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3화 강남 총독
"지금, 부인께 알리세요. 당신네 부부 두 사람은 저와 제 호위의 옷으로 갈아입고 저의 마차를 탄 채로 저택을 떠나세요. 저택을 나선 뒤, 제가 두 분을 맞이할 사람을 안배하여 안전한 곳으로 모셔갈 겁니다. 그리고 제 소식을 기다리세요. 기억하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상, 누가 찾아가도, 설령 최일이 찾아간다고 해도 절대 제가 안배한 곳에서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셨어요?"
월령안은 엄숙한 얼굴로 아주 빨리 말했다. 지금 그녀는 설정산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설정산에게 그녀의 안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설정산은 의견 없이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설정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월 낭자, 전 조정 명관인지라 제가 여러 날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월령안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고 말투는 침착했다. 마치 더없이 흔한 일을 처리하는 듯한 그 모습은 사람에게 신임을 주었다.
설정산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좋아요, 낭자 말씀에 따르지요!"
그는 이미 월령안의 배를 타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더구나 월령안의 안배는 그들 부부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머뭇거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설 부인은 남편을 하늘로 여기는 여인이었다. 갑자기 집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비록 놀랐으나 당황하지 않고 유순하게 응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월령안과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바꿔 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설 부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월 낭자, 우리 나리께…… 위험이 생겼나요?"
"제가 안배한 대로 따르시고 제멋대로 다니지 않고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신다면 괜찮아요."
월령안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 그녀의 시선은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그녀를 힘들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월령안의 따뜻하고 힘찬 눈과 마주친 설 부인은 불안하던 마음이 갑자기 편해지는 감이 들었다.
설 대인과 설 부인은 옷을 갈아입고 월령안의 안배대로 공숙소화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갔다.
공숙소화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꿋꿋한 자세로 도망치지 않고 월령안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을 들은 설 대인과 설 부인은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다.
월령안은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제 옆에 남은 당신에게 무슨 쓸데가 있다고요?"
공숙소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그도 난감해졌다.
월령안은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의 덩치로 절 위해 칼을 막아 줄 수는 있겠네요."
공숙소화가 말했다.
"월령안, 사람 망신은 시키지 말아야지."
"쓸데없는 말을 더 한다면 당신을 버려 버릴 거예요."
월령안이 공숙소화에게 살기가 담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공숙소화는 바로 겁을 먹었다. 그는 투덜거리더니 설 대인 부부와 함께 떠나갔다.
설 대인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들은 이 홀가분한 장면을 보고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그들은 젊은이들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설 대인 부부는 그들 세 사람이 떠나자마자 월령안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월령안은 엄격한 목소리로 육삼더러 설씨 가문의 하인을 모두 앞뜰에 불러 모으라고 분부했다.
육삼에게 분부를 내린 뒤, 월령안은 또 몰래 그녀를 따라다니던 암위를 불러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신변에 암위 세 명을 붙여 놓았다. 물론, 이 세 명의 암위는 동시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번갈아 당직을 서며 매일 틈이 없이 월령안을 보호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지금 불러낸 것은 암위 천일(天一)이었다.
"마님."
"바로 변경으로 들어가 이 상주서를 최 승상 손에 넘기세요."
월령안은 설정산이 쓴 상주서를 비밀 함 속에 넣어 암위에게 건네주었다.
월령안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 승상의 정치적 지혜와 수단으로는 반드시 이 상주서의 가치를 최대로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다.
"네, 마님."
천일은 비록 월령안이 왜 이 상주서를 장군에게 넘겨주지 않는지 의아했으나 암위 수칙이 있으니 아무리 궁금해도 묻지 못했다.
월령안이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을 보자 암위는 나무함을 들고 떠나갔다.
암위가 떠나자 월령안도 일시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어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월령안은 화청을 서성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소식이 새어 나갔는지 확신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설 대인 부부를 내보낸 것은 매우 위험했다. 어쩌면 강남 총독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설 대인 부부의 목숨으로 도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계획을 앞당겨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낭자, 설부의 모든 하인을 소집했습니다. 소인이 알아본 바로는 한 명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월령안이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육삼이 복명하러 왔다.
월령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속의 잡생각을 억누른 뒤, 가슴을 펴고 당당히 밖으로 나갔다.
"가요, 가서 설씨 가문의 하인을 만나요."
그녀는 조급할 수 있어도 불안해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두려워해도 되나 외부인들 앞에서, 특히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 없어 한다면 아랫사람들의 공포는 무한하게 확대될 것이다.
마치 설 대인 부부 앞에서 했던 것처럼 그녀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여유롭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그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야 그들이 겁을 먹고 중도에서 배신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월 낭자,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월령안과 육삼이 화청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설부의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뛰어왔다. 그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병사가, 총독 나리가 데려온 병사가 설부를 에워쌌어요! 우리가…… 조정의 지명 수배 범인을 은닉했다면서요!"
"총독이?"
월령안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강남 총독은 설씨 저택의 지붕이라도 들춘 건가? 너무 빠르잖아.'
강남 총독의 반응은 너무나 빨랐다. 월령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녀가 당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순간, 월령안은 잠깐 당황하고 나서 생각을 바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강남 총독의 반응은 배우 빨랐지만 그녀도 못지 않았다.
상주서는 이미 육장봉의 암위가 가져갔다. 강남 총독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고 소식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육장봉 암위의 손에서 상주서를 빼앗자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설 대인 부부에 관해서는?
설정산은 결국 조정 명관이고 또 최 승상과 사돈을 맺은 사이였다. 강남 총독이 아무리 미쳐 날뛰더라도 그들을 암살할 리 없었다.
관부에는 관부의 규칙이 있었다. 조정에서 아무리 싸워도 괜찮으나 정말 사사를 이용해 암살한다면 동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제도 이런 신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월령안은 이미 모든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그래서 병마를 데리고 살기등등하게 쳐들어온 강남 총독을 마주했을 때도 월령안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여유롭게 예를 올릴 수 있었다.
"소인, 대인을 뵙습니다."
"월령안?"
강남 총독은 위엄이 넘쳤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월령안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월령안은 놀라워하지 않았다.
"네."
강남 총독은 그녀를 처음 보나 그녀는 강남 총독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강남 총독의 아들이 바로 구리파의 그 소녀들을 학대하며 놀던 귀족 자제들 중 일원이었다.
그때, 강남 총독은 변경에서 부윤직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점잔을 빼는 총독 나리가 성 밖에서 이재민을 구제하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재민의 처지를 보자 이재민보다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가식적인 모습을 어두운 곳에서 한두 번 지켜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뛰쳐나가 이 총독의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아들이 무고한 소녀들을 죽이게 내버려 뒀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이렇게 슬피 우시나요? 무슨 낯짝으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척, 백성들과 함께 아픈 척하시나요?'라고 따지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들었다.
나중에 육장봉이 손을 써 강남 총독 아들을 불구로 만들었어도 그녀 마음속의 한은 풀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그 도련님은 괘씸했으나 더욱 괘씸한 것은 그를 눈감아 주고 감싸며 보호까지 한 강남 총독이었다.
만약 강남 총독이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그의 아들은 어떻게 사람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남 총독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그의 아들은 어떻게 사건이 터진 뒤, 아무렇지 않게 발을 뺄 수 있었겠는가?
그 철없는 도련님은 죽어 마땅하나 그들의 아버지도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구리파의 사건이 터진 뒤, 귀족 자제들은 육장봉에게 벌을 받았고 그들의 아버지도 지장을 받았다.
오직 강남 총독만이 변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반응도 아주 빠른 탓에 미리 대의멸친(大義滅親)하여 자기의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상주서를 올려 황제에게 죄를 청했다.
황제는 그가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것을 보아 그에게 삼 년 동안 감봉하는 벌만 내렸다.
강남 총독 같은 고위관리들은 녹봉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처벌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로써 강남 총독에 대한 황제의 신임과 중시를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은 그때 이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몹시 불공평하다고 느꼈으나 어쩔 수 있겠는가?
황권지상인데!
죄는 부모에게 미치지 못했다.
황제가 정한 일을 틀렸다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황제의 태도 때문에 그녀는 강남 총독의 트집을 잡고 싶어도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강남 총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들이 비록 그녀의 손에 죽은 것은 아니라도 그녀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 강남 총독은 그녀를 죽여도 모자랄 판인데 어찌 그녀를 놔주겠는가.
천궁각의 일이 바로 가장 좋은 증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남 총독이 먼저 손을 쓴다면 그녀가 어떻게 반격하든지 황제는 그녀가 틀렸다고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잡아들여!"
강남 총독은 아주 깔끔하고 또 아주 냉혹했다. 그는 월령안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뒤로 물러서서 관졸더러 월령안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관졸이 명령을 받고 앞으로 다가오자 육삼은 머뭇거리지 않고 칼을 뽑아 월령안의 앞을 막았다.
"여(余) 총독, 사람을 잡아들이려면 관문(官文)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관문? 내가 직접 왔는데 그까짓 관문 한 장보다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냐?"
여 총독은 냉소를 지었다. 육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강남 지역에서 그가 사람을 잡아들이려면 관문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육장봉 그 꼬맹이를 따라다니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을 몇 개 세웠다고 자기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여 총독께서는 조정 명관이신데 조정의 규칙을 안중에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칼을 움켜쥔 육삼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오늘 이 싸움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여 총독은 규칙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흥!"
여 총독은 하찮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일개 무장이 나와 입씨름을 하려고 하다니. 누가 준 자신감이야?'
여 총독은 육삼을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지명 수배 범인 월령안을 잡아들여라! 반항하는 자는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