올린 뒤, 떠나갔다.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또 어찌 오후에 만나자고 약속했겠는가?
"그녀의 총명하고 재능 있는 모습은 참 매력적이야. 안 그래?"
조계안은 두 손으로 손수건과 조화로 감싼 양쪽의 밧줄을 쥐고서 월령안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랑살랑 그네를 탔다.
사위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장군의 칼이 곧 날아오겠군.'
* * *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자마자 조방 방주 제운(齊運)이 도착했다.
제운은 올해 마흔다섯 살이었으나 늙어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치스럽고 안일한 생활을 보낸 탓에 그는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으며 일거수일투족에서 귀티가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친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높은 자리에 있고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조방 방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읽는 사람 같았다.
그가 월씨 가문의 별원에 들어섰을 때, 이중문 밖에 서서 그를 맞이하는 월령안을 보고 얼굴의 미소가 더욱 친근해졌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변함없이 여유가 넘쳤고 느긋했다. 그는 그저 친근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월령안도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똑같이 환하고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어떤 친절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친절도 겉치레에만 머물 뿐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이니 웃으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 분야에서는 그녀도 어디 가서 지지 않았다.
조방 제운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월령안과 다섯 걸음 떨어져 있을 때, 살짝 발걸음을 빨리했다.
"령안 조카, 숙부인 내가 오늘 무모하게 찾아와 수다를 떨게 되었군!"
월령안도 따라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맞이했다.
"제 방주께서 왕림해 주시니 평생의 영광입니다."
제운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구나. 역시 낳은 어미만 있고 가르친 아비가 없는 잡종이야.'
월령안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이가 잔뜩 들어서도 체면상의 일을 따지기나 하고. 정말 늙을수록 무능하구나.'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화청으로 가는 길 내내 제운은 월령안을 질책했다.
"나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강남에서 불편한 일에 마주쳤으면서 이 숙부를 찾아오지도 않고. 네가 날 찾아오지 않으니 내가 널 만나러 오는 수밖에. 두 가문의 교분이 있는데 내가 어찌 내 구역에서 네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느냐?"
월령안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해명했다.
"월씨 가문의 상사는 최근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저는 제 숙부님께 폐를 끼칠까 두려워 감히 찾아가지 못했어요. 월씨 상사의 일이 해결된 뒤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제 숙부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네요. 전 정말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비록 말을 친근하게 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끊임없이 꽂았다. 칼과 검이 휘날리는 싸움이 아니었지만 언어에서의 싸움도 똑같이 불꽃이 튀며 살기를 내뿜었다.
육삼은 두 사람을 따라가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사람을 보면 사람 말을 하고 귀신을 보면 귀신 말을 하는 월 낭자의 능력이 너무 대단한걸. 나도 좀 배워서 앞으로 아내를 잘 달래야겠어…….'
월령안과 조방 방주는 길가는 내내 웃고 떠들면서 마치 수십 년 못 본 친구처럼 다정히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담긴 조롱과 살의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 웃고 떠들었다.
화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인석과 손님석에 나누어 앉았다. 하인이 차를 올리고 다시 물러갔다.
하인이 있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하인이 물러간 뒤,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했다.
이번에 조운 방주 제운은 일부러인지 무심결인지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 얘기를 꺼냈다. 그는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때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를 찾아와 사정했고 얼마나 굽신거렸으며 또 얼마나 비굴했는지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그들을 얼마나 의롭게 대했고 자기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말했다.
월령안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격했다. 제씨 가문의 조상은 한낱 뱃사공에 불과했는데 월씨 가문에서 돈과 배를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제씨 가문의 후손들이 지금 어느 배에서 누구의 짐을 나를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 무심결에 이런 얘기도 꺼냈다. 예전 일찍 조방의 화물선이 파도를 만나 백 척이 넘는 배가 뒤엎어져 제때 물건을 내놓기는커녕 상가에 배상까지 해야 했다.
조방이 그때 힘들어서 배상할 돈을 내놓지 못하자 제씨 가문은 그들 월씨 가문에게 도움을 청했다. 월씨 가문에서 큰돈을 빌려주고 나서야 제씨 가문은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월령안은 제 방주를 만났다.
제 방주의 굳은 얼굴을 무시한 채, 월령안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제 방주,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때 그 돈을 아직 우리 월씨 가문에 갚지 않으셨어요. 맞죠?"
십 년도 더 된 오래된 빚이었고 채권자도 죽었으니 당연히 시인하지 않았다.
"령안 조카, 그때 넌 아직 어려서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나는 그때 네 아버지에게서 돈을 빌린 것이 아니라 너의 아버지와 거래를 한 것이란다. 그때, 이미 돈과 물건을 맞바꾸었으니 갚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공교롭게도 제운이 월씨 가문에서 돈을 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씨 가문은 망했고 월령안 이 외동딸만 남았다. 당연히 제운더러 돈을 갚으라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 월령안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 일을 잊어버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