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화 영왕(榮王)의 후손
"오만하구나!"
구 두목도 선한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흉악하게 월령안 쪽으로 다가갔다.
"월씨, 내가 널 큰아가씨로 부르니 넌 네가 정말 대단한 줄 아는구나. 우리 천룡파를 없애버리겠다니. 너한테 그럴 능력이나 있어!"
월령안은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구씨 자네가 밖으로 나올 때, 황력(黃歷)을 펼쳐 보지 않았나 보군."
"무슨 뜻이야?"
구 두목은 손톱으로 탁자를 긁으며 흔적 네 줄을 만들었다. 위협의 의미가 다분했다.
월령안의 미소는 아주 달콤했다.
"황력에서 오늘은 해장(海葬 - 바다에 시체를 묻는 것)하기 좋은 날이라고 했거든!"
"매복을 설치했어?"
구 두목의 동공이 확장되면서 손을 번쩍 들어 월령안에게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육삼의 반응이 그보다 빨랐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육삼이 그의 목에 칼을 댔다.
"움직이지 마!"
찰랑…….
거의 동시에, 배 밖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배를 몰던 마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두목, 물고기가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죽으려고!"
구 두목은 온몸의 근육이 불어나며 목에 들이밀어진 칼도 무시한 채, 월령안을 덮치려 했다.
푸슉!
육삼의 칼이 움직이며 구 두목의 가슴팍을 스쳤다.
육삼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가 칼로 찌르려고 할 때, 은색 빛이 지나오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구 두목의 눈썹 사이를 적중했다.
"자네는 여전히 이렇게 시시하군."
은색의 그림자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치사……."
구 두목은 제자리에 멍해진 채로 서 있었다. 새빨간 피가 그의 눈썹 사이로 솟구쳐 나왔다. 추악하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고 공포스러워졌다. 오직 눈만이 월령안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때, 구 두목의 손바닥은 월령안의 목과 손가락 하나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월령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변하지 않은 얼굴로 눈앞의 구 두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옅은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직접 미끼가 되어 주었으니 너는 영광으로 여기렴."
월령안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으나 육삼과 공숙소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특히 공숙소화는 오늘 뭘 하러 온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안전해졌다고 하나 두 사람은 여전히 놀란 상태 그대로였다. 공숙소화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꼼짝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육삼의 상황도 조금만 더 나을 뿐이었다. 항상 경계심으로 가득하던 그는 눈앞의 이 은색 옷을 둘러싸고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요괴처럼 준수한 남자가 언제 배 위에 나타났는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육삼이 발견했을 때, 이 요괴같이 준수한 남자는 이미 구 두목의 시체를 발로 차 버리고 월령안의 앞에 앉았다.
은색 옷의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몸을 월령안 쪽으로 기울여 오른손으로 월령안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를 만지며 애틋하게 속삭였다.
"너는 예전처럼…… 모든 곳이 내 맘에 쏙 들게 생겼군."
"무엄하다!"
육삼은 반응하고 칼을 들어 은색 옷의 남자를 베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은색 옷의 남자는 발을 들어 육삼을 차 버렸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은색 옷의 남자는 손쉽게 육삼을 물에 빠뜨렸다.
월령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과했어!"
"네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
은색 옷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긴 눈매 사이로 염세적인 싸늘함이 느껴졌다.
"짜증 나는 군사들 냄새야. 씻어도 씻어 버릴 수 없지. 너는 이런 수하를 키울 수 없어."
"내 옆에서 나를 위해 일을 하는 이상, 모두 내 사람이야. 내 앞에서 내 사람을 때리다니. 내 뜻을 물어보기는 했어?"
월령안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은색 옷의 남자에게 이런 식의 텃세는 아주 불쾌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너의 옆에서 너를 위해 일을 하는 이상, 모두 너의 사람이군."
은색 옷의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입술을 핥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애틋하게 속삭였다.
"나도 너의 옆에서 너를 위해 일을 하면 나도 네 사람이 되는 것인가?"
월령안은 차갑게 비꼬았다.
"우리 월씨 저택의 대문은 영왕(榮王)의 후손과 개는 넘어올 수 없어."
은색 옷의 남자는 바로 아주 먼 옛날 월씨 가문의 큰아가씨와 영왕의 후손이었다.
영왕이 유주(幽州)에서 죽은 뒤, 조씨 황실은 영왕의 세력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공격했다. 그렇게 영왕의 세력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영왕의 후손은 모조리 학살당할 뻔했다. 바로 그때, 충성스러운 부하가 자기의 아이와 영왕의 갓 태어난 아기를 바꾸었다.
은색 옷의 남자는 바로 그때 살아남은 아기의 손자였다. 그는 심복의 성을 따라 향(香)씨를 가졌고 이름은 혈해(血海)였다. 혈해심구(血海深仇 - 피맺힌 깊은 원한)의 그 혈해였다.
향혈해가 예전에 뭘 했는지 월령안은 알지 못했다. 그는 지금 해적의 우두머리고 방금 전 구 두목의 세력을 빼앗았으니 이제는 해상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월령안, 그만해!"
해적 우두머리 향혈해는 월령안의 말에 격노했다.
"너희 월씨 가문이 뭐라고 감히 날 모욕해!"
그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그윽하던 긴 눈매가 차가워졌다.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사정하러 온 거야! 월령안, 부탁을 한다면 부탁하는 사람의 자세를 갖춰. 너희 아버지는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어?"
향혈해는 월령안의 아버지가 그녀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은 사람 마음을 찌르는 말이었다.
월령안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도리어 비꼬았다.
"아버지는 나한테 너희 영왕 후손을 만나면 사정을 봐주지 말라고 가르치셨지. 그러나 너의 아버지는 너한테 월씨 가문 사람을 만나면 깍듯이 대하라고 가르치셨을 거다!"
향혈해의 아버지가 언제 죽었는지 월령안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향혈해를 알았을 때 이미 그는 해적들 사이에서 고아였다.
준수하고 예쁘며 기질이 비범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해적처럼 막 구르며 자란 사람들과 다른 고아였다.
이런 사람은 해적 소굴에서 남녀 불문하고 인기 많은 잠자리 상대였다.
그러나 향혈해는 홀로 적들을 죽이고 길을 냈다. 또 월령안이 그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향혈해의 신분을 알기 전까지 월령안은 향혈해와 동맹을 맺었다. 나중에 향혈해의 신분을 알게 된 뒤, 월령안은 후회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미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어."
향혈해는 대범하게 자신이 고아 출신임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월령안의 마음에 비수를 박았다.
"너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평생 그럴 일 없어. 너희 월씨 가문이 황제의 공신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거야. 너희 월씨 가문이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것은 자업자득이야. 맞지? 월령안?"
"그래서 우리 월씨 가문 사람들은 너희들을 싫어하는 거야! 너희들을 좀 봐……. 우리 월씨 가문이 너희들에게 돈을 퍼 주어도 너희들은 결국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잖아. 얼마나 무능한 거야?"
월령안은 빨간 입술로 손쉽게 반격했다.
"향혈해, 무능한 건 인정해야 해."
"내가 무능해도 결국 나한테 부탁하러 왔잖아."
신분을 들키고 또 월령안에게 개와 동급으로 불린 향혈해는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곧 그는 월령안이 일부러 그를 도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충동적으로 조정의 사람과 대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몇 년 못 본 사이에 월령안의 수단이 더 능숙해졌구나. 하마터면 걸려들 뻔했어. 그러나 아쉽지만 난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야. 월령안에게 쉽게 도발 당해 화내지 않아.'
향혈해는 힘을 풀고 의자에 기댔다. 두 다리는 탁자에 올려놓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했다.
그 웃음은 도도한 것이 몹시 얄미웠다.
월령안도 그를 싫어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부탁이라고? 향혈해, 바다는 한시도 평화로울 때가 없었어. 내가 널 도와 구 두목의 세력을 삼켜 버리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도와 너의 세력도 삼키게 할 수 있어."
향혈해를 도발하여 조정과 대적하지 못한다면 그가 손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가 온 이상, 향혈해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향혈해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치켜뜨며 더없이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육삼은 푹 젖은 모습으로 엉금엉금 배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는 향혈해의 말을 듣고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말았다.
"마님, 아니면 우리 정말 시험해 볼까요? 우리 형제들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자유자재로 싸웠지만 바다에서는 싸워 본 적은 없으니까요."
"마님? 너 또 육씨에게 시집갔냐?"
향혈해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웃지 않아도 그윽하던 그의 위로 쪽 째진 눈이 음산하고 무섭게 변했다.
"너희 월씨 가문 사람은 절대 같은 구덩이에 두 번 빠지지 않는다면서? 월령안, 넌 왜 이렇게 천박해?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야?"
월령안의 눈매가 칼처럼 날카로워지더니 호되게 꾸짖었다.
"너와 무슨 상관이야! 입이 그렇게 더러워서야 쓰겠어? 내가 좀 씻어 줄까?"
"나와 상관없어도 내 머리와는 상관이 있어!"
향혈해는 매우 화가 났다. 탁자에 걸쳤던 두 다리도 거두어들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탁자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월령안,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관가의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아. 네가 만약 무슨 장군 부인이라면…… 오늘 우리는 만나지 않은 거로 하자. 네가 날 도와 천룡파를 멸했으니 보수는 따로 지불해 줄게."
"내가 직접 미끼가 되어 주었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월령안이 비꼬았다.
"이 보수는 높긴 할 거야."
향혈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월령안을 힐끗 보더니 시선에 드리운 우울함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농담을 했다.
"내 장월도(藏月島)는 어때? 장월도에 마침 여주인 자리가 비는데."
월령안은 비록 직접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이 육장봉에게 다시 시집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좋아, 아주 좋아.'
"장월도? 어디에 있는데?"
'난 왜 이 바다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
"구 두목의 구역 말이야. 그 섬에 들어갈 때, 월량만(月亮灣)이 있잖아. 그래서 내가 장월도라고 이름을 지었지."
향혈해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표정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다는 것을 오직 그만 알고 있었다.
비록 그는 자신이 조금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우습고 슬픈 희망을…….
그때, 이 여인은 그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그의 생명으로 들어가 어두운 그의 인생을 밝혀 준 빛이었다.
그는 잊을 수 없었다.
"이름도 다 지었네. 구 두목의 세력을 오랫동안 노렸나 보군. 아쉽게도 이 이름은 좋지 않아. 일찍 바꾸기를 건의하지."
향혈해는 여전히 야심이 가득했다.
야심이 있으면 좋았다. 야심 있는 사람과 협력하면 위험도는 커도 위로 오르려는 생각도 없고 현실에 안주한 채, 노력하지 않는 사람과 협력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녀는 이런 경우에 수횡천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괜히 암시하고 빗대어 나무라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