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화 도망쳐서 해결될 일은 없다
"흉내를…… 아주 비슷하게 내시네요."
월령안은 복잡한 얼굴로 육일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꾼이 되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네요."
"마님, 칭찬 감사합니다. 나중에 장군과 마님께서 소인이 필요없다 하신다면 가서 이야기꾼을 하면 되겠군요."
육일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는 또 손에 든 서신을 건넸다.
"마님, 마님의 편지입니다."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편지를 받고는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당신의 호위병은 당신을 쏙 닮았네요."
'똑같이 낯짝이 두껍다니까.'
"난 아주 영광으로 생각하오."
육장봉의 기분이 확 좋아졌다.
황숙이 편지에 쓴 것이 그가 보고 싶은 내용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도망쳐서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월령안은 노인의 서신을 열고 싶지 않았고 노인이 뭘 썼는지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열지만 않고 보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이미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녀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도 염치가 있다고! 멍청한 척하는 짓은 여덟 살 이후로는 하지 않는다고!'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서신을 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노인은 편지에 네 글자만 써 놓았다.
오지 마라!
네 글자는 커다란 한 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글자마다 힘이 넘치고 예리한 붓끝이 종이를 꿰뚫고 눈에 들어왔다.
글자를 보면 사람을 아는 법.
노인은 이 날카롭고 기운 넘치는 네 글자로 월령안에게 그는 아주 잘 있으니 그를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 주었다.
이 글을 본 월령안은 비록 약간 서운했으나 그래도 기뻤다.
월령안은 이 글이 대필이 아니라 노인이 직접 쓴 글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 네 글자에서 그녀는 노인이 글을 쓸 때, 기운이 아주 넘치며 기분도 좋았다는 것을 보아 낼 수 있었다.
월령안은 속으로 기뻤으나 입으로는 짐짓 투덜거렸다.
"영감님은 왜 이렇게 꿍꿍이가 많대요? 정말 너무 얄미워요! 제가 돌아간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착각하기는!"
육장봉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숙께서는…… 당신을 잘 아시오."
'국면을 더 잘 아시지.'
월령안이 금나라에서 한 일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주나라의 암황을 속일 수 없었고 황제를 속일 수 없었다.
월령안이 지금 변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황제로 하여금 월씨 가문 사람들이 예전에 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짓이었다.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월령안이 변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주나라의 첩자가 소식을 알아낼 수 없는 먼 곳에 가서 황제가 월령안이 금나라에서 한 일을 잊도록 시간을 버는 것이 가장 좋았다.
방금 전에 주나라에서 서역으로 파견했던 첩자가 전부 돌아오지 않았다고 육일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 시기에 월령안이 가기에 서역보다 더 적당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월령안이 중독된 독약은 서역에만 해독약이 있었다.
월령안이 노인을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노인도 월령안을 걱정했다.
월령안이 중독된 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이 아는 일은 노인도 꼭 알고 있었다.
주나라의 정보 체계를 세운 전임 암황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노인이 말하지 않은 것은 월령안이 그가 알기를 원하지 않으니 모르는 척하는 것일 뿐이었다.
노인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월령안은 줄곧 변경으로 돌아가 노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 이번에 금나라에서 돌아오자 월령안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월령안이 뛰는 사람이라면 노인은 나는 사람이었다. 월령안이 무슨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노인은 그 불씨를 꺼버렸다.
월령안은 노인이 자기를 위해서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노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노인의 말을 듣는 것밖에 또 뭘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뜻은 육장봉이 바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금방 금나라에서 돌아온 것이다 보니 많은 일을 인계하지 못했다. 그는 변경에 들어가 황제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 해도 아무 일도 상관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릴 수 없었다.
육장봉은 이틀 동안 금나라의 일을 모두 마무리한 뒤, 육일더러 육십이를 데리고 입성하여 복명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얼마 전에 변경에서 돌아온 육일은 또다시 입성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육십이는 불만이 있었다!
육십이는 펄쩍 뛰며 말했다.
"대장군, 저는……."
그러나 육장봉은 육십이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난 네가 변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소원을 이루어 주겠으니."
육십이는 덜덜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자신을 위해 말했다.
"대장군, 전 그러고 싶지 않아……."
그는 독자적으로 일을 맡고 싶지 않았고 육씨 가문을 떠받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대장군의 호위병이 되고 싶었다.
"넌 그러고 싶어야 한다!"
육장봉은 강경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육십이게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장군……."
육십이는 두 눈을 붉히며 서럽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자신의 염원을 억지로 저한테 덮어씌우지 마세요. 전 장군께서 절 생각하셔서 그러신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장군께서 절 생각하셔서 안배하신 일은 제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에요!"
"허!"
육장봉은 냉소를 지었다.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싶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육십이, 군인의 천직은 복종이다. 너의 염원, 네가 가고 싶은 길은 나한테 다 중요하지 않다. 너는 그저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
"전……."
육십이는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한 글자도 말하지 못했다.
육장봉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나에게 싫다고 말하고 싶다면 내 머리 꼭대기에 기어오르고 나서 말하거라."
'내가 요즘 너무 인자했나?
육십이가 나한테 대들 정도로 인자했던가?'
"네, 대장군!"
육십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풀이 죽었다.
수하로서 그는 반드시 대장군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대장군의 말을 거역하려면 대장군의 상전이 되어야 했다.
대장군이 그더러 하라는 일은 바로 대장군을 대신하여 군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너무 비참했다!
육십이는 한껏 내키지 않는 얼굴로 육일을 따라 변경으로 돌아갔다.
떠나는 날, 육십이는 홀로 월령안을 찾아와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는 가기 전에 육장봉 앞에서 월령안을 안기까지 했다.
"월 누님, 열 달 뒤, 전 주나라에서 누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릴게요! 그때가 되면 전 누님께 지금과는 다른 육십이를 보여 드릴게요!"
말을 마친 육십이는 육장봉에게 자기를 '혼낼' 기회를 주지 않고 도망치듯 말에 뛰어올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달려갔다.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장면은 왜 이렇게 눈에 익지? 육십이는 아로한을 본받아서 날 도발하는 것인가?'
육일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일을 저지를 거면서 나한테 미리 말하지도 않고. 날 여기에 내버려 두고 가 버리다니. 지금 이게 무슨 뜻이야?'
"풉……."
육삼, 육사, 육오는 옆에 서서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감히 육장봉을 바라보지 못했다.
월령안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육장봉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겨우 아로한의 일을 잊었는데 육십이 이 녀석이 일부러 그 일을 꺼내다니. 지금 내가 너무 한가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육십이 이놈!"
'기다려라. 다음에 만났을 때, 내가 육십이 그 녀석 머리털을 뽑지 않는다면 내가 성을 갈고 말 테다!'
육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지고 육삼 등 몇몇이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본 육일은 기회를 틈타 도망치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는 지금 떠나기 싫어졌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일은 좀 재미있게 느껴졌다.
제대로 묻지 않고 떠난다면 몹시 괴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육일이 남고 싶어도 육장봉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육장봉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육일, 육가군이 신병을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잊지 않았겠지?"
육일은 벌떡 일어나 곧게 섰다.
"장군께 아룁니다. 소인은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끝장이다, 구경하려고 하다가 휘말리게 생겼네. 기회를 틈타 도망쳐야 했어.'
"좋다! 변경으로 돌아간 뒤, 육십이를 잘 훈련시키거라. 알겠느냐?"
육장봉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충분히 보여 주었다.
"네, 대장군!"
육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봉변을 당하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닌 육십이였군.'
말을 마친 육장봉은 웃음을 참고 있는 육삼, 육사, 육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육삼, 육사, 육오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대장군, 소인……."
"웃으려면 그냥 웃거라!"
육장봉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그들 셋과 따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반응을 보더니 따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장봉은 그렇게 화가 많이 난 것 같지가 않네. 내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거야.'
그러나 곧, 육장봉의 시선은 그녀에게 떨어졌다.
"멍하니 뭐 하는 것이오? 어서 따라오지 않고!"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변경으로 돌아가 노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로 도망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건지.
물론 도망쳐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 월령안은 순순히 육장봉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불평등한 약속을 잔뜩 허락한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육장봉을 달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월령안은 의자에 기대 꼼짝도 하기 싫었다.
"당신을 달래는 것이 장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요."
그녀는 이 이틀 동안 밤을 새 가면서 추수에게 무림맹을 창립할 계획을 세워 주었지만 육장봉을 달래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뭐요?"
귀가 영민한 육장봉은 웃는 얼굴로 월령안에게 걸어와 한 손을 의자 등받이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잘 듣지 못했으니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무엇이 힘들다 하셨소?"
육장봉의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마지막 세 글자는 화려한 끝음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연인들끼리 가장 친밀할 때 속삭이는 말 같았다.
그러나 월령안은 몸을 흠칫 떨더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입은 머리보다 반응이 빨랐다.
"당신을 달래는 것은 장사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네요."
육장봉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날 달래는 게 장사하는 것보다 재미있다면서 무림맹 그 재미없는 일은 왜 하시오?"
그가 바삐 보낸 이 이틀 동안, 월령안도 한가하게 보내지 않았다.
그가 육일과 만나는 사이, 월령안은 무림맹에 대한 계획을 완성했다. 그리고 수하를 시켜 무림맹으로 가서 수횡천을 도와 무림맹 시장을 세우게 했다.
그는 너그러운 사람이니 당연히 월령안이 수횡천과 협력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장사인데 누구랑 해도 똑같지. 그런데 월령안은 나와 협력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