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화 괜찮아요
그가 월령안을 버려두고, 그녀 홀로 변경에 돌아가 황제의 비난을 마주하게 한 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었다.
그 변명을 생각할 시간에 어떻게 북요를 멸망시킬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았다.
"좋아요!"
월령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마음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니 그녀도 속이 내려갔다.
바꾸어서 만약 노인한테 일이 생기면 그녀 역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육장봉을 버리고 달려갈 것이다.
"폐하 앞에서 참을 필요가 없소. 내가 그대의 뒤에 있소."
그래도 자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육장봉은 전에 월령안에게 황제와 맞서지 말라고 권하던 데서 태도를 바꿔 그녀에게 참지 말라고 했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이러지 마세요. 당신은 저에게 빚진 게 없어요. 저도 어린애가 아니에요."
"빚졌지! 당신에게 나를 빚졌잖소!"
그는 월령안과 약속하고, 금세 약속을 어겼다. 사정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결국 그녀에게 빚진 것이었다.
"그럼, 당신이 북요에서 돌아오거든 배상으로 당신을 저에게 주세요."
월령안이 농담하듯 말했다.
육장봉은 성의 없이 대충 대답하지 않고 정중하게 약속했다.
"내가 북요를 함락시키면 꼭 배상으로 나를 당신에게 줄 거요."
월령안은 멍해져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육장봉을 떠나라고 독촉했다.
어쨌든 헤어져야 하니까.
"가겠소."
육장봉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는 월령안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울적함을 느꼈다.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매일을 어떻게 월령안을 달래야 할지 궁리했다. 어젯밤에는 더구나 한숨도 못 자고 그녀를 밤새워 지켰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니면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라는 말인가.
이는 정말 사람을 좌절하게 했다.
육장봉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어서 떠나라고 재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옛날, 그녀가 겪었을 좌절은 이보다 훨씬 컸으리라. 육장봉은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안고 귀염을 데리고 북요로 향했다.
* * *
북요로 가는 동안 육장봉은 마냥 저기압이었다. 길을 재촉할 수 있으면 절대 쉬지 않았다. 뒤따라가는 병사들은 하마터면 길에서 지쳐 죽을 뻔했다.
귀염은 더욱 비참했다.
귀염은 육장봉 일행과 함께 이십여 일 동안 걸어 다녔다. 진흙 속에서 파내 온 것처럼 온몸에서 냄새가 나고 전체적으로 기운이 없어졌으며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정도였다.
처음에 그녀는 그래도 육장봉을 위협할 힘이 있었다. 그에게 자신을 잘 보살펴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북요에 가서 현음 공주를 괴롭히겠다고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귀염은 욕할 힘이 없었다. 하소연하면서 육장봉더러 숨이라도 좀 고르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어떤 방법과 수단에도 흔들림 없이 계속 길만 재촉했다.
그들은 가까스로 북요 국경에 도착했다. 북요 황제가 사람을 보내 마중했다. 귀염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요 사람이 왔는데 육장봉이 설마 여전히 이렇게 전력으로 길을 재촉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육장봉은 북요인들에게 전혀 체면을 세워 주지 않았다. 북요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길을 재촉했다. 설령 야외에서 잠을 자게 되더라도 휴식을 위해 머물지는 않았다.
귀염은 물론 북요인들에게 구원을 청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육장봉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접촉하러 온 북요인들이 그의 명령에 불만이 있으면 결투로 해결했다.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부족하면, 열, 백……을 죽였다. 결국 북요에서 교섭하러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싸움에서 진 수탉처럼 풀이 죽고 말았다.
그들은 올 때, 하나같이 암암리에 육장봉에게 본때를 보여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막상 와서는 육장봉에게 얻어맞기만 하다 보니 본때를 보여 주기는 고사하고 다들 피해 다니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북요인들은 물론 현음 공주로 육장봉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너희들이 가당키나 하느냐?"
이 한마디에 북요인들은 하마터면 기가 막혀 죽을 뻔했다.
그들은 확실히 그럴 자격이 없었다.
현음 공주는 그들이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협해도 소용없고 말싸움도 안 되고, 몸싸움은 더 안 되자, 북요인들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을 택했다. 육장봉이 길을 재촉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무튼 성경(聖京 - 북요 수도)에 가면 누군가 그를 손볼 것이다.
북요 황제가 파견한 사람들은 이런 마음으로 육장봉이 길을 재촉하는 것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일행과 암암리에 누가 더 강한지 기 싸움을 했다. 이렇게 되자 귀염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성경에 도착했을 때, 귀염은 마치 죽은 개처럼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주나라와 반목할 위험을 감수하고 현음 공주로 귀염을 맞바꾸려 했던 북요 황제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요란하게 궁정 연회를 차려 육장봉을 환영함으로써 육장봉이 성경에 온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허!"
육장봉은 초청장을 받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속대로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북요는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그와 철천지원수였다. 이 연회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 북요로 왔을 때부터 그는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다.
* * *
육장봉이 북요에 도착했을 무렵, 월령안도 변경에 이르렀다.
무뢰국에서는 북요 보다 주나라의 변경이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월령안은 육장봉처럼 무작정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달팽이처럼 꼬물꼬물 움직였다. 특히 앞의 노정은 반나절을 가면, 반나절을 쉬었다.
날씨가 더운 탓에, 몸이 약한 그녀는 길을 재촉할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진주는 일찍이 그녀를 따라 서역의 황량한 사막에서 밤낮으로 길을 재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러는 월령안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님의 이 말을 누가 믿을까?'
진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에게 월령안의 말을 최우선으로 들으라고 분부했다.
이틀 동안 길을 재촉하고 월령안은 또 하루를 쉬기로 했다. 이유는 역시 피로 때문이었다. 그녀는 급히 길을 재촉하다 보면 병으로 드러누울 수도 있다고 했다.
월령안이 밤낮을 다그쳐 홀로 설용국까지 갔던 것을 알고 있던 진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가는 동안 마님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럼 그는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되었다.
황제의 불만에 대해서는, 육장봉이 이미 상주서를 올려 잘못을 인정했다. 육장봉이 모든 잘못을 떠안았으니 생각건대 아마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월령안은 가는 내내 담담하고 여유 있었으며 전혀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진주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걱정하던 마음을 점차 내려놓게 되었다.
월령안이 이렇게 침착한 것을 보니 단연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문 입구에는 살기등등하고 분명 상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금위군들이 두 열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주는 이를 보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 * *
황제는 월령안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군을 파견해 황궁으로 불렀다.
물론 이 '부름'은 간단하고 거칠어 월령안에게 거절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당신들……."
월령안은 오는 내내 담담하고 전혀 급한 기색을 띠지 않았다.
진주는 그녀가 모든 것을 미리 대처해 둔 것으로 여겨 경계심도 반은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변경에 이르자마자 금군이 와서 사람을 요구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본능적으로 저지하려 하자 월령안이 막았다.
"괜찮아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군은 냉랭한 얼굴로 진주 등을 가로막았다.
"진 교위(校尉), 당신들도…… 우리와 함께 가야겠네."
진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월 낭자가 말하는 괜찮다는 건가?'
"저는 제가 괜찮다고 말한 거예요. 당신들이야…… 당신들이 서역에서 무엇을 했는지 저야 모르죠. 당신들에게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가 어찌 알겠어요. 맞다. 당신들 그 병기들은 어떻게 처리했어요?"
월령안은 이 문제가 줄곧 궁금했었다.
진주 그들은 그 무기들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역 그쪽에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건…… 장군께서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진주는 난처해하며 말하고는 감히 월령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월령안은 웃으며 말했다.
"장군께서 말하지 못하게 했나요, 아니면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나요?"
진주는 막막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비록 월령안을 따라다니지만, 여전히 육장봉의 사람이었다.
육장봉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것은 그의 마지막 보루였다.
월령안은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리 모두 남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난감하게 하지 않을게요."
역시 육장봉이 진주더러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월 낭자께서 이해해 주시니 무척 감사합니다."
진주는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다.
'월 낭자는 참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다음 순간, 진주는 뒤통수를 맞았다.
"다음번에 당신네 장군을 만나면 이를 거예요. 장군이 없을 때, 당신은 항상 저를 월 낭자라고 부른다고요."
진주는 입이 딱 벌어졌다.
"월 낭자, 이거 정말…… 그럴 필요는 없잖습니까."
'방금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습니까?'
육삼은 월령안이 사람이 예쁠 뿐만 아니라 마음씨가 곱고 대범하며, 돈이 많으면서도 사람을 잘 이해해 준다고 했었다.
'설마, 지금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전 기억력이 아주 좋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월령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주가 재빨리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우리더러 함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병기들을 우호(尤虎)에게 팔고 오 년에 나누어 값을 지불하게 한 사실을 낭자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 년에 나누어 값을 지불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녀가 관성에서 집을 팔 때,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 아닌가.
육장봉은 정말 융통성 있게 잘 활용했다.
"당신네 장군의 두뇌 회전은 역시나 빠르네요."
진주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암암리에 금군에게 손짓했다.
'뭘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어?
월 낭자를 '청'하러 왔잖아. 얼른 사람을 데려가지 않고?'
금군은 진주에게 눈을 흘기고는 앞으로 다가가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월 낭자, 폐하께서 아직도 궁전에서 기다리십니다."
월령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보고 한마디 했다.
"말은요?"
금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와서 사람을 '청'하는데, 어찌 말이 필요하겠는가.
'월 낭자는 혹시 금군이 사람을 '청'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폐하께서 궁전에서 저를 기다리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말이 제일 빠르죠. 물론 당신들이 시간이 급하지 않고 폐하를 기다리시게 해도 괜찮다면 마차를 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