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화 어젯밤에 떠나셨습니다
그녀는 황궁 쪽을 뒤돌아보며 소리 없이 인사를 건넸다.
'영감님, 저 가요.'
월령안은 천천히 눈을 감아 눈 속의 씁쓸함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고삐를 잡고 말 등에 올라탔다.
"서 아저씨, 갈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편지를 보내 주세요."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호위가 바짝 따라갔다.
"큰아가씨, 잘 다녀오세요."
서 선생은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서서 월령안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월령안이 멀리 가서 그들 일행의 그림자가 완전히 어둠에 묻혔어도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근교 현성(縣城), 사람과 말 한 무리가 성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갖 고초를 겪은 모습으로, 사람도 말도 모두 지쳐 보건대 매우 초라했다.
"도련님, 내일 아침 일찍 입성할 수 있습니다."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평범한 외모의 호위가 나무줄기에 기대어 있는 비단 옷의 공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비단 옷 공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몸에 걸친 옷은 귀한 천이었지만 원래의 색깔은 찾아볼 수가 없게 해져 있었다. 나무줄기에 기대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옆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물을 준비해라. 세수하고 양치질할 것이다."
호위의 말에 비단 옷의 공자가 고개를 돌렸다. 먼지를 뒤집어써도 숨길 수 없는, 고결하고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비단 옷의 공자는 바로 강남에서 급히 변경으로 돌아가는 최일이었다.
연일 길을 재촉하다 보니 그는 지쳐 있었고 항상 맑기만 하던 눈동자도 빛을 잃었다.
"네, 도련님."
호위는 가까운 작은 강으로 가서 물을 길어 오고, 또 깨끗한 옷도 준비했다.
최일은 세안을 마치고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물기를 머금은 대로 불더미 곁에 갔다.
최일은 호위들이 하나같이 눈 그늘이 지고 기운이 없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
"너희들도 가서 쉬어라. 암위가 지켜보고 있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도련님, 저희는 힘들지 않습니다."
호위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께서는 사흘 밤낮 길을 다그쳤습니다. 저희보다 고생이 더 많으십니다."
그들은 강남에서 출발해 내내 나는 듯이 달렸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괜찮았다. 낮에만 길을 재촉하고 밤이면 그런대로 쉬었다. 하지만 사흘 전 최일은 변경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더니 갑자기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 사흘 동안 그들은 사람을 바꾸지 않고 말만 갈아탔다. 매일 휴식 시간은 두 시진을 넘지 않았다.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일고여덟 날의 노정을 사흘로 단축했다.
그들은 오는 내내 지칠 대로 지쳤다. 또한 연일 말을 타고 질주하다 보니 허벅지가 닳아 피가 흘렀다. 말 등에 앉아 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버티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약한 선비조차 힘들다는 말이 없으니 그들은 차마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려야 했다.
다행히 내일이면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최일은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양쪽 볼은 육안으로 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수척한 것이 결코 그가 말한 것처럼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보고 싶은 사람을 위해 모든 피로와 아픔을 견뎌낼 수 있을 뿐이었다.
호위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암위와 교대하고 최일과 멀지 않은 풀밭에 드러누웠다. 얼마 안 되어 곧 잠에 빠져들었다.
최일은 불 곁에 앉아 있었다. 눈빛이 반짝거리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으며 얼굴에는 담담하지만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불빛 아래에서 본래 준수했던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출중하고 비범해 보였다.
최일은 긴 머리를 말리고서 더는 버티지 않았다. 불더미 반을 꺼 버리고 옷을 입은 채로 한쪽에 있는 나무줄기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령안, 내일 만나요!'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한밤중, 관도에서 나는 말발굽 소리가 나무숲을 뚫고 들려왔다. 암위와 호위는 동시에 놀라 잠을 깨고 경계 태세로 나무숲 밖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는 멀어지더니 점차 사라져 버렸다.
암위는 호위에게 안전하다는 손짓을 했다. 호위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누웠다.
이 과정에서 최일은 전혀 깨지 않았다.
그는 너무 피곤했다.
최일은 편히 잠들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옅지만 눈에 띄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튿날, 첫 햇살이 대지에 쏟아지며 나무숲을 뚫고 최일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한잠 푹 자고 난 최일은 기운이 넘쳤다. 눈동자에 생기가 넘쳐나 활력이 있어 보였다. 간단하게 세안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곧 품위 있는 난세의 귀공자가 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 호위가 다가와 예를 올렸다.
"도련님, 출발할 수 있습니다."
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침착하고 담담하기만 하던 그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말 등에 뛰어올랐다.
"가자!"
오는 동안 호위는 허벅지 안쪽이 닳아서 선혈이 낭자할 정도였다.
최일은 호위보다 더 심할 텐데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말에 올라타자마자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달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호위들은 쓴웃음을 짓고 빠르게 뒤를 따랐다.
최일 일행은 곧바로 변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어젯밤 들었던 말발굽 소리의 주인공이 월령안인 것을, 월령안이 그들을 이미 지나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점점 더 멀어졌다.
월령안은 변경을 떠나 곧장 무림맹으로 갔다.
* * *
그녀가 떠나간 뒤, 수많은 세도가들은 이른 아침부터 황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들은 유형무형으로 황제에게 월령안을 열흘이나 반달은 아니더라도 삼 일에서 오 일 정도만이라도 더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본래부터 최일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월령안을 며칠 더 남기려 했다. 최일이 육장봉이 없는 틈을 타 월령안과 감정을 쌓기를 바랐다.
마침 몇몇 군왕과 국공(國公)이 요청하자 황제는 기회를 보아 승낙했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황제에게 요청하러 온 군왕과 국공들은 모두 황제가 월령안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가 예상 밖으로 황제가 승낙하자 금세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황제가 그들을 남다르게 대하고, 황제의 눈에 그들이 특별한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그들이 요청하자, 황제가 월령안을 남기겠는가.
군왕과 국공들이 난각을 나서자마자, 황제가 월령안을 변경에 며칠 더 머물게 했다는 소식이 밖으로 전해졌다.
내각에서 공무를 처리하던 최 승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어제 그는 기회를 잡아 월령안이 곧 변경을 떠날 거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반응이 참 빨랐다. 그가 결코 헛수고를 하지 않게 했다.
몇몇 군왕과 국공은 황제의 어명을 받들고 월령안이 오늘 입성하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자 따로 날짜를 택하지 않고 일제히 성 밖의 명월산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직접 찾아갔으니 월령안은 그들을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일행은 정오쯤 되어 명월산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급히 달려온 최일과 마침 만났다.
"젊은 최 대인?"
군왕과 국공들은 최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강녕부에 재직 중인 거 아니었나?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여러 대인들을 뵙습니다. 소인은 명을 받고 상경하여 복명하려던 중, 명월산장을 지나다가 아직 이른 감이 있어 먼저 친구를 만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최일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대답했다. 결코 월령안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군왕과 국공들도 하나같이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들이었다.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유쾌하게 말했다.
"마침 잘됐군. 우리 같이 갈 텐가?"
최일과 같은 명문가 귀공자와 함께 가면, 품위를 위해서라도 월령안은 그들과 따지지 않을 것이다.
"소인, 명을 받겠습니다."
최일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이 몇 사람이 왜 스스로 낮추면서 먼저 월령안을 찾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월령안의 수단으로 이들이 그녀에게서 이익을 보려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때문에 그들과 함께 명월산장에 가면 월령안이 그를 상대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생각했다. 하지만 유독 월령안이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 *
"큰아가씨는 어젯밤에 떠나셨습니다."
최일은 자신이 어떻게 명월산장을 떠났는지, 어떻게 최씨 저택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 선생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일은 웃고만 싶었다.
그는 천만 가지 가능성을 예상했다. 유독 그가 왔을 때, 월령안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는 확실히 웃었다.
그는 마음속 커다란 실망을 참고 예의 바른 미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서 선생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가 군왕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저 지나가는 길에 옛 친구를 방문하였을 뿐이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아픈 나머지 누군가 그의 심장을 바싹 옥죄는 것만 같았다. 아픈 나머지 한동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들아?"
최 승상은 관아에서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흐리멍덩하고 마치 정신을 놓은 듯한 최일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까짓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인데, 어찌 이 정도일 수가 있는가.
"아버님?"
최일은 곧 정신을 차리고 감정을 다잡은 뒤 일어나 최 승상에게 예를 올렸다.
"아버님, 다녀오셨습니까?"
"듣건대 명월산장에 갔지만 령안을 보지 못했다 하더구나?"
최 승상은 최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한껏 찌푸렸던 눈살이 다소 풀어졌다.
'괜찮네. 남 앞에서 티 내지 않는군.'
"령안이 일이 있어 어젯밤에 떠났다고 합니다."
거대한 상실감을 가라앉힌 뒤, 최일은 이미 넓게 생각하기로 했다.
"듣기로는 네가 사흘 밤낮 동안 길을 재촉했다더구나. 결국 서둘러 돌아왔는데도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실망하지 않느냐?"
최 승상은 상석에 앉아 무심한 척 물었다.
최일이 월령안을 좋아해 어떻게 그녀를 추구하든지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넋이 나가고 이성을 잃는 일을 한다면, 그는 아버지로서나 최씨 가문 가주로서나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경 그의 아들은 최씨 가문의 평범한 자제가 아니었다. 그의 아들은 최씨 가문과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최일은 고개를 저었다.
"실망했지만 아쉬움은 없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설령 월령안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