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화 거래를 할 테냐 말 테냐?
월령안은 몸을 돌려 추수의 원망 가득한 얼굴을 보자 웃으며 추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추수, 네가 할 일은 도련님을 잘 보호하는 거야. 다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이미 어린애가 아니야. 이까짓 일은 비록 속상하지만 날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야.'
"알겠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추수는 다급히 마음을 다잡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데려가."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더 보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삼 나리께 전하거라. 서남을 떠나지 말라고."
서남 사람들은 단합되었고 배타적이었다. 장평이 서남을 떠나지 않는 이상 다른 마음을 품어도 뭔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월령안은 아주 낮은 소리고 속삭이듯 말했지만 추수는 알아들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
"응."
월령안은 가볍게 답하고 눈을 감은 뒤,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추수가 소년을 안기 편하게 길을 내주었다.
추수도 통쾌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소년을 안은 뒤, 밖으로 나갔다.
월령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소년을 안은 채 떠나는 추수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소년이 누웠던 침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만날 때도 우리 사이는 지금과 같기를. 가짜로 꾸며진 것이라고 해도 난 괜찮아.'
* * *
육삼은 육장봉에게 소식을 전하고 돌아온 뒤, 천목신교의 사람에게서 추수가 떠났다는 말을 듣자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는 다급히 뒤쫓아나갔다. 추수가 장평이를 안은 채,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자 육삼은 급히 소리를 질렀다.
"추수, 어디 가시오? 왜 나는 안 데리고 가시오?"
추수는 멈칫하더니 소년을 미리 마차에 탄 사의에게 넘기고 돌아서서 말했다.
"전 아가씨의 명령으로 도련님을 서남으로 모셔 가요. 아가씨는 당신과 함께 가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나, 낭자의 명령이라고?"
육삼은 말을 더듬었다.
"오늘 갑자기 난 결정이오? 바뀔 가능성이 있소?"
'이것이 바로 내가 대장군께 몰래 소식을 전한 것에 대한 벌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냥 산 둘레를 열 바퀴 달리는 것으로 바꿔달라고 사정해도 될까? 열 바퀴뿐이잖아. 뛰면 되잖아. 지쳐 죽어도 뛸 거야!'
"당신은 군영 출신이니 군령(軍令)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 거예요. 월씨 가문에서는 아가씨의 명령이 바로 군령이에요."
추수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육삼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전 금방 돌아올 거예요. 당신은 아가씨 옆에서 잘 좀 해요. 잘해야……."
"알았소. 내가 잘해야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는 거겠지."
육삼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는 순식간에 기운을 되찾았다.
"추수,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꼭 잘해서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소."
추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전 당신이 잘해서 공로로 과오를 씻으라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 아가씨를 팔아넘기고도 절 맞이하고 싶으세요? 무슨 꿈을 꾸시는 거예요?"
추수는 육삼을 흘겨보고는 마차에 올랐다.
육삼은 멍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추수를 잡아당겼다.
"아니오, 추수, 난……."
"당신이 했는지 안 했는지 난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당신이 잘 좀 해서 제가 돌아왔을 때에도 아가씨 곁에 있기를 바랄게요."
추수는 육삼을 뿌리치고 냉혹하고도 무정하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마차에 들어갔다.
"갑시다, 저 인간을 신경 쓰지 말고."
"이럇!"
마부는 추수의 명령을 듣고 뛰어오는 육삼을 무시한 채, 마차를 몰고 떠나갔다.
"추수……."
육삼이 마차 문 앞에 엎드리자마자 마차는 떠나갔다. 다행히 육삼의 반응이 빨라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응이 빠른 그도 마차를 따라잡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서서 추수를 태운 마차가 점점 멀어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육삼은 울려고 했으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해! 너무해! 아가씨는 정말 너무해!"
이 벌은 이산을 열 바퀴 뛰는 것보다 더욱 매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는 순순히 뛰었을 것이다.
'흐어엉…… 난 대장군께 편지를 쓸 거야. 대장군께서 내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아셔야 해.'
추수가 떠나자 육삼은 혼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 뒤로 육삼은 축 늘어졌다. 말을 탈 때도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어 언제든지 말 등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것도 부족한지 육삼은 길에서 불안하고 서글픈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월령안의 잔인함을 원망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은 소용없었다!
월령안이 얼마나 무심한지 육삼이 온갖 방법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도 월령안은 모두 그가 없는 듯이 굴었다.
육삼은 길 가는 내내 참다가 밤에 천막을 세우고 쉴 때가 되자 끝내 참지 못했다. 그는 뻔뻔스럽게 월령안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낭자, 추수를 서남에 보낸 것은 저에 대한 벌인가요?"
추수가 떠나기 전에 한 '공로로 과오를 씻으라'는 말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대장군에게 고자질한 것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도 그의 시인이 필요 없었다.
만약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내를 맞이하기는커녕 월령안 옆에 남을 수 있는 것조차도 문제였다.
이는 추수가 떠나기 전에 그에게 귀띔한 것이었다.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오후에 떠난 뒤, 연속 말을 두 시진 동안 탄 월령안은 몹시 지쳐 있어 육삼을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육삼은 월령안이 쫓아내지 않으면 끝까지 모르는 척할 정도로 뻔뻔스러웠다.
"수 맹주의 무공이 더욱 강하니 도련님을 서남으로 모시기엔 수 맹주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낭자는 왜 추수더러 모셔 가라고 하셨어요? 추수를 옆에 남기면 더욱 소용이 있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육삼을 흘겨보았다.
"당신네 장군이 일깨워 주지 않았어요?"
"도련님을요?"
육삼은 시험조로 물었다.
"뻔히 알면서 묻기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 육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아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헤헤…… 마님, 얼른 쉬세요. 제가 밤새워 지킬게요."
육삼은 자기가 원하던 답을 얻자 더 이상 월령안을 귀찮게 하지 않고 공숙소화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낸 뒤,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몰래 대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다 들킨 바에야 공로로 과오를 씻기 위해 그는 앞으로 정정당당하게 월령안 앞에서 '몰래 대장군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이렇게 하면 월령안이 언짢아서 그와 추수를 또 떨어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숙소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와 무슨 상관인데?'
* * *
월령안 일행이 강남에 도착했을 때, 육장봉의 회답 편지도 도착했다.
육장봉의 회답 편지는 한결같이 간결했다.
그는 편지에서 월령안더러 마음껏 하라고, 하늘이 무너져도 그가 지탱해 주겠다고 말했다.
"당신의 이 말이 있으니 전 걱정할 게 없어요."
월령안은 흰 종이 위에서 강한 기운을 풍기는 힘찬 글씨를 바라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공숙소화는 이상하게 불안함을 느꼈다.
"령안, 계획이 있어?"
"있어요."
월령안은 편지를 태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는 자꾸 월령안이 큰일을 벌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월령안더러 강남의 일을 처리하라고 한 것이 도대체 잘한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월령안의 이 자세는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란을 피우려는 사람 같았다.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월령안이 말을 마치자마자 육삼이 들어와서 보고했다.
"아가씨,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갑시다."
월령안은 일어서서 공숙소화더러 함께 가자고 눈치를 줬다.
공숙소화는 월령안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는데?"
"도착하면 알아요."
월령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아주 빨랐다. 남자인 공숙소화도 발걸음을 재촉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육삼의 안내로 세 사람은 강가로 와서 오봉선(烏篷船 - 검은 뜸으로 씌운 배)에 올랐다.
배는 강 중간까지 가다가 멈춰섰다.
공숙소화는 월령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월령안에게 뭘 하려는 것인지 물었다.
월령안은 손을 들어 아래로 내리누르는 듯한 동작을 했다. 공숙소화더러 급하게 굴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육삼도 이때다 싶어 공숙소화를 슬쩍 흘겨보았다.
공숙소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왠지 자신이 쓸데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중에서 지금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참 비참했다!
세 사람은 배에 앉아서 반 시진을 기다렸다. 반 시진 뒤, 수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숙소화는 무척이나 나가서 보고 싶었으나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눈빛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는 월령안을 바라보자 참고 말았다.
이번에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자 인상이 흉악하고 얼굴 가득 흉터투성이며 한쪽 눈이 먼 사내가 배에 올랐다.
"큰아가씨,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내가 배에 오르자 배 전체가 휘청거렸다. 공숙소화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공숙소화는 상대방을 힐끗 보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묵묵히 배 변두리를 잡았다.
이 사내는 살기를 풍겼고 눈도 한쪽밖에 없었으나 아주 흉악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선한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괜히 월령안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멀리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구(仇) 가주, 앉으세요."
월령안은 손을 들어 상대방더러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내도 신경 쓰지 않고 잔혹한 미소를 드러내며 월령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큰아가씨께서 이 구씨를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거래를 하려고."
월령안은 여전히 느긋하게 대답했다. 상대방은 열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큰아가씨, 아가씨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잖습니까. 저더러 살인하고 방화하라면 절대 두말하지 않겠지만 거래라면…… 저 같은 거친 사람이 무슨 장사를 할 줄 알겠어요?"
구씨 성을 가진 사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광명정대한 사람은 뒷공론을 하지 않는 법. 구씨 자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더 잘 알아. 나한테 그것만 알려 줘. 나와 거래를 하겠는지 말겠는지."
월령안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분이 나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구 두목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큰아가씨,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최근 바다 이쪽은 관리가 엄합니다. 형제들 모두 조심스럽게 행동하니 도저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죠."
"나는 인내심이 많지 않아. 할 거야? 말 거야?"
월령안의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구 두목은 더 이상 불쌍한 척하지 않았다. 그는 안면을 몰수하고 난폭하게 말했다.
"내가 하면 어쩌고 안 하면 또 어쩔 테냐?"
"하면 너희 천룡파(天龍幫)는 해상에서 가장 큰 파벌이 될 거야. 하지 않는다면 천룡파는 사라지고 말 테고."
월령안은 가장 온화한 말투로 가장 잔인한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