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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854)화 (854/1,004)

854화 당신을 보게 되니 너무 좋아요

이 일로 육장봉의 좋은 기분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는 가는 내내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낯선 사람은 가까이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육장봉은 강남에 도착하고 나서도 기분이 호전되지 않았다.

"조계안은 어디 있나?"

마음이 언짢은 육장봉은 서둘러 월령안을 만나지 않고 먼저 조계안의 행방을 물었다.

"대장군께 알려드립니다. 조왕 전하께서는 강녕부에 계십니다."

사전에 월령안의 고자질하는 편지를 읽었던 육일은 가장 먼저 조계안의 행방을 알아내었다.

그는 육장봉이 강남에 도착하면 반드시 먼저 조계안부터 찾아 월령안을 위해 화풀이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뜻밖에 육장봉은 그의 대답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보았느냐?"

"대, 대장군……!"

육일은 다리를 흠칫 떨며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다행히 그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재빨리 냉정을 되찾은 다음 말했다.

"소인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재간이 늘었구나."

육장봉은 의미심장하게 육일을 흘겨보고는 말을 몰아 떠났다.

육일은 어쩔 바를 몰랐다.

'대장군은 무슨 뜻이지? 벌을 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 * *

변경에서 육장봉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을 받자마자 월령안을 만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해 강남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강남에 도착하자 육장봉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강녕부에 가서 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힘으로 조계안과 한판 붙었다. 그러고는 조계안을 눈과 코가 퉁퉁 부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놓고서야 그만두었다.

"육장봉, 이 개 같은 놈!"

조계안은 온몸의 힘을 다 쏟아붓고 죽은 개처럼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입뿐이었다.

그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육장봉은 재주가 또 늘었다. 앞으로 이 년만 더 지나면, 그는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일밖에 없을 것이다.

육장봉은 조계안보다 좀 나은 편이라 그래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도 마찬가지로 조계안에게 얻어맞아 피가 흘렀고 얼굴도 여러 군데 멍이 들었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다음번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때려 놓는 정도가 아닐 거야."

"뭘 더 바래?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게 만들 거야? 아니면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만들 거야? 그 다음에는 황성사를 네가 인계하려고?"

조계안은 화가 나서 웃었다. 그러고는 육장봉의 손을 와락 잡고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힘을 빌려 자리에 앉았다.

육장봉은 조계안보다 조금 나았다. 그런 상태에서 조계안이 확 잡아채자 하마터면 쓰러질 뻔하였다. 조계안이 어찌나 억세게 잡았는지 떨치려고 해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다.

"손발을 함부로 다치지 마."

"하!"

조계안이 못마땅해했다.

"딱딱하기만 한걸. 누구는 건드리고 싶어 건드리는 줄 알아."

육장봉이 손쓰기 전에, 조계안이 한발 먼저 술 단지를 들어 올려 그에게 던졌다.

"말해. 한판 싸우는 것 외에, 또 무슨 일이 있어?"

"강남 양식 창고."

육장봉은 뚜껑을 열고 술 단지째로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열여덟 해나 묵은 여아홍이야. 맛이 어때?"

조계안은 눈을 찡긋거리며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눈코가 부은 얼굴까지 어울려 익살스러운 모습이었다.

육장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월령안의 여아홍임을 알 수 있었다.

"삼 년…… 아니지. 지금 계산하면 사 년이나 되었군. 사 년 전에 마시지 못한 술을 지금 마시니 맛이 더 좋다."

조계안은 술 단지를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술은 오래 둘수록 더 맛있구나."

"해야 할 일이나 말해."

육장봉은 조계안과 술에 대해 논할 생각이 없었다.

"뭐 말할 게 있겠어……. 월령안이 나보다 더 잘 알 건데. 뭘 알고 싶으면, 월령안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조계안은 두세 입에 단지의 술을 다 마시고는 빈 단지를 멀리 던져 버렸다.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흘렀다.

그도 그냥 여아홍이나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은 역시 불가능했다.

"네가 조사해 낸 걸 말해 봐."

육장봉은 눈을 내리깔아 눈 속의 감정을 감추었다.

그들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조계안은 그의 동정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남의 양식 창고는 절반 이상이 비어 있어. 창고에 있던 양식은 모두 강남의 관리들이 팔아 버렸어. 강남 총독이 참여했는지는 조사해 내지 못했지만 묵인했다는 점만은 확신할 수 있다."

조계안은 또 술 한 단지를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일은 어둠 속을 걷는 일이었다. 평소에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오직 육장봉이 있을 때만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여 총독을 보내 강남의 관료 사회를 숙청하라고 했지. 오랫동안 그는 다른 건 해놓은 게 없지만, 같은 물에 노는 법을 배우는 거 하나는 빠르군."

육장봉은 코웃음을 쳤다.

이것이 바로 강남이었다.

향락의 도시이자 영웅의 무덤이었다.

어떤 성격이든, 어떤 포부를 품고 강남에 오든, 일단 강남에 보내지면 일 년도 안 돼 강남에 동화돼 강남만의 특성을 띤 관리가 되었다.

물론 동화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관리들은 강남에서 일 년도 안 되어 여러 가지 죄를 범해 나중에는 해임되지 않으면, 유형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보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은 강남을 떠났다.

"같은 물에서 놀지 않았으면 진작 강남에서 발령돼 다른 곳으로 갔겠지. 황형이나 그자가 강남 관료 사회에 발을 붙이려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거야."

조계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내 수하 정탐꾼들은 강남에서 아무 일도 못 하고 자잘한 소문만 알아냈어. 황형은 내가 키운 사람 탓만 했지. 자신이 선택한 신하가 무슨 물건인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야."

"여 총독은 처신을 무척 잘하거든. 이 몇 해 동안 강남에서 나름 괜찮게 일한 편이었어."

육장봉은 황제가 여 총독의 됨됨이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제가 여 총독의 됨됨이에 대해 잘 알기에 강남에 보냈다고 생각했다.

강남의 관료 사회는 여 총독과 같이 교활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 정말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라면 부임하자마자 강남에서 죽게 될지도 몰랐다.

전에 그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맞는 건 같기도 하군. 친아들에게도 손쓸 수 있는 사람이니, 만약 난세라면 한 지방의 영웅쯤은 될 수 있었을 거야."

호랑이도 제 자식은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 총독은 자신의 벼슬자리를 위해 전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였다.

그는 월령안이 왜 황제에게 의심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여 총독을 제거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 총독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한계라는 것이 없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그에게 미움을 사지 않거나 일단 미움을 샀다면 되도록 빨리 손을 써서 죽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다.

조계안은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며 되새김하듯이 말했다.

"강남에서 흑사병이 도는 건, 여 총독 부인의 조카와 관련된 것 같아. 여서 그 자식이 백성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육장봉이 대답했다.

"죽였어?"

"그보다 더 악랄해."

조계안은 비웃었다.

"그는 불을 질러 전체 배의 사람을 모두 태워 죽였어. 여 부인의 조카도 그 배에 있었다. 여 부인도 당시 그 자리에 있으면서 통곡하며 조카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어. 여서 그 자식은 능청스럽게 거절했어. 말끝마다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 얼마나 기품 있고 위엄 있는지 구경하던 백성들이 감동해 마지않았대. 심지어 여서 그 자식에게 만민산(萬民傘 - 백성들이 덕이 높은 관리에게 선물로 보내던 우산)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했단다."

"그런 사람을…… 제거하려면 쉽지 않겠군."

육장봉은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군 군영이 불타 버린 뒤, 그자는 무엇을 했어?"

월령안이 여 총독을 위해 짠 판은 연환계로 걸음마다 막다른 국면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여 총독은 일 처리가 과격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역풍을 몰아 판을 뒤엎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여서는 수군을 출정시켜 전력으로 해적을 토벌하고 있어. 지금 들려오는 소식은 여서에게 매우 유리해."

조계안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얼굴이 부은 것을 잊어 입꼬리가 아픈 나머지 육장봉을 한껏 흘겨보았다.

"말해 봐."

육장봉은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이 캐물었다.

조계안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해는 너도 알다시피 회색 지대다. 그쪽 사람들은 해적도, 상인도 아니지.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거래는 하지 않아. 대신 부정품 거래나 남을 도와 빛을 볼 수 없는 재무 등을 처리해 주지. 여서는 남해 쪽 사람들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 그 사람들이 여서의 행동에 전력을 다해 협력해 줄 거래.

이외의 변고가 없는 한…… 이제 곧 해적이 나와서 수군 군영을 불사른 일을 책임진다고 할 거야. 그러면 여서도 그 기회에 그들을 체포할 것이다. 때가 되면 여서의 관리로서의 명성은 아마도 한 단계 더 높아질 거야."

월령안이 만약 그녀가 여서를 위해 판 함정이 나중에 도리어 여서의 업적을 이루게 했다는 것을 알면 피를 토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계안은 그때 가서 월령안의 안색이 어떻게 바뀔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 *

육장봉은 조계안을 호되게 두들겨 놓은 뒤, 알고 싶은 소식을 알아내고는 얼굴의 부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월령안을 만나러 갔다.

"육장봉!"

월령안은 육장봉을 보자 눈에는 온통 기쁨으로 넘쳤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육장봉에게 달려갔다.

"당신이 어떻게 오셨어요? 못 올 줄 알았어요. 폐하께서 보내 주시던가요? 강남의 양식 창고에 문제가 생겨서 보내 준 거예요? 이 일을 조계안에게 흘리면 꼭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역시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보답이 있군요."

"맞소.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보답이 있지."

육장봉은 두 팔을 벌려 월령안을 안았다.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육장봉은 사람을 품에 꼭 껴안자 가슴이 꽉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드디어 송취 골목의 그림자가 아닌, 진정한 월령안을 안게 되었다.

이 순간의 포옹만으로도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대가를 치를 만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보자 기쁜 나머지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육장봉이 대답하기도 전에 스스로 대답하면서 전부 말해 버렸다.

"지금 당신을 보게 되니 너무 좋아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품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육장봉의 몸에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육장봉의 입가에 생긴 퍼런 멍이 보였다.

"당신 얼굴……."

월령안은 잠깐 멍해 있다가 소리 질렀다.

"조계안을 때리러 갔어요?"

"음."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했다.

"당신도 참…… 그냥 고자질 좀 해 본 거였어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했다.

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내밀어 육장봉의 찢어진 입꼬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가서더니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아픈가요?"

"아니……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오. 그냥 막 두들겨 준 것이오."

육장봉은 혀끝까지 밀려왔던 '아프지 않소'를 겨우 삼켰다. 그는 월령안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손바닥에 대면서 정색해서 말했다.

"아프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아프세요?"

그녀가 처음으로 육장봉을 아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의 상처는 육장봉에게 있어서 그냥 모기에게 물린 거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물은 것은 마냥 마음이 아파서였다. 생각 밖으로 육장봉은 욕심이 점점 더 생기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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