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화 큰아가씨께 어울리는 자식이야!
배가 연이어 부딪치면서 선미에는 순식간에 구멍이 뚫렸다.
"선미가 뚫렸습니다."
"배 세 척이 우리를 뒤따르고 있습니다."
배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 선실에서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구레나룻은 배의 흔들림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배 가운데로 뛰어갔다.
그는 육일과 형제들을 지나쳤지만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들을 가로질러 넘어갔다.
육일과 친위대는 이제 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배에서 그들은 가장 약한 존재였다. 심지어는 월령안보다 더 약했다.
그리고 배에서건 전쟁터에서건 약한 자들은 발언권이 없었다.
"큰아가씨, 상대측의 작은 배는 개조한 것이라 부딪힐 때 충격이 엄청납니다. 우리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희는 내려가서 구멍을 막겠습니다. 배에 일은 아가씨께 부탁드립니다."
구레나룻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좀 거리가 떨어져 있는 육일 등도 그들의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배에 물이 들어왔다고? 별일 없겠지?"
육일 등 몇 사람은 근심에 싸여 서로서로 마주 보며 어쩔 바를 몰랐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부딪혔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파손되어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배가 없다면 그들은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마님을 믿어."
육일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엄격한 말투로 육이를 비롯한 동생들에게 경고했다.
"당황하지 마."
육이 등도 정신을 차리고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당황한 표정을 거두었다.
당황할 게 없었다.
기껏해야 죽는 것뿐이었다.
* * *
"좋아. 내가 주 선실로 갈 테니, 바깥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월령안은 배 한가운데서 시원하고 깔끔하게 구레나룻에게 인계하고 주 선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구레나룻처럼 빠르지 않았지만 안정된 걸음걸이였다. 게다가 그녀는 차분한 표정에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이 가게 하고 마음이 놓이게 했다.
통로를 지나갈 때, 월령안 역시 육일과 그 형제들의 곁을 지나쳤다.
그녀는 그들을 보았으나 역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고의로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시간이 없었다.
지금 선미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금은 매 순간, 숨을 쉬는 시간조차도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월령안이 주 선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리고, 육장봉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저들과 함께 선미를 구조하러 갈 것이오."
"조심하세요."
월령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심하라는 한마디만 하고는 육장봉과 어깨를 스쳐 지나 주 선실로 들어갔다.
주 선실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 육일 등은 누군가 월령안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큰아가씨, 앞쪽에 암초가 있어서 선체를 돌릴 수가 없습니다."
탕……!
주 선실 문이 닫히면서, 육일 등은 뒤에 월령안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선체가 선미 쪽으로 기우는 듯한 느낌만 알 수 있었다.
이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육일 등은 침착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는 육장봉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금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육장봉은 곧 그들의 옆을 지나 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휘이잉…….
배 안에서는 흔들리기만 하지만, 배 밖은 세찬 비바람 때문에 자칫하면 파도에 휩쓸려 갈 수 있었다.
육장봉이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침 깡마른 사내 하나가 파도에 휩쓸려 나갔다.
"잔나비!"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깡마른 사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눈을 뻔히 뜨고 깡마른 사내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인생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던 형제들인데 정이 없을 리가 없었다.
바다에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이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서는 수시로 생명의 위험이 닥쳐왔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
그들은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인명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몰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역으로 그들은 누구보다 목숨을 아꼈다. 바로 목숨을 아끼기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쉽사리 낭비할 수 없었다.
"꽉 잡아!"
육장봉은 뛰어올라 단숨에 깡마른 남자를 잡고 바람을 맞받아 던졌다.
같은 시각, 구레나룻은 밧줄 한 묶음을 던졌다.
"잡으시오!"
천만 번은 연습한 사람처럼 육장봉은 단번에 줄의 한쪽 끝을 잡고 허공을 선회해 갑판으로 돌아왔다.
"대단해."
"멋있어!"
육장봉의 민첩한 반응과 멋진 움직임은 뱃사람들의 갈채를 자아냈다.
세찬 바람 속에서 일 년 내내 파도에 치이고 모진 비바람을 겪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바다의 악천후와 이 순간의 위험에 대해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시원하게 웃었다.
"자식, 멋지군!"
육장봉이 막 착지하자마자, 구레나룻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여러 해 동안 남에게 가슴을 얻어맞은 적이 없는 육장봉은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곧 꽤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육장봉은 주 선실에서 침착하고 차분한 반응으로 구레나룻에게 인정받았다. 금방 전에 보인 한 수는 구레나룻으로 하여금 육장봉을 자기네 형제로 간주하게 했다.
기왕 한집안 사람인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구레나룻은 전혀 내외하지 않고 큰 소리를 질렀다.
"가자! 우리 선미에 가서 한번 뒤지게 잘해 보자고!"
항상 형세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했던 육장봉이었지만 체면을 앞세우지 않고 구레나룻을 뒤따르며 그의 지휘에 따랐다. 그리고 굵은 밧줄을 허리에 감고 작은 배에 뛰어 내려갔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큰 배도 마냥 흔들렸다. 작은 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작은 배는 파도에 실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끔 파도에 밀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는 했다.
이러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작은 배가 다음 순간 파도에 부딪쳐 뒤집어질까 애간장을 졸였다.
구레나룻도 배와 한 몸이 되어 그 흔들림에 따라 배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는 몸에 감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동시에 잊지 않고 육장봉에게 한마디 일깨워 주었다.
"이 밧줄은 그냥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야. 풍랑이 조금 세지면, 툭 치기만 해도 끊어지네.
자네, 조심하라고. 데면데면하게 이 밧줄이 자네 목숨을 구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게."
"음."
육장봉은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보기에는 구레나룻보다 더 차분해 보였다.
원래 조금이나마 불안했던 구레나룻은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안정되었다.
구레나룻은 육장봉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네 괜찮군. 난놈일세. 우리 큰아가씨께 어울리는 자식이야!"
남과 신체 접촉을 꺼리는 육장봉은 몸이 살짝 굳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육장봉과 구레나룻이 탄 것과 같은 작은 배는 한 척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내려온 뒤, 큰 배에서는 또 같은 작은 배 다섯 척이 잇달아 내려왔다. 배 위의 고수들도 잇달아 뛰어내려 각자 작은 배에 올랐다.
모두 준비되자 구레나룻은 큰 손을 흔들었다.
"가자! 선미로 가자!"
작은 배는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육장봉은 곧 구레나룻 등 몇은 배 방향을 통제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설령 풍랑이 아무리 크더라도, 설령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더라도 작은 배는 안정적으로 선미 쪽으로 나아갔다.
이 재주는 향혈해에게 정신도 못 차리게 얻어맞은 강남 수군은 물론이고, 그의 수하 중 수전에 능한 사람들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왜 강남 수군을 얕잡아보고, 조정의 부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재주꾼들을 놀고 먹게 해서 폐인으로 만든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먹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하얀 파도가 일렁였다.
바닷물이 공중에서 여러 개의 물 벽을 이루다가 다시 툭툭, 무너지며 몸에 떨어져 내려 사람을 흠뻑 적셨다.
일렁거리는 바닷물에 비하면, 점점 더 거세지는 빗방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육장봉과 구레나룻은 첫 번째로 배에 올랐다.
두 사람은 배에 오르자마자 온몸이 흠뻑 젖었다. 물에 젖은 옷은 두껍고 무거워졌으며 몸에 휘감겨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구레나룻은 두말없이 옷을 벗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장봉이 여전히 물어 젖어 무거워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구레나룻은 그에게 행동하기 편하게 옷을 벗으라고 권했다.
"괜찮네!"
육장봉은 거절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월령안이 손수 지은 것이었다.
이혼당한 다음부터 월령안은 그에게 옷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는 월령안이 만들어 준 옷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구레나룻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도 못했지만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작은 배를 저어 끊임없는 파도를 뚫고 풍랑을 거슬러 선미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들도 뒤를 바싹 따라 작은 배 여섯 척이 한 척도 빠짐없이 모두 안전하게 선미에 도착했다.
"역시 노사(老鯊), 그 나쁜 자식들이군."
비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구레나룻은 상대 배 위의 사람을 보고, 화가 나서 욕을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와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켜 버렸다. 구레나룻의 욕설도 육장봉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나와 노구두(老狗頭)는 저들을 막을게. 목두(木頭), 너는 네 아버지, 네 형과 배를 수리해라. 동자(東子), 강자(强子)! 너희 넷은 목두 그들을 엄호해."
구레나룻은 뱃머리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아무리 높게 소리쳐도 다른 배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말하는 동시에 손짓을 했다.
뒤따르던 배 다섯 척의 사람들은 대뜸 그의 뜻을 이해했다.
곧이어 배 여섯 척은 두 척씩 짝을 지어 구레나룻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부군 나리! 무서워하지 마시오! 내가 보호해 줄 테니까."
구레나룻은 작은 배를 제어하며 여전히 앞장서서 파도를 맞받아 상대방에게 돌진했다.
슈욱, 슈욱……!
작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자마자 화살이 바람을 뚫고 비처럼 쏟아졌다.
화살 비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쏘아졌기에, 일반적인 사정거리보다 훨씬 멀리 날아왔다.
구레나룻 종씨는 허둥지둥 피하기에 바빴다. 곧 화살이 팔을 스치며 다치게 되자 그는 화가 나서 욕을 퍼부었다.
"이 개자식들이…… 항상 뒤에 숨어서 꼼수나 쓴단 말이야."
슈욱……! 슈욱……!
배 위 사람들은 마치 종씨를 겨냥한 듯했다. 모든 화살이 종씨에게 날아갔다.
종씨는 작은 배가 뒤집히지 않게 제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화살 비도 피해야 했다. 결국 양쪽을 모두 돌보기는 역량 부족이라 흠칫하는 사이, 작은 배는 파도에 밀려 날아가고 말았다.
물이 배에 한가득 찼고 작은 배는 곧 뒤집혔다. 풍덩, 하고 종씨와 육장봉은 동시에 바다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