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화 질투
수횡천은 무심결에 물어보는 듯했지만 얼굴에는 ‘허탈’ 두 글자가 씌어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월령안은 일의 자초지종을 쉽게 풀어서 수횡천에게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조정 관리의 경질(更叠)에 관련된 것이니 상황이 정해지기 전에 월령안은 수횡천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조정의 풍향은 변화무쌍하고 관청의 투쟁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여 한 수만 잘못 두어도 전체 판을 망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최일에게 강남 총독의 자리를 도모해 주고 싶었지만 원래의 강남 총독이 기꺼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는가?
다른 세력이 안다면 이렇게 큰 떡을 기꺼이 양보해 줄까?
소식이 새어 나간다면 최일의 정적이 나서서 최일을 음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강남 총독의 자리는 고사하고 최일 현재의 자리조차 지키지 못할 수 있었다.
최 승상은 승상이었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었다.
최 승상은 물론이고 황제조차도 조정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제멋대로 굴 수 없었다.
월령안이 수횡천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은 수횡천을 경계해서가 아니라 수횡천이 너무 단순해서였다. 그녀는 수횡천이 남의 떠보는 말에 넘어가 최일에게 골칫거리를 만들어 줄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횡천이 뭘 듣고 싶어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수횡천의 실망한 눈빛을 받으며 화제를 무림 집시(集市)로 옮겼다.
무림 집시는 현재 무림맹의 가장 큰 믿는 구석이었고 무림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었다. 수횡천은 무림 집시를 아주 중시했다.
월령안이 말을 꺼내자 수횡천은 바로 기운을 차렸다. 그는 월령안을 붙잡고 수다스럽게 한참 얘기를 했다. 월령안도 사람 좋게 수횡천의 말을 매우 인내심 있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림집시의 앞으로의 경영 방향과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논했다.
비록 월령안은 이 일들을 소육자에게 말했었지만 수횡천이 묻자 전혀 짜증 내지 않고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월령안은 수횡천과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얘기를 나누었다. 무림집시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얘기한 셈이었다. 그제서야 월령안은 수횡천더러 금방 귀시에서 돌아오느라 길에서 지쳤을 것이니 얼른 쉬라고 했다.
수횡천은 힘들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육장봉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 맹주, 령안이 자네에게 대한 호의를 무시하지 말게.”
수횡천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왠지 육장봉의 싸늘한 눈과 마주하자 그는 말하려던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얼떨떨하게 쉬러 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뒤에도 그는 자기가 왜 육장봉을 무서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만약 정말 손을 쓴다면 육장봉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가 정말 지쳤나 보군.”
수횡천은 한참 생각했지만 자기가 왜 육장봉의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지 않자 수횡천은 잠이 들었다.
그는 월령안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릴까 걱정되어 꼬박 일 박 이 일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보니 많이 지쳐 있었다.
* * *
수횡천이 시무룩해 있을 때, 육장봉의 심기도 언짢았다.
월령안이 어쩌다 그 꼬맹이와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되었는데 수횡천이 또 월령안을 붙잡고 반나절이나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만약 진지한 얘기라면 그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횡천이 한 얘기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육장봉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횡천이 가자마자 그는 참지 않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횡천은 무림맹주에만 어울리오. 무림 집시의 일에 대해 당신이 아무리 자세히 말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하오. 앞으로 당신은 그와 이런 얘기를 적게 하시오.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수횡천에게 팔아먹힐 수도 있을 것이오.”
“수 오라버니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에요.”
월령안은 기운 없는 말투로 수횡천의 역성을 들었다.
“고의가 아닌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오. 멍청한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멍청한 것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것이오.”
육장봉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얼굴은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림대회가 열릴 때, 그는 주나라에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수횡천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전 무림 집시의 일을 소육자에게 맡겼어요.”
월령안은 수횡천의 편을 들려고 했으나 육장봉의 굳은 얼굴을 보자 결국 포기했다.
그녀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수횡천이 행동 한 가지를 하는 것보다 힘이 없었다.
‘앞으로 수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는지 잘 지켜보아야겠어.
수 오라버니에게 일이 생긴다면 내가 바로잡을 수 있게 말이야.’
“아주 잘했소.”
육장봉은 찬사를 보내듯 고개를 끄덕였다. 밖의 눈 부신 햇살을 바라보다가 육장봉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가서 좀 걷지 않겠소?”
“무슨 일이 있나요?”
월령안이 본능적으로 물었다.
육장봉의 얼굴이 또 굳어졌다.
“용건이 없다면 나와 함께 나가서 좀 걸을 수 없는 것이오?”
월령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나와 있었어요. 장평(長平)이가 깨어나 절 찾을 때가 되었어요.”
“장평?”
육장봉은 의아한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제 오라버니의 아들이요. 제가 그에게 장평이라는 소명(小名)을 지어 줬어요. 그가 무사히 오래오래 무사하게 살라고요.”
소년의 얘기를 하는 월령안의 입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장평이는 제가 지은 이 이름을 아주 좋아해요.”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월령안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중요한 용건이 있소!”
육장봉은 이미 월령안 마음속에서의 자신의 순위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장평이라는 소년은 물론이고 이젠 수횡천마저 그보다 중요한 것 같았다. 그는 또 뭘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만약 월령안과 용건이 없고 함께 걷기만 하자고 말한다면 월령안은 반드시 그를 내팽개치고 떠날 것이다.
그가 북요에서 돌아와서 지금까지, 월령안이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다 합해도 한 시진이 안 될 것이다.
“용건을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되나요?”
월령안은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걸으면서 얘기한다면 시간을 더욱 낭비할 것이다.
용건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정식적인 장소에서 하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응.”
육장봉은 팔짱을 끼고 온몸으로 기분 나쁜 티를 냈다. 그는 대답을 했지만 입술을 앙다문 것이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월령안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알겠다. 이 늙은 남자가 삐쳤으니 달래 줘야겠군.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며칠간 장평이와 함께 있느라 육장봉을 거의 신경 쓰지 못했어. 그래, 육장봉이 나가서 걷고 싶다고 하니 나가지 뭐.’
월령안은 육장봉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린 뒤, 정중하게 손을 뻗어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육 대장군께서 저와 함께 나가서 산책하지 않으시겠어요? “
“그럴 기분이 아니오. 나가고 싶지 않소.”
육장봉은 여전히 삐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저랑 놀아 준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나요? 전 이 며칠간 거의 나가지도 못했다고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옷소매를 잡아당긴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언의 부탁을 했다.
육장봉은 처음에는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월령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에게 옷소매가 잡힌 채, 몇 번 흔들리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월령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기가 마음이 너무 급했다는 것을 알아챈 육장봉은 귀 끝이 빨개지며 또 애써 자존심을 부리려 했다.
“당신이 이렇게 성심껏 부탁하니 나도 하는 수 없군. 당신과 함께 나가 걸어 주겠소.”
“네, 네, 네…… 그것참 고맙네요.”
월령안은 실소를 하며 육장봉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자랑하듯 육장봉 앞에서 흔들었다.
“꽉 묶어 두었으니 싫어도 저랑 함께 가야 해요.”
육장봉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싸늘함은 더 이상 온데간데없었다.
때는 마침 가을이라 햇빛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외출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좌, 우 호법이 고른 이 별장도 아주 적당했다.
별장의 정원에는 국화꽃이 가득했다.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의 국화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바람을 맞아 피어나는 국화는 유달리 예쁘고 다채로웠으며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그 모습은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별장에서 이렇게 많은 날을 보냈는데 별장의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네요.”
아름다운 경치는 미인처럼 보기만 해도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이다.
알록달록 활짝 핀 정원의 국화를 보니 오랫동안 우울했던 월령안의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우울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소싯적에 겪었던 일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때 그녀는 이겨냈으니 지금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육장봉은 말없이 월령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월령안이 길가의 경치를 바라볼 때, 육장봉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령안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왜요?”
육장봉의 눈빛은 너무 뜨겁고 이글거렸으며 침략성이 다분했다. 마치 월령안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월령안은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육장봉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월령안을 한참 바라보았다.
“난…… 변경에 다녀와야겠소.”
“최일의 일 때문인가요?”
월령안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영문을 알아챘다.
최일이 귀시의 뒤를 밟아 북요의 사월이라는 조직을 알아낼 수 있다면 현음 공주와 육장봉도 알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변경으로 가서 황제가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맞소.”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도 만나 뵙고.”
‘폐하를 한바탕 혼내야겠어. 내가 변경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고 폐하께서 내 성격도 잊으신 채, 좋은 것, 나쁜 것 할 것 없이 다 월령안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도록 말이야.’
그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었다. 최일의 일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그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폐하께서 당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아세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남상권의 신분으로 돌아온 것을 잊지 않았다.
북요에서는 전해온 소식이 없었다. 북요에서 육장봉이 떠난 것을 아직 모른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육장봉은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알고 계시오.”
그가 조용히 북요를 빠져나오려면 어머니를 속일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황실에만 충성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는 사실은 황제도 반드시 알고 있었다.
“진작에 알고 계셨군요. 당신이 주나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폐하를 뵈러 가지 않고 절 찾아온 일로 폐하께서 크게 화내시지 않을까요?”
월령안은 영리한 얼굴로 끝 음을 길게 끌었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하였다.
“괜찮소.”
‘이 심보 나쁜 여자애 같으니라고. 정말 고소해하는 기분을 전혀 숨기지 않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