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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72)화 (872/1,004)

872화 신분을 드러낼 건가요?

만약 사 년 전에 그녀가 육장봉에게 병기와 군량, 건초를 끊임없이 공급하지 않았다면, 조정은 온 나라의 힘을 다 빌리고 나서야 육장봉과 북요의 일전을 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만약 청주와 향혈해가 동시에 거사를 감행했다면, 조정은 강남과 청주의 양식과 세수(稅收)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력을 들여 강남과 청주의 내란까지 수습해야 했다.

내우외환 시기에 육장봉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후방에서 군량과 건초, 병기를 공급하지 못하면 그도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육장봉이 북요와의 전쟁을 신속하게 끝낼 수 없으면, 청주의 세 노친네와 향혈해는 그중에서 거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향혈해는 이 모든 것을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가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운수가 사나워, 사랑의 그물에 풍덩 빠진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이 비웃었다.

"제가 대담하게 한번 추측해 볼게요. 폐하께서는 아마 일찍부터 영왕 후대가 강남에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사 년 전에, 육장봉을 그녀에게 그렇게 선뜻 팔 수가 없었다.

"흠흠……."

월령안은 뒷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육장봉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당신도 알죠."

육장봉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래서 당신은 권력과 금전의 거래는 도처에 있다고 말해 주려는 것이오?"

'월령안은 지금 나를 등지고 폐하와 함께 내 혼인대사를 거래하고 나서도 자기에게 도리가 있다는 건가.'

그녀는 혼사를 돈으로 사는 이런 행위가 그르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월령안은 육장봉을 흘겨봤다.

"제가 언제……. 저는 권세가 돈보다 더 쓸모 있다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황제도 육장봉을 비싼 값에 판 다음, 뒤돌아서 약속을 깨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너무 뻔뻔스러웠다.

"나한테는 돈도, 권력도 모두 소용없소. 오직 월령안만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더는 돈을 가지고 대중없는 사람하고 아무 거래나 하지 마시오."

육장봉은 '대중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해 말했다.

그는 애당초 황제가 자신을 '팔았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전투가 긴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때 당장 변경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됨됨이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물론 다음은 없을 거예요. 폐하와의 그 거래는 제가 살아오면서 한, 가장 밑지는 거래였어요."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으면 같은 함정에 두 번이나 빠지겠는가.

육장봉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거래는 무슨 거래요……. 혼인은 이성지합(二姓之合)이자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것이오."

'월령안의 이 무슨 일이든 거래로 생각하는 습관은 도대체 누가 가르친 거야? 염 황숙인가?'

보아하니 그는 변경에 돌아간 뒤, 염 황숙을 찾아가 잘 이야기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월령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혼인이라면 두 가문의 수준이 엇비슷해야 하고, 두 가문이 백년의 약속을 맺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명문대가의 혼인은 모두 이익을 위한 것으로 무슨 백년해로를 약속한단 말인가.

육장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남들이고 당신과 나는 아니오."

육장봉은 정중하게 강조했다.

"나 육장봉은 오직 백년해로를 위해 아내를 맞아들일 거요."

월령안은 잠깐 멍해져 있었다. 곧이어 눈동자에는 은은한 따스함이 서렸다.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두 사람은 이제 더는 거래가 아니고 그녀가 금전으로 결혼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육장봉이 좋아하는 것은 그녀이지, 그녀의 돈을 버는 능력이 아니며, 그녀의 돈도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이에는 어떤 이익 관계도 섞여 있지 않아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손을 잡아서 손깍지를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눈망울에는 오직 육장봉의 모습만 가득 담고 있었다.

육장봉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우리 사이가 거래라는 말을 하지 마시오."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언짢았다.

그들의 인연은 거래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사한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월령안은 가볍게 대답했다. 머리를 육장봉의 어깨에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햇빛이 창살 사이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에 쏟아지면서 알록달록하고 어지럽게 해 그녀를 신비롭고 고요해 보이게 했다.

육장봉은 손을 들어 그녀에게 비추는 직사광선을 막아 주었다.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총애와 사랑이 넘쳐났다.

안타깝게도 월령안은 눈을 감고 있어 그 눈빛을 볼 수가 없었다.

* * *

한참 뒤, 육장봉은 밖을 내다보고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월령안에게 말했다.

"이제는 가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하오."

반나절이면 수군들이 그의 지휘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수군들이 용맹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제대로 명령을 듣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한 첫 해전이 참패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설령 그가 거느린 것이 겁이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머저리 같은 병사들이라 해도 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월령안 앞에서는 더욱 질 수가 없었다.

반나절 남짓한 시간에 겁쟁이 무리들을 진정한 사내로 훈련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오후가 되면 강남 수군들은 또 싸워야 했다. 하기에 육장봉은 그들의 체력을 훈련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반나절 동안 오로지 그들이 명령에 따르도록 훈련했을 뿐이었다.

그랬다. 당당한 강남 수군의 대다수는 지령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설사 알고 있는 자가 있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명령에 따르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즉각 명령을 집행할 수 있는 병사는 극히 적었다.

육장봉은 강남 수군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초년병으로 생각하고 훈련할 준비도 했었다.

그러나 반나절 시간을 들여 겨우 지령에 따를 수준밖에 도달하지 못한 그들을 보고는 더없이 큰 실망을 느꼈다.

조정의 병마가 모두 이 모양 이 꼴이면, 어떻게 국토를 지킬 수 있겠는가.

어떻게 싸움터에 나가서 싸운단 말인가.

앞서 그는 월령안이 월씨 가문에서 기른 해적이 주나라 해역의 첫 번째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고 했을 때, 큰소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월령안이 그나마 강남 수군에 체면을 남겨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안일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들을 놓고, 그들이 주나라 해역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은 꿈같은 소리였다.

주나라의 해역은 진작 점령당했을 터였다.

육장봉 정도의 지위라면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그들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겉에 드러내었다. 훈시할 때마저도 사정없이 너희 같은 바보들을 발바닥으로 여긴다는 말투였다.

만약 강남 수군이 불만스러워하고 감히 반항했다면, 육장봉은 그나마 사내답다고 조금이라도 존중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시하는 태도를 확연히 드러내도, 그에게 먼지가 나게 얻어맞은 수군들은 아무도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비록 분노하긴 했지만 마냥 참기만 했다.

맞아서 뼈마저 나른해졌는지,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이미 말하기가 싫어졌다. 심지어 훈시하기도 귀찮았다.

반나절 훈련한 결과, 수군은 능숙하게 명령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육장봉은 총교관에게 수군을 몇 번 더 호흡을 맞추게 하라고 명령한 뒤, 선실로 돌아와 월령안을 찾았다.

"향혈해 소굴의 지도를 가지고 있소?"

강남 수군의 실력이 안 되면, 그는 그들이 너무 처참한 대가를 치르고 승리하지 않게 전술적으로 계략을 짜야 했다.

"제가 그려 드릴게요."

월령안은 옆에 있는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직접 그려 냈다. 다 그린 뒤, 그녀는 다시 훑어보고, 약간 수정한 뒤 육장봉에게 건넸다.

"거리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이곳은…… 물길이 가로세로 얽혀 있고 길이 좁아 배가 동시에 진입하기 어렵군. 방어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힘든, 좋은 곳이야."

육장봉은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혈해 소굴의 위치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섬이 작고 상대적으로 공격하기 쉬워요. 향혈해는 얼마 전에 원래 구 두목의 세력 범위였던 섬 하나를 점령했어요. 그 섬은 이 부근 해역에서 가장 큰 섬이며 높은 곳에 있어 강공하려면 몇 배의 병마가 있어야 해요. 제가 서둘러 바다에 나가 향혈해의 세력을 소탕하려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세력이 구 두목의 그 섬으로 달아날까 두려워서예요."

향혈해의 사람들이 구 두목의 섬을 철저히 점령한 다음, 다시 그 세력을 소탕하려면 더욱 어려웠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향혈해도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구 두목의 섬을 패로 내놓자 향혈해는 병마를 거느리고 수군 군영을 불사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행했던 것이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 이는 영원한 불변의 이치였다. 야심가인 향혈해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걱정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장담했다.

"이번 싸움은 강남 수군이 반드시 이길 것이오."

그가 있는 한, 강남 수군이 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띨띨이들이 반나절 동안 훈련하고 나서야 명령을 들을 줄만 알게 됐다고 해도 말이다.

육장봉은 지도를 또 몇 번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당신 좀 전에 육일 등이 해상 작전에 이미 적응했다고 했지. 맞소?"

"흉터 그들에 못지않아요."

설령 육장봉은 육일 등이 해전 기법을 익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월령안은 여전히 육일 등의 활약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해풍이 불면 육일 등 몇은 배 위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했다.

겨우 열흘밖에 안 되지만 종씨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정도가 되었다면, 그들은 기필코 전심전력으로 열심히 훈련했을 것이다.

육장봉은 손가락으로 향혈해의 소굴 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에게 전갈을 보내오. 어서 승선해서 강남 수군과 함께 이……."

"청어도(靑魚島)예요."

이는 향혈해가 차지한 그 섬의 이름으로, 생긴 모양이 청어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음. 그들도 싸움에 참가하라고 하시오. 신분이 폭로돼도 괜찮다고 하시오."

육장봉은 강남 수군만 데리고 그들을 지휘해 향혈해의 소굴로 쳐들어가 청어도를 점령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향혈해의 사람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었다.

다른 게 아니고, 강남 수군은 목숨을 너무나 아꼈다.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다.

"당신의 신분을 드러낼 건가요?"

월령안은 이 말을 듣고서 육장봉의 타산을 알게 되었다.

"음."

육장봉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압이 없으면 추진력도 없소. 강남 수군이 내 신분을 알아야 목숨을 걸고 적을 무찔러서 공을 세워 그 죄를 메우려고 할 거요."

그는 월령안 앞에서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월령안은 잠깐 궁리하다가 말리지 않았다.

"좋아요…… 우리가 상륙하면 강남의 일도 거의 다 마무리될 것이에요. 수군을 장악하고 있으면 패가 하나 더 많아지는 것이죠."

향혈해가 있는 한, 평화적으로 강남 세력을 청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남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게 될 것인데, 병마를 장악하고 있으면 그들에게 이익만 있을 뿐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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