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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70)화 (870/1,004)

870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초라하지 않다

'육장봉, 나쁜 놈. 틀림없이 고의로 내 추태를 보려는 거야.'

그녀는 육장봉의 뜻을 이루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혀끝을 깨물어 억지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육장봉의 나쁜 손을 잡고서 득의양양해 입을 열었다.

"안 돼요. 거절할 거예요."

'흥! 육장봉, 지금 후회하는 거예요? 방금 전, 내가 거절하지 않았을 때, 당신은 기회를 잡지 않았죠.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도 하지 마시지. 설령 괴롭고, 아무리 좀 더……. 아무튼 오늘 더는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예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반쯤 불을 지피고, 그만둔 대가예요.'

육장봉은 움직이지 않고 월령안의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당신 달거리가 올 날이 다 되지 않았소? 섬에는 약도 없고 때가 돼서 당신이 아파서 괴로워하지 않게 내가 잘 주물러 주려는 것이오."

월령안은 멍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분명 육장봉이 그녀를 오해하게 한 것이었다.

"당신, 혹시…… 나를 갖고 싶은 것이오?"

육장봉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 말을 마치고 월령안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한발 앞서 말했다.

"안 되오. 거절할 거요."

똑같은 말, 똑같은 말투. 육장봉은 월령안이 방금 전에 한 말을, 그때 말투 그대로 흉내 내면서 영혼 없이 거절했다.

월령안은 할 말이 없었다.

'아, 열불 나. 진짜 얄미워 죽겠어!'

배가 불룩 나온 복어만큼 화가 났다. 어지간해서 달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다.

* * *

목재와 삼밧줄이 준비되면 그다음은 출행할 배를 만들 차례였다.

월령안의 '지휘' 아래 육장봉은 하루 시간을 들여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쪽배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우선 가볍게 시승하여 쪽배가 안전한지를 확인했다. 쪽배는 풍랑을 만나자마자 뒤집히지는 않을 듯했다.

두 사람은 다시 섬에 되돌아가 물자를 챙겨, 이튿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한밤중, 섬에는 불청객 한 무리가 찾아왔다.

두 사람이 묵는 동굴은 섬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섬 외곽하고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찍이 섬 주변에 장치를 설치했다. 때문에 불청객들이 상륙하자마자 두 사람은 이를 발견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누군가 섬에 올라왔어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월령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죠. 우리가 연이어 엿새 동안 신호를 보낼 때는, 아무도 섬에 오지 않더니. 포기하고 나니 섬에 바로 사람이 오는군요."

"내가 가서 누군지 알아보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돌칼을 그녀에게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육장봉은 동작이 민첩했다. 어두운 밤이라 보이지 않는 것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기척도 없이 수림을 조용히 누볐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섬 기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불청객들이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리고 배에 걸린 강남 수군만의 깃발도 보였다.

그는 서둘러 떠나지 않고 슬금슬금 그들에게 접근해 대화를 엿들었다.

이 무리들이 해적이 분장한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강남 수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되돌아갔다.

월령안은 칼을 잡은 채, 줄곧 경계하며 동굴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무슨 상황인가요?"

"강남 수군이오."

육장봉이 대답했다.

"강남 수군요? 아주 공교롭네요?"

월령안은 의아해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들은 남해로 비적들을 숙청하러 간 게 아닌가요? 웬일로 여기까지 왔대요? 여기는 남해와는 완전 다른 방향이에요."

"그들은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는군. 파도에 밀려 이 해역으로 온 것이오."

이것은 육장봉이 방금 몰래 들은 소식이었다.

그 수군들은 불을 에워싸고 앉아서 계속해 재수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말에는 온통 윗선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그것참…… 참 잘됐군요. 남해에 비적들이 있는 것처럼, 이 해역도 태평하지 않거든요."

월령안은 능글맞게 웃었다.

"조력자를 코앞까지 가져다주었는데, 쓰지 않으면 너무 미안하죠."

"당신, 저들의 힘을 빌려 향혈해의 사람을 척결하려는 것이오?"

월령안의 눈동자가 움직이자, 육장봉은 곧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월령안은 화가 나서 육장봉에게 주먹을 안기며 정당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저는 분명 관아에 협조해 비적을 토벌함으로써 나라와 백성 그리고 조정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의가 있는 사람이라고요."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맞소. 당신은 나라와 백성, 조정을 위해 걱정을 덜어 주려는 정의로운 사람이오."

칼을 빌려 살인하는 일을 이처럼 참신하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월령안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결정했어요.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그 사람들과 함께 떠나요. 그리고…… 함께 가서 나라와 백성, 조정을 위해 걱정을 덜어 주는 좋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월령안은 석도를 육장봉에게 밀어 주고 그의 옆에 누웠다.

강남 수군은 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했다…… 아니, 그냥 그들은 목숨을 아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해상의 비적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한밤중에 낯선 섬에서 날뛰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 그녀는 육장봉과 함께 평안하게 잠자면 되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기운을 차리고 그들을 찾아가면 되었다.

* * *

이튿날, 날씨가 쾌청하고 하늘은 씻은 듯이 푸르렀다.

월령안은 좋은 날씨에 저도 몰래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날씨군요. 딱 길 떠나기 좋은 날씨예요."

"길 떠난다는 게 말뜻이 별로요. 다음에는 쓰지 마시오."

육장봉은 노고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동굴 안에 두 사람이 남긴 흔적을 지웠다.

월씨 가문 사람이 언제 여기에 올지 몰랐다.

그들은 당분간 월씨 가문 사람들이 월령안은 이미 그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걱정하는 거예요."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원래 아무 일도 없는데, 누군가는 사서 걱정을 하는 거예요."

"괜히 걱정하는 게 아니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요."

육장봉은 걸어 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네 상인들은 길하기를 바라서 재신께 절하고 관우 상을 모시지 않소."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를 재신의 딸이라고 해요. 당신, 저한테 절하지 않을래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육장봉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전신(戰神)이라고 부르오. 우리 맞절하는 것은 어떻겠소."

"괜히 당신 잇속을 챙기려 하지 마세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서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깔끔해요. 조금 지저분하게 해서 초라해 보여야 해요."

"그럴 필요 없소."

육장봉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절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초라할 수가 없소."

그는 월령안을 꾀죄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가 화려하게 생활하게 할 능력이 있는데 괜히 섭섭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잠깐 궁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얘기예요. 초라한 자는 쉽게 믿음과 동정을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발언권도 잃게 되죠. 사람은 모두 강한 것을 흠모하고 강한 것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죠. 당신이 있으니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천천히 신임을 얻을 필요가 없어요. 그들이 만약 우리를 데려가려 하지 않고, 우리를 믿지 않으면…… 그냥 그들이 굴복하고 신임할 때까지 두들겨 주면 되죠."

그녀는 육장봉이 그녀처럼 모든 일을 두뇌로 해결하고, 일마다 빈틈없이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육장봉의 강대한 무력으로는 온갖 귀신, 갖은 소인배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아도 되었다.

강남 수군이 그들과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면 한바탕 두들기면 되었다.

* * *

월령안은 그래도 먼저 예의를 갖추고 다시 무력을 행사해, 강남 수군이 협력하지 않으면 한바탕 두들겨 주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육장봉은 찾아가자마자 먼저 강남 수군을 한바탕 두들겼다. 이유도 그럴듯했다.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섬에 상륙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투, 남에게 침범당한 분노. 어디로 보나 이 섬의 주인을 자처하는 모습이었다.

월령안은 자신이 육장봉과 함께 파도에 밀려 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그녀도 그의 말을 믿고 이 섬이 육장봉의 섬인 줄 알았을 것이다.

강남 수군은 육장봉에게 맞아 쓰러진 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꿇어앉아 용서를 빌었다.

육장봉은 여세를 몰아 수군의 배를 빌려 섬을 떠나기를 요구했다.

강남 부귀한 지방에서 자라고, 전쟁터에는 나가 본 적이 없으며, 피라고는 본 적이 없는 수군에게 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육장봉이 무단 상륙을 따지지 않고, 그저 그들의 배를 타고 섬에서 나가겠다고 하자 하나같이 재빨리 승낙했다.

육장봉과 월령안의 내력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군은 배에 오르자마자 육장봉과 월령안에게 가장 크고 좋은 방을 내주었다. 어찌나 아부를 해 대는지, 월령안이 키우는 해적 떼들보다 더 앞잡이 같았다.

월령안은 그들이 육장봉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몰랐다면, 그들이 육장봉의 신분을 알아보고 출세하기 위해 그에게 아부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월령안은 사람을 내보내고 침대에 잠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 가는 대로 탁자 위에서 과일을 집으며 육장봉에게 조소 어린 미소를 보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초라하지 않아요."

육장봉은 월령안이 자기를 놀리고 있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장봉은 무력으로 강남 수군을 '정복'한 뒤, 대세에 따라 강남 수군의 지휘권마저 얻었다.

전체 대오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하루에 얼마를 가는지는 모두 육장봉이 결정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표면적으로 강남 수군은 여전히 그들의 총교관이 지휘했다.

육장봉은 총교관을 지휘할 뿐이었다.

총교관은 전체 수군 중에서 육장봉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이었다.

육장봉은 그의 앞에서 진실한 성격을 감춘 적이 없었다. 행동이나 말에서 모두 '대장군'의 위엄이 엿보였다.

총교관은 이틀을 참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담대하게 한마디 물었다.

"장사, 정말 군인이 아니십니까?"

육장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째려보았다.

그 눈빛은 위압감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 총교관이 허겁지겁 뛰쳐나가서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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