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3화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귀염이 가지고 있는 암황령은 암부를 호령할 수 있는 암황령이 아니었다. 그 암황령은 단지 염 황숙의 신분만 대표했다. 영패의 뒷면에는 '염'자가 있었다.
육장봉이 조사해 본 바로는 진짜였다.
"염 황숙께서 누란 여왕에게 드린 것이오."
"영감님이 누란 여왕에게 줬다고요? 이십 년 전에?"
월령안은 놀라서 입 모양이 동그랗게 되었다. 그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는 분명 사연이 있을 거야! 얼른 말해!'
육장봉은 퉁명스럽게 월령안을 흘겨보았다.
"당신 생각에는 염 황숙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놀릴 기회를 주었을 것 같소?"
월령안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영감님은 약아빠졌는데 어찌 다른 말을 했겠어?'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염이 비록 염 황숙의 딸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염 황숙의 영패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할지……."
"대장군, 긴급 상황입니다!"
진주가 다급히 들어와 육장봉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두터운 서신을 건넸다.
육장봉이 서신을 받고 펼치니 옥패가 '탁' 하고 떨어졌다.
"어머니의 옥이잖아?"
육장봉은 옥을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월령안도 순간 긴장했다. 그녀는 육장봉을 바라보며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쓰셨나요?"
육장봉은 빠른 속도로 훑어보고 나서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께…… 일이 생기셨소! 북요 황제가 나에게 귀염을 우리 어머니와 바꾸자고 하고 있소!"
"북요 황제가요?"
월령안은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귀염은 염명경 귀시의 소주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북요와 엮이게 되었지? 심지어 북요 황제가 육장봉의 원한을 살 위험도 무릅쓰고 육장봉의 어머니를 가지고 사람을 풀라고 협박하게 만든 거지? 귀염은 도대체 무슨 인물이야?'
육장봉의 어머니인 현음 장공주는 강자였다.
그녀는 북요에서 활동한 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 이전에 북요가 강하고 주나라가 약할 때도 일이 생긴 적이 없었다.
지금 주나라가 강한 기세로 일약했고 북요는 분명 약해졌다. 북요 황제로서는 현음 장공주를 높이 모셔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북요 황제가 주나라와의 전쟁 위험도 무릅쓰고 현음 장공주로 귀염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다면 귀염은 도대체 무슨 신분일까.
육장봉도 이 문제가 무척 궁금했다.
"귀염을 데려오거라!"
귀염은 줄곧 대완국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진주는 금방 사람을 데려왔다.
월령안은 귀염이 혹시라도 노인의 딸일 가능성을 감안해, 특별히 수하의 사람들에게 의외의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녀를 잘 보살피라고 분부했다.
때문에 귀염은 반달 넘어 감옥에 갇혀 있었어도 얼굴빛이 괜찮아 보였다.
"넌 도대체 누구냐?"
월령안은 귀염을 아래위로 곰곰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나라 사람의 바탕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귀염의 얼굴은 너무나 독특했다. 월령안은 그녀의 얼굴에서 전혀 낯익은 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왜? 그 노친네가 날 인정하지 않아?"
귀염은 전과 다름없이 거만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밥은 아무거나 먹어도, 아버지는 함부로 부르면 안 되지. 너 이 사람 저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고 다니는 거 네 어머니는 알아?"
월령안은 그녀가 노인의 딸이 아닌 것을 알고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고작 누란 여왕 정도로는 염 황숙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어."
귀염은 월령안과 육장봉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보아하니 그 노친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럼 어쩔 건데? 그래도 너희들은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할 거잖아."
귀염은 손발에 모두 족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거만한 자세로 한쪽에 앉았다.
"북요의 경고를 받았느냐?"
"너 일부러 염 황숙을 내세워 시간을 끌려는 거지!"
월령안은 화가 나서 웃었다.
귀염…… 아니, 염명경 귀시는 역시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약점이 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 바보는 아니군."
귀염은 득의양양해서 웃으며 진주에게 턱을 쳐들어 보였다.
"물 한 잔 따라 줘!"
"염명경 귀시와 북요는 무슨 연관이 있지?"
월령안은 뇌리에 뭔가 번뜩 떠올랐다.
"아니면 한마디 더 묻지. 네 어머니와 북요는 무슨 연관이 있어?"
"너……."
'어떻게 알았어?'
귀염은 즉각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녀 얼굴의 당황함과 놀라움만 확인하고도 월령안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알아챘다.
"보아하니 염명경 귀시와 북요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와 북요도 모두 보통 관계가 아닌 것 같구나."
육장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북요 황제의 한 비(妃)가 아이까지 있으나 그의 예쁨을 받지 못해 아이와 함께 냉궁(冷宮)에 굳혀 있지. 누구도 묻지 않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냉궁의 비라…… 오, 그런 일이었구나."
육장봉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자 월령안은 금세 알아차렸다.
"북요 황제가 네 어머니를 보호하느라 무척이나 공을 들였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귀염은 저도 모르게 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갈라 터진 입술을 핥으며 양쪽에 늘어뜨린 양손을 가만히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속사정이 월령안에 의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 별로였다.
"네 어머니는 필시 미인이겠지. 하지만 북요 황제가 이렇게 공을 들여 보호하는 것을 보면 미모만으로는 안 될 거야. 물론 전 누란 여왕의 신분만이라도 안 될 거고."
월령안은 쉬엄쉬엄 귀염의 긴장된 표정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너는 염명경 귀시의 소주(少主)이고, 네 어머니는…… 분명 염명경 귀시에서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겠지. 염 소주, 내 말이 맞나?"
"네가 알아맞혔으면 또 어쩔 건데? 너희들은 여전히…… 나를 건드리지 못하잖아!"
귀염은 온몸이 긴장되어 더욱 뻣뻣해졌다. 두손은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대면하자마자 월령안이 자신의 배경을 거의 비슷하게 알아맞힐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일 뿐이야."
현음 장공주라는 이 패를 북요는 이번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육장봉은 이제 더는 북요에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염 소주를 데려가서 잘 보살피세요. 진주, 알겠어요?"
월령안은 마지막 말끝을 길게 끌었다. 왠지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귀염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월령안, 너 함부로 하지 마!"
월령안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어 진주더러 사람을 데려가게 했다.
귀염은 좋은 어머니가 있었다. 현음 장공주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녀에게 어떤 사고가 나서도 안 되었다.
월령안이 먼저 물었다.
"언제 출발하세요?"
하루라도 늦으면 현음 장공주는 그만큼 더 위험해질 것이다. 육장봉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녀는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같이 갑시다."
북요로 가려면 그도 시간을 들여 작전을 짜야 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미안하오. 함께 변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구먼."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결국 월령안은 홀로 돌아가 황제의 노여움에 직면해야 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현음 장공주 마마의 안위가 더 중요하죠."
상관없다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보호하겠다던 사람이 지금 그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불만도 드러낼 수 없었다.
현음 장공주의 안위에 비하면, 그녀가 황제에게 불려가 문책당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음."
육장봉은 월령안을 흘끔 바라보더니 입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결국 가벼운 대답뿐이었다.
이럴 때는 어떤 말도 쓸데없었다.
"먼저 가서 일을 볼게요."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이라도 해 자신의 어짊과 자상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육장봉에게 버려진 쪽으로서 그녀는 그를 달래줄 의무가 없었다.
"같이 가시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덩달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태가 급변해 그는 월령안과 함께 변경에 돌아갈 수 없었다. 황제를 직접 상대하지 못하기에 많은 일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황제가 모든 분노를 월령안에게 쏟아내지 못하도록, 그는 더욱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두 사람은 선청을 나와 건널목에서 멈춰 섰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봤다.
"먼저 갈게요."
"좋소!"
육장봉은 제자리에서 서서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진주는 그의 뒤에 서서 묵묵히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아름다운 영웅과 미인의 미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육장봉이 약속을 어기고 월령안은 혼자 변경으로 돌아가 황제의 분노에 직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다만 월령안이 생각을 넓게 가지고 육장봉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대완국에 남아 있는 마지막 날까지, 월령안은 물을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다 보니 육장봉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날, 월령안이나 육장봉이나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내다가 한밤중에야 겨우 일을 끝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은 동시에 처소로 돌아가다가 건널목에서 마주쳤다.
육장봉은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월령안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먼저 물었다.
"하루를 더 머물겠소?"
"아니에요!"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현음 장공주께서는 북요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위태로워져요. 하루빨리 그분을 데려와야 마음을 놓을 수 있죠."
하루를 더 있어도 서역의 일을 끝낼 수가 없었다.
조만간 변경에 돌아가 황제와 대면해야 했다. 그녀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월씨 가문의 가주였다. 그녀는 연약해서도 안 되고, 무슨 일이든 남에게 기대서도 안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말했다.
"월씨 가문에서 태어나면 부모, 형제조차 기댈 수 없다. 또 누구에게 기댈 수 있겠느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그녀는 육장봉이 어제 한 말을 잊을 것이다.
육장봉은 그녀를 위해 세상 사람들의 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장봉을 위해 세상 사람들의 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이틀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 서역에서의 계획에 대해서도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육장봉도 묻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이 도박성이 있고 담이 크지만 일개 가문 가주로서의 책임감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월씨 가문 상사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함부로 하지 않으면 황제 쪽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두 사람은 대완국에서 출발해 줄곧 동쪽으로 가다가 무뢰국 국경에서 헤어졌다.
육장봉은 귀염을 이끌고 북요 방향으로 가야 했다. 월령안은 관문으로 걸어가서 주나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헤어지면서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간단하게 몇 마디만 당부했다.
"진주가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시오. 십이가 변경에 있소. 일이 생기면 십이를 찾아가오. 폐하께서 십이의 신분을 아시니 십이를 어쩌지는 않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