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화 앞으로 제 안배를 따르세요
설정산은 월령안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월령안이 찾아온 용건은 그의 추측과 너무 달랐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에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응했다.
월령안은 강남 관리인 그가 상주서를 써서 강남 총독을 독직(瀆職)하고, 공로를 탐내며 해적이 바다에서 활개를 치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으며 공로를 차지하려고 백성을 해적으로 만든 일로 탄핵해 달라고 했다.
이번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그가 관직을 잃을 수도 있고 심지어 가족까지 연루될 수도 있었지만 설정산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없었더라면 설씨 가문은 진작에 없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이 살아 있고 그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월령안의 공로였다.
지금 월령안이 그를 쓰려고 하는데 그가 머뭇거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설 대인……. 좀 더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월령안도 최일이 부탁한 사람이니 인품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도 설정산에게 부탁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설정산의 통쾌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오기 전에 설정산을 설득할 말을 잔뜩 준비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전 월 낭자께서 일부러 절 해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설정산은 시원하게 웃었다.
"월 낭자가 남도 아니고 이것도 무슨 함정인 것이 아닌데 제가 왜 뜸을 들이겠습니까? 일이 성사되면 전 이 일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고 만약 패한다고 해도 그건 제가 남보다 부족한 탓이지요."
설정산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월령안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월령안은 일어서서 정중하게 설정산을 향해 읍했다.
"절대 설 대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월 낭자, 별말씀을요."
설정산은 다급히 일어나 월령안을 부축했다.
"월 낭자께서 바쁘지 않으시다면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지금 바로 탄핵하는 상주서를 쓸 것입니다. 조금 있다 월 낭자께서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그는 들통나지 않게 월령안과 말을 맞춰야 했다.
"좋아요!"
월령안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설 대인께서 일 보러 가세요. 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부인이 직접 월 낭자께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월령안은 귀한 손님이었다. 설정산이 어찌 월령안을 홀로 내버려 두겠는가?
월령안이 대범하게 응하고 공숙소화와 육삼더러 화청에서 기다리게 한 뒤, 그녀는 하인을 따라 설 부인을 만나러 갔다.
설씨 가문의 모두는 월령안을 은인으로 대했다. 설 부인은 월령안을 보자 한없이 기뻐하고 공손하게 굴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설 부인은 월령안을 한없이 추어올리고 자신을 낮추었다. 월령안은 전에 장 승상부로 가서 장 승상의 모친에게 생신 축하를 해 주던 일이 떠올랐다.
같은 세가 출신인데도 장씨 가문의 여인들은 설 부인과 비할 수 없었다.
'장 승상의 아내도 설씨 가문 출신인데 장씨 가문의 그 몇몇 공자와 낭자들은 왜 설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품성과 겸손을 배우지 못했을까? 혹시 귤이 회남에서 크면 귤이 되고 회북에서 크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환경에 따라 성질이 변하는 건가?'
월령안은 설 부인과 아주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이제 강남의 새 비단이 나오게 되면 함께 새 옷을 만들러 가자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월령안과 설 부인은 얘기를 오래 하지 못했다.
설정산이 수횡천도 아니고 상주서를 쓰는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설정산은 상주서를 다 쓰고 사람을 보내 월령안을 모시러 왔다.
월령안은 바깥 대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표정이 심상치 않은 공숙소화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앉아 있는 육삼을 힐끗 훑어본 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설정산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설정산의 손에서 상주서를 받아 들었다.
다 읽고 난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문인은 역시 문인이었다. 글자마다 정말 칼과 같이 날이 서고 마디마디 날카로웠다.
그녀는 설정산에게 해적이 앞으로 상선을 약탈하고 강남 수군 군영을 불태울 것이니 이를 빌미로 강남 총독이 직무를 유기하고 정사에 소홀하다고 탄핵하라고만 말했었다.
그런데 설 대인의 상주서에는 강남 총독이 해적과 결탁하여 해적을 보호하고 백성을 해적으로 꾸몄으며 해적의 행적을 감춰 주고 죄를 덮어 주었다고 쓰여 있었다. 심지어 군사 정보를 해적에게 넘겨 해적이 번마다 수군의 토벌을 피할 수 있었다고 썼다.
마지막에 설 대인은 더더욱 신랄하게 강남 총독을 질책하며 강남 해역에 해적이 이토록 날뛰는 것은 전부 강남 총독이 키운 일이라고 했다.
그는 강남 총독과 해적의 우두머리가 각별한 사이며 강남 총독이 해적과 결탁한 것은 돈만이 목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니 조정에서 흠차(欽差) 대신을 보내 엄히 조사하기를 간청한다고 했다.
그녀가 향혈해의 일을 설 대인에게 들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녀조차도 설 대인의 마지막 몇 마디 말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설정산은 월령안이 상주서를 보고 난 뒤, 한참이나 말이 없자 한순간 불안해하며 먼저 물었다.
"월 낭자, 이 상주서를 이렇게 써도 되나요? 위에 나열한 증거가 타당한가요?"
물론, 설정산이 상주서에 쓴 증거는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구체적인 증거는 월령안이 안배하는 중이었다. 흠차 대신이 조사하러 올 때면 그들은 증거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타당해요!"
월령안이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주서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힘이 있었다.
설정산은 정말 목숨을 내걸었다. 그는 강남 총독과 그 배후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면 됐습니다!"
설정산은 가볍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으쓱함을 감추었다.
월령안에게서 찬사를 들었으니 하도 머리를 쥐어뜯어 대머리가 될 뻔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월령안은 상주서를 덮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 상주서는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이 본 적이 있나요?"
설정산은 멍해졌다가 대답했다.
"제 막료(幕僚)가……."
설정산이 말을 마치기 전에 월령안은 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육삼, 사람을 데려오세요. 만약 반항한다면 죽이세요!"
"네, 낭자."
존재감이 전혀 없던 육삼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표범처럼 신속하게 뛰쳐나갔다.
"월 낭자, 그 사람은 제 심복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절대 절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정산은 웃으며 해명했다.
"비밀이 새 나가면 큰 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일은 큰일이니 일단 소문나면 기회를 잃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도 위태롭습니다."
설정산은 그의 막료를 믿었으나 월령안은 믿지 않았다.
월령안은 낮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었다.
"설 대인,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 그럴 리는 없겠지요?"
설정산은 당황하며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럴 리가 없다면 가장 좋겠죠."
월령안은 상주서를 움켜쥔 채,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으로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도 자기가 괜한 생각을 한 것이기 바랐다.
그러나 온몸이 피로 물든 육삼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월령안은 일이 가장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이 생겼나요?"
설정산은 벌떡 일어나 다급히 육삼을 바라보았다.
육삼은 대꾸하지 않고 피로 물든 서신을 월령안에게 바쳤다.
"낭자, 소인이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밖으로 편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소인이 편지를 막으니 그 사람은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습니다. 소인이 무능하여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월령안은 받아서 힐끔 보고 설정산에게 넘겨주었다.
"보세요."
"이, 이럴 수가?"
설정산은 황급히 받아서 읽어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멍하니 의자에 주저앉았다.
죽은 막료는 그의 곁에 이십 년 이상 있었던 장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설정산이 얼이 빠진 틈에 월령안은 이미 침착함을 되찾고 육삼에게 다른 일을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그 어떤 소식도 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린 적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나요?"
육삼은 고개를 저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설정산이 상주서를 들고 월령안에게 오기까지 일각이 흘렀다. 일각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미…… 새어 나간 건가요? 그럼…… 우리는 어떡합니까?"
설정산은 이미 얼이 빠진 상태였다. 그는 월령안과 육삼의 대화를 듣고 본능적으로 월령안에게 구원의 시선을 던졌다.
새어 나갔는지 아닌지 월령안도 몰랐다.
설부는 월씨 저택이 아니었다. 그녀도 처음 설부로 찾아온 것이니 어찌 설부의 상황을 알겠는가.
그러나 심복 막료가 배반한 전력이 있어서 월령안은 설부에 대한 설정산의 통제력을 크게 믿지 않았다.
그 막료는 설정산 옆에서 이십여 년이나 있었다. 지난번, 장씨 가문에서 하마터면 설씨 가문을 뒤엎을 뻔한 것도 설정산은 상대방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아 설씨 저택에 다른 첩자가 있더라도 설정산은 분명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 막료가 비밀을 누설했는지 안 했는지를 막론하고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설 대인, 절 믿으세요?"
월령안은 재치 넘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설정산에게 그녀는 그 어떤 위험도, 이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까짓 작은 일은 전부 그녀의 통제 안에 있다고 소리 없이 말해 주었다.
월령안의 자신만만함에 영향받은 설정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꿋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믿습니다! 전 저를 믿지 않아도 낭자를 믿어요!"
월령안이 순식간에 이상함을 눈치채 사람을 보내 막료를 찾지 않았더라면 그는 가장 가깝고 가장 믿던 사람이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 왔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막료의 배반으로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월령안밖에 없었다.
"저를 믿으신다면 앞으로 제 안배를 따르세요."
설정산이 먼저 그녀에게 어떡할 건지 묻는 순간부터 월령안은 설정산이 주도권을 그녀의 손에 넘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이렇게 물은 것은 설정산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뿐이었다.
설정산이 돌이키려면 지금은 가능하나 일단 대답한다면 그녀는 더 이상 설정산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설정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낭자의 안배에 따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