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령안, 당신한테 할 말이 있소
월령안은 궁문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득 금군이 '청해' 궁에 들어왔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탈것이 없었다. 그녀의 변경에 있는 집은 타 버린 채 아직 재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출성해야만 했다.
"돈……."
월령안은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몸에 지녔던 유일한 돈주머니를 대전에 들어갔을 때 이반반에게 상으로 주었다.
월령안은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쳤다.
"끝장이네. 정말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궁문 시위에게 말이라도 한 필 빌릴 수는 없을까?"
그녀는 어떻게 하면 시간을 절약하고 마음도 쓰지 않으며 힘도 들이지 않고 출성할 수 있을까 궁리했다.
그 와중에 흰옷 차림의 유경장이 손에 청색 양산을 들고 햇빛을 듬뿍 받으며 그녀 앞에 다가왔다.
"령안."
"경장?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월령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유경장에게서는 전에 보았던 뜻을 이루지 못한 우울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있고 여유가 넘쳤으며 비범해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궁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궁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유경장은 그녀에게 궁문 밖에서 한 시진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유 대인!"
궁문을 지키던 금위는 유경장을 보자 예를 올렸다.
"깜빡 잊을 뻔했군요. 과거에 급제한 것을 축하합니다."
월령안은 전과는 전혀 다른 정신력을 보여 주는 유경장을 보고 그를 위해 기뻐했다. 그녀는 시위의 말을 듣자 덩달아 축하의 말을 건넸다.
유경장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가볍게 대답했다.
"영영 그녀들은 당신이 변경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고 있소. 행화루에서 당신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했소. 당신…… 갈 수 있겠소?"
말이 뒤로 갈수록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행화루는 어디까지나 유곽이었다. 월령안이 그곳에 가려면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영영과 기녀들은 행화루를 집으로 여겼다. 그래서 월령안의 환영회를 집에서 해야 성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사심도 가지고 있었다.
월령안이 행화루에 가면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녀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별 불편한 건 없어요. 하지만 행화루에 가기 전에 먼저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됐어요. 우리 그냥 행화루로 가요."
진주 그들은 육장봉의 사람이었다. 조계안이 아무리 미쳐 날뛰더라도 그들을 고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외에 황제는 서역 및 전체 노정에서 그녀의 일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마치 한 쌍의 눈이 어두운 곳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사람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계안이 한번 심문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유경장은 흥겨운 표정으로 비켜서서 한 걸음 옮기더니 갑자기 말했다.
"미안하오. 당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쁜 나머지 그만 마차를 준비하는 것을 잊었다오."
월령안은 유경장의 손에 든 양산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의 거짓말을 폭로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금군에게 물었다.
"말이 있나요? 말을 좀 빌려주세요."
금군이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순시하러 나왔던 금군 대장 두위가 마침 도착했다. 그는 월령안의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명령했다.
"여봐라, 월 낭자에게 말 한 필을 가져다드리거라."
유경장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을 뻔히 뜨고 월령안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경장, 먼저 가 볼게요."
월령안은 유경장이 어떻게 가는지를 상관하지 않고 말을 타고 가 버렸다.
"좋소!"
유경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청색 종이 양산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상처가 생겼다.
"허허!"
두위는 유경장의 옆을 지나가면서 한번 웃고는 멀리 가 버렸다.
유경장은 두위의 뒷모습에 예를 올리며 한마디 했다.
"두 대장, 오늘의 일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두위는 유경장을 등지고 손을 내저었다.
감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가 육장봉에게 알려 줄 것이니까.
* * *
유경장은 월령안을 속이지 않았다. 영영을 비롯한 몇몇 낭자들은 확실히 행화루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월령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월령안이 꼭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작은 기대를 가지고 유경장을 보내 사람을 청한 것뿐이었다.
때문에 월령안이 나타나자 영영과 기녀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를 안고 울고 웃으면서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갔다고, 모질다고 나무랐다. 떠나간 지 반년이 지나도록 어떤 소식도 전하지 않다니, 너무 잔인하다고 했다.
특히 청주의 일이 전해지자 그녀들은 너무나도 걱정되었다. 월령안이 청주에서 잘못될까 봐 늘 마음을 졸였다.
월령안은 인내심 있게 영영과 기녀들을 달랬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연신 맹세했다. 그리고 서역에서 그녀들을 위해 고른 선물을 내놓고 나서야 겨우 달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선물에 정신이 팔리고 나서야 더는 그녀를 양심이 없다고 원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 줄 거예요. 다음번에 또 이러면 우리 자매들은 무정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영영과 기녀들은 월령안을 걱정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서역에서 자신들을 위해 특별히 선물을 골랐다는 것을 알고는 저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월령안이 그녀들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월령안도 영영 그녀들이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역시 기뻐했다.
"걱정하지 마. 이게 마지막이야. 다음에 변경을 떠날 때는 꼭 사전에 알려 줄 거야. 너희들이 걱정하지 않게 틈이 나는 대로 편지도 쓸게."
영영의 말은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짬을 내어 공부 조선소에 찾아가서 뇌 선생 그들과 만나 상선 주문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해상 장사는 계륵과 같이 먹자니 맛없고, 버리자니 아까웠다.
설령 큰돈을 벌지 못해도 범씨 가문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나름 괜찮은 장사였다.
* * *
유경장은 걸어서 행화루로 돌아갔다.
두위는 금위에게 유경장에게 말이나 마차를 준비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특별히 신신당부했다.
유경장은 꼼수가 훤히 보이게 달랑 양산 하나만 가지고 월 낭자를 모시러 왔다. 결국 자업자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유경장도 금군에게 말이나 마차를 빌지 않았다.
설령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대재자 유경장으로 뼛속에는 오기가 서려 있었다.
유경장은 빨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행화루에 다다랐을 때, 영영 그녀들은 이미 월령안을 배웅하고 있었다.
유경장은 당황했다.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이오?"
그는 아직도 월령안에게 할 말이 많았다.
"시간이 늦었어요. 저는 또 출성까지 해야 하니까요."
월령안은 유경장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영영은 유경장을 흘끔 쳐다보고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령안이 돌아왔잖아요. 앞으로 만날 시간이 수두룩해요. 오늘에 도착했고 오는 내내 길을 다그치느라 힘들 거예요. 오늘은 령안이 일찍 돌아가서 쉬게 하세요."
유경장은 월령안의 피곤한 얼굴빛을 보고는 몰래 번뇌에 빠졌다.
"내가 바래다주겠소."
월령안은 거절하고 곧장 가려 했다.
"아니에요. 말을 타고 가면 빨라요."
유경장은 한 걸음 막아 나서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령안, 당신한테 할 말이 있소. 영영, 너희들은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으면 좋겠어. 령안과 단둘이 몇 마디 하고 싶어."
그는 오늘 발생한 일과 월령안의 태도를 보면서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오늘 입을 열지 않으면, 월령안에게 마음속 말을 들려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이튿날, 유경장은 발령장을 보고서 그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월령안을 가로막고서 마음속 말을 다 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경장, 이러지 마세요……."
영영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유경장이 엄숙하게 중단시켰다.
영영은 눈시울을 붉히고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면서 자리를 떴다. 다른 아가씨들은 이 모습을 보고 유경장을 노려보고는 재빨리 쫓아갔다.
"말씀하세요."
월령안은 영영의 반응을 보고 이미 유경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경장이 기어코 말하려 하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일은 해 보지 않으면 단념하지 못하는 것이다.
"령안, 당신이 범씨 가문과 십 년 쟁탈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당신…… 당신, 딱 그 십 년만 기다려줄 수 있소? 십 년 뒤, 내가 승상의 자리에 앉게 되면, 그때 당신이 나에게 시집오면,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거요. 안 되겠소?"
유경장은 지금 시간, 장소, 분위기가 모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안 돼요."
월령안은 유경장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고 시원하게 거절했다.
"그럼…… 그냥 기회만이라도 주면 안 되오?"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면 안 된단 말인가.
"안 돼요."
월령안은 확고한 태도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육장봉 때문이오?"
유경장은 결코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설령 육장봉이 없어도 저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처음부터 태도가 분명했다. 단 한 번도 유경장에게 희망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기왕 유경장이 물은 김에, 그녀는 개의치 않고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우선 저는 당신에게 남녀로서의 감정이 없어요. 설령 제가 당신에게 감정이 있다고 한들 어쩌겠어요? 십 년 뒤에, 저는 죽든지 아니면 월씨 가문을 이어받아야 해요. 죽으면 따로 말할 거 없어요. 만약 제가 살아 있다면 그때는 월씨 가문 가주예요. 월씨 가문 가주로서 제가 왜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성을 따르고 그 남자의 예속물이 되겠어요?"
십 년? 그녀가 설령 그와 잘해 보려는 마음이 있다 해도 그가 보호해 주기를 십 년이나 기다릴 수 없었다.
십 년 뒤의 그녀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
아니, 지금도 그녀는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깨 나란히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설령 육장봉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니었다.
유경장은 급히 변명했다.
"령안. 내 말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니라……."
"저는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물어봤으니 대답했을 뿐이에요. 저는 당신을 원치도 않고 승낙하지도 않을 거예요. 가능성도 전혀 없어요."
월령안은 조금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깔끔하게 거절했다.
유경장은 한 걸음 비틀거리더니 낙담하며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그렇게 형편없소? 너무 형편없어서 당신이 나에게 어떤 희망도 주고 싶지 않을 정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