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화 강남총독 여서를 탄핵합니다
조계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어디서 생긴 배짱이냐? 황형께서 네가 향혈해를 시켜 수군 군영을 불사른 일을 알까 조금도 겁나지 않는 것이냐. 나를 속이지 마. 내 짐작이 틀림없을 거니까."
"수군 군영에 불을 지른 건 향혈해 스스로 한 결정이에요. 저하고는 무관합니다. 저는 억울해요."
월령안은 차분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조계안은 믿지도 않고 자기 말만 했다.
"너, 여 총독 그들이 팔아 버린 양식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지? 아니냐?"
조정에서 전쟁을 하려면, 가장 부족한 것이 양식이었다. 월령안이 많은 양식을 내놓으면 황제는 아무리 불만이 있다고 해도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생각이 많으신 겁니다."
'조계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향혈해더러 수군 군영에 불을 지르라고 했을 당시, 그녀는 아직 여 총독이 강남의 비축 양식을 훔쳐 팔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황제가 그 일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향혈해라는 덤터기를 쓸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모든 일을 향혈해의 책임으로 몰아가면 되었다. 모든 게 향혈해가 제멋대로 한 행동으로 그녀와는 추호의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연대책임을 지면 되었다.
그녀는 이미 향혈해가 몇 년 동안 모아 둔 금은보화를 모두 황제에게 바칠 준비를 해 두었다.
그 금은보화는 황제가 강남 수군 같은 것을 여러 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다.
월령안은 여 총독 그들이 팔아 버린 양곡들이 누구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안의 의심 많은 성격으로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면 조계안은 또 그녀를 의심할 것이다.
반면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조정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그녀처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증거가 없어도 마음대로 죄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명성이 있었다.
수군 군영에 불을 지르든지, 흑사병 폭발을 추진한 일이든지 간에 조정에서 증거를 찾지 못하면 조계안과 황제가 아무리 그녀가 한 짓이라고 단정하더라도 함부로 그녀의 죄를 묻거나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황제가 굳이 그녀의 책임을 추궁하려 해도, 증거가 없으면 육장봉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 대신들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적으로 그녀를 두어 번 욕하거나 괴롭히고 더욱더 신임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황제가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배 째라 식으로 그녀는 더는 황실에 시중들 생각이 없었다.
조계안은 갓 강남에 도착했기에 아는 일이 많지 않았다. 월령안이 말하지 않으면 그는 화만 낼 뿐 그녀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조계안은 독설을 하고 화가 잔뜩 난 채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허! 내가 무서워할 줄 아나 보지?"
월령안은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조계안이 자리를 뜨자마자 그녀는 곧장 육장봉에게 편지를 보내 고자질했다.
그녀는 조계안을 어찌할 수가 없지만 육장봉은 가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조계안을 한바탕 두들겨 그녀 대신 화풀이를 해 줄 수가 있었다.
월령안은 비둘기로 편지를 보냈다. 바로 육삼이 육장봉에게 몰래 소식을 보내는 비둘기 한 쌍 중의 하나였다.
* * *
육일은 아침 일찍 다른 한 비둘기가 날아오자 잠깐 멍해졌다.
'육삼은 어제저녁에 편지를 보내왔는데 왜 오늘 아침 일찍 또 편지를 보냈을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육일은 얼굴빛이 살짝 변한 채 비둘기에 매단 대나무 통을 재빨리 취해 망설임 없이 정원으로 걸어갔다.
"대장군, 강남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음."
육장봉은 편지를 건네받고 계속해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조회에 참가하는 날이었다.
조복을 입은 육장봉은 침착하고 장중하며, 기세가 당당했다.
그는 다리가 길어 걸음 폭이 컸다. 걸음마다 발밑에서 바람이 일어 옷자락이 흩날리고 내려앉기를 반복해 말할 수 없이 기운이 넘쳤다.
육장봉은 길을 가면서 육일이 건넨 편지를 펼쳐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요 깍쟁이, 드디어 내게 편지를 쓸 생각을 하다니."
육일은 바싹 따라가다가 육장봉의 말에 흠칫 떨고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요 깍쟁이? 육삼을? 흠…… 대장군의 이 악취미는 정말 소름이 끼치는군.'
그는 육삼이 '요 깍쟁이'로 불리는 장면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역시 필요할 때만 내게 편지 쓰는 것을 기억한다니까."
육장봉 입가의 웃음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중의 두 줄로 된 글을 연속 두 번 훑어보고는 다시 조심조심 말아 대나무 통 안에 넣어 육일에게 도로 건넸다.
"잘 건사했다가 조회가 끝나면 돌려 주거라."
"네, 장군."
육일은 대나무 통을 잘 건사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아무 이상 없이 육장봉을 따라 황궁에 들어섰다.
육장봉이 조회에 참가할 때, 육일은 참지 못하고 뭇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대나무 통을 열어 보았다.
그는 육삼이 도대체 뭐라고 썼기에 대장군이 그처럼 다정하고 총애하는 말투로 육삼을 '요 깍쟁이'라고 부르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육일은 쪽지를 열어 보는 순간 자신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아……. 마님의 편지였군."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월령안의 편지 이외에, 누구의 편지가 육장봉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육일은 묵묵히 쪽지를 말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원상 복귀 시켰다. 다만 묵묵히 마음속으로 강남의 여 총독과 강남에서 일을 보는 조계안을 위해 초를 켜고 기도해 주었다.
오늘 조회는 이전의 여느 조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하려면 육장봉의 기분이 여느 날과 달리 좋아 보였다.
관리들이 그에게 예를 올리면, 그는 이전처럼 얼굴이 어두워 보이지 않을뿐더러 잠깐 멈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기도 했다.
관리들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들끓었다. 특히 첫 번째로 육장봉의 답을 받은 관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몰래 궁리했다.
'육 대장군이 웬일이야? 설마 나를 봐둔 건 아니겠지?'
이 모습을 본 기타 관리들은 이유를 모르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고 앞다퉈 육장봉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리고 늘 이런 응대를 귀찮게 여기던 육장봉은 오늘 그야말로 참을성이 대단했다. 누구든, 설령 정적(政敵)이라도 다가가서 인사하면 모두 대답해 주었다.
'육 대장군이 오늘 웬일이지?'
뭇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리고 의아할수록 더 궁금했다. 그래서 육장봉에게 인사하러 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황제가 왔을 때, 육장봉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황제는 늘 붙임성이 좋았다. 이 광경을 보고도 화내지 않고, 도리어 호기심이 동해 한마디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가? 이리 떠들썩한 겐가?"
뭇 관리들은 분분히 황제에게 길을 양보하는 동시에 예를 올렸다.
육장봉도 대세에 따라 예를 올리며 황제에게 대답했다.
"아마 오늘 날씨가 좋은 모양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대전 바깥의 음침한 하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봉도 농을 할 줄 아는구나."
육장봉은 빙그레 웃으면서 변명하지 않았다.
조정은 이렇듯 재미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사람마다 믿었다. 반면 그가 진실을 말하면 도리어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오늘 날씨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그의 기분도 덩달아 좋을 정도로 말이다.
황제는 지체하지 않고 한마디만 하고 옥좌로 걸어가 앉았다.
일순간 어수선하던 조회가 정중하고 엄숙해졌다.
이반반은 황제 옆에 서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이 있으면 아뢰고 일이 없으면 물러간다'를 외쳤다.
"신이 아뢸 일이 있습니다."
대신들은 마치 사전에 연습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하나씩 나서서 결정하지 못한 사항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조회에서 논하는 일들은 내각에서 먼저 선별한 것으로 대부분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 황제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황제는 진지하게 듣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보통 즉석에서 결단했다. 즉석에서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것들은 뭇 대신들을 논의하게 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 어느 쪽이 그를 납득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았다.
대신들이 논의해야 할 일에 대해, 황제는 보통 즉석에서 결정 내리지 않고 논의를 들은 뒤에도 잠시 보류해 두었다.
뭇 대신들이 사사건건 의논함에 따라 시간이 흘렀고, 대전 바깥의 어둡던 하늘이 맑아졌다.
황제는 잠깐 정신을 팔고 구름 속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해를 보며 영문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장봉의 말이 맞군. 오늘 날씨가 참 좋네.'
황제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 이부시랑이 나서서 말했다.
"신, 아뢸 일이 있습니다."
"아뢰거라!"
황제는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강남 총독 여서는 병사를 이끌고 해역을 순시하다가 해적 천여 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외 해적선 세 척과 금은보화 얼마간을 노획했습니다……. 여 총독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군에 깊이 침입해 해적들과 싸웠습니다. 이 일은 천하의 관리들이 본받을 만합니다. 신은 폐하께서 이 일을 천하에 고해 칭찬하고 격려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부시랑이 말을 마치고 황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병부시랑 장기가 나서서 말했다.
"신, 역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병부시랑 장기는 말을 마치고 무릎을 꿇더니 수중의 상주서를 높이 쳐들었다.
"신은 강남총독 여서를 탄핵합니다. 여서는 해적과 결탁해 양민을 해적으로 만들어 군공을 거짓으로 알렸습니다."
황제는 허탈하기만 했다.
잠시 정신을 판 사이, 이렇게 큰일을 터뜨리다니.
이부에서는 강남 여 총독이 백성을 마음에 두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해적을 토벌해, 공로가 크므로 천하에 알려 천하의 백관이 따라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병부는 여 총독이 백성들을 유린하고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며 양민을 해적으로 둔갑시켰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해적과 결탁해 수군 군영을 불살라 증거를 없애기도 했다고 했다.
쌍방 모두 자기주장을 내놓았다. 이부에서는 강남 현지의 공문이 있고 노획한 전리품을 증거로 내놓았다.
병부에는 강남 관리 설정산이 여 총독을 탄핵하는 상주서와 억울함을 당한 백성이 쓴 혈서를 증거로 내놓았다. 그 외에 여 총독이 해적과 왕래한 편지 한 통도 있어 꽤 유력해 보였으나 진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병부시랑이 대전에서 일품 대신을 탄핵했으니 전혀 증거가 없거나 허튼소리일 리는 만무했다.
이부 측은 실질적인 공적을 확인했고 게다가 장씨 가문의 암시까지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병부 측이 헐뜯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