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화 형제로서 의리
육장봉이 허세를 부려 국경 지역에 병마를 조금 이동시키자 금나라는 곧 물러섰다.
주나라가 국경에 병력을 증원했다. 금나라는 주나라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도리에 따라 주나라를 찾아 교섭해야 했다.
금나라는 한편으로 주나라에 국서를 건네 주나라가 이유 없이 변경 지대에 병력을 증원시키는 행위에 항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육장봉과 소통을 하려 했다. 쌍방이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회담을 가지고 오해를 풀기를 바랐다.
하지만 흘석열은 육 대장군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흘석열이 사전에 명첩을 보내든, 직접 찾아가든 육 대장군의 친위대는 모두 이 말만 되풀이했다.
"저희 대장군은 당신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흘석열이 눌러앉는 걸 쫓아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친절하게 차와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첫날, 흘석열은 별원에서 한 시진 동안 차를 세 주전자 마시고 간식 네 접시를 먹은 다음, 소피 때문에 돌아갔다.
이튿날, 흘석열은 두 시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재미가 없어서 가 버렸다.
사흗날, 흘석열은 스스로 서적과 바둑판을 지니고 왔다. 육삼과 하루 동안 바둑을 두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자발적으로 돌아갔다.
다섯째 날, 흘석열은 바둑판만 들고 왔다. 육삼과 전날 바둑을 둔 사이므로 둘은 바둑을 두면서 한담하기 시작했다.
흘석열은 박식하면서도 능변가였다. 천문지리에서 풍토와 인정, 부락 풍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야기할 수 있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가 조정으로 옮겨졌고 몇몇 황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흘석열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둘의 신분을 까맣게 잊은 채 육삼의 앞에서 세 황자에 대해 평가했다.
"우리 이황자는 용맹하고 호전적이어서 열세 살에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갔다네. 열다섯 살 되던 해, 이황자가 독수리 부락 수장의 딸을 마음에 들어 했지. 하지만 거절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가서 독수리 부락 전체를 학살했다네. 위풍당당하지 않은가? 용맹하지 않은가?"
"으음…… 네."
육삼도 속마음이 너무 깊은 편은 아니라 하마터면 수중의 바둑알을 집어 던질 뻔했다.
흘석열은 육삼을 힐끔 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삼황자는 다르지. 삼황자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둘도 없이 잘생기셨네. 그의 대비(大妃) 넷은 모두 각 대부락 수령의 딸이라네. 또한 그 대비들이 자매와 같이 사이도 좋으니 당신네 주나라의 말로 하면 미담인 셈이지.
사황자는 연약한 편이네. 어려서부터 시와 책을 좋아하고 주나라의 문화를 숭상했네. 무예를 익히기 싫어하고 싸움도 싫어하네. 사황자의 선생이 바로 당신네 주나라의 한 대유학자이던 것으로 기억되는군."
처음의 놀람이 지난 뒤, 육삼은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흘석열에게 잔을 채워 주며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물었다.
"참 우연이네요. 사황자의 선생은 어느 대유학자이신지요?"
육삼이 무심코 묻자 흘석열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잘 알지 못하네. 아마 안원(安遠) 선생이라고 하던 거 같네."
흘석열은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주나라와 금나라의 문화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육삼도 빙그레 웃으며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갔다. 곧 통금시간이 되자 흘석열도 옷자락을 툭툭 털더니 배웅이 없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육삼은 얼른 몸을 일으켜 그를 입구까지 바랬다. 다시 몸을 돌려 육사, 육오에게 한마디 분부하고는 내원(內院)으로 육장봉을 찾아갔다.
십이는 육삼을 만나자 급히 다가와 그의 길을 막았다.
"셋째 형! 월 누님을 만나면 좀 물어봐 주세요. 월 누님께서 언제 시간이 있는지. 찾아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너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테니, 네가 알아서 월 낭자를 찾아가."
육삼은 십이를 도와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형제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장군이 요 며칠 쉬면서 너무나 한가로워졌기 때문이었다.
하루 십이 시진 동안,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월 낭자가 있는 곳이면 그 옆에 꼭 대장군이 있었다.
그는 감히 대장군 앞에서 십이의 이런 말을 전할 배짱이 없었다.
육십이는 억울하고 원망에 찬 눈길로 육삼을 흘겨보았다.
"대장군이 두렵지 않았으면 제가 그냥 바로 가서 말하면 되죠. 형을 찾을 필요가 있었겠어요?"
"그럼 난 감히 말할 수 있어? 나는 뭐 대장군이 두렵지 않겠냐?"
육삼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
승낙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십이 때문에 큰 변을 당할 뻔했다.
육십이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형은 저보다 똑똑하잖아요. 대장군이 화를 안 내게 하는 방법이 있을 거야."
"정말 고맙다. 너 앞으로 나를 똑똑하다고 칭찬하지 마. 남들은 칭찬하고 단순히 이득을 바랄 때 너는 내 목숨을 바라니 내가 버틸 수가 없다."
육삼은 이미 화낼 마음도 없었다. 육십이에게 눈을 뒤집어 보이고는 뒤돌아서 가 버렸다. 더는 그와 실랑이질하지 않았다.
"셋째 형……!"
육십이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쫓아갔다.
"셋째 형, 좀 기다려! 이야기를 아직 채 못했단 말이야. 나를 도와……."
육십이가 쫓아올까 두려워 육삼은 걸음을 더욱 다그쳤다. 심지어 두어 걸음 달음박질까지 했다.
"셋째 형은 너무 형제애가 없어!"
육십이는 눈을 뻔히 뜨고 육삼이 내원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담도 작고 겁쟁이인 그는 지척에 있는 문을 바라보며 결국 그 한 발짝을 내디디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억울하게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육삼은 내원에 들어서면서 육십이가 쫓아오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걸음을 늦추고 몰래 숨을 고른 다음에야 서재로 들어가 육장봉에게 보고했다.
흘석열의 말은 암시가 분명했다. 육삼은 비록 짐작했지만 감히 제멋대로 단정 짓지 않았다. 그는 흘석열의 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육장봉 앞에서 되풀이했다.
"금나라 사황자라?"
육장봉은 나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 온 얼굴이 어둠 속에 가려진 채 오른손을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흘석열 대인이 꽤 재미있는 사람이군. 내일 그가 다시 오면, 전해라. 내가 안원 선생을 아주 좋아하니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해."
보아하니, 완안유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월령안의 안목을 믿었다.
금나라 사황자에 대해서는 일단 먼저 한번 만나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좌우지간 금나라의 차기 황제가 누구든지 그에게는 큰 영향이 없었다.
싸움을 싫어하고 시와 책을 좋아한다든가 이런 것들은 마음에 둘 필요가 없었다.
서로 다 천 년 된 여우인데 무슨 귀신 이야기를 하겠나.
황자일 때는 주나라의 문화를 숭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숭상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주나라의 문화를 숭상한다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능력이 되는 것이다.
금나라는 주나라를 침입하려는 야심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는 제왕이 바뀐다 해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나라를 침입하는 것은 금나라의 전체 이익에 부합되었다. 이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는 사황자가 야심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육삼은 보고가 끝난 뒤 육장봉이 다른 분부가 없자 물러서서 나왔다.
밖에 나갈 때, 육삼은 조용히 한번 훑어보았다. 서재 안에는 장군만 있을 뿐, 월령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육십이의 가련한 부탁을 떠올리자 그는 마음속으로 하늘마저 십이를 돕는다고 생각했다.
육삼은 그래도 어리석은 아우가 하나밖에 없으니 도울 수 있으면 돕자는 생각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서재 밖에 있는 호위에게 한마디 물었다.
"월 낭자는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마님은 서재에 있습니다. 셋째 형은 못 보셨나요?"
호위는 놀란 얼굴로 육삼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육삼은 대경실색하며 되물었다.
"서재에? 서재에는 대장군 혼자뿐이었는데?"
호위는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잊었네요. 셋째 형은 모르죠. 서재는 안팎으로 두 칸이에요. 마님은 대장군이 귀찮게 굴어 아무 일도 못 한다고 평소에 안쪽에서 사무를 처리해요. 대장군더러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절대로 괜히 들어와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육삼은 웃었다.
"그렇게 된 거구나. 알았다."
'그러니까. 어쩐지 장군께서 월 낭자를 시선 밖에 있게 내버려 둔다 했더니. 결국 천덕꾸러기가 된 거군.'
보아하니, 하늘이 십이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도 억지로 도울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육삼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 정도면 형제로서 의리는 지킬 만큼 지켰지 뭐.'
* * *
월령안은 안쪽 서재에서 대부 도박장 삼 년간의 수익 및 이 며칠간의 손실을 계산하고 있었다.
대부 도박장은 월령안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경영권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계약서에 따르면 그녀는 대부 도박장의 모든 사무를 결정할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그 주인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그동안 그녀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대부 도박장은 연이어 관병들에게 포위되고 봉쇄당해 며칠간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 명성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도박장은 명성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 않고 도박장을 차려놓고 수시로 관아에서 찾아와 조사하게 되면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하고 정성을 들여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을 것이다.
대부 도박장 배후의 주인들이 그녀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으로서 그녀는 상대방이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협력하면서 그녀는 그 몇 주인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녀에게 그래도 이 정도 체면은 있었다.
물론 월령안도 상대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안정을 되찾자마자 몇몇 주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앞으로 삼 년 동안 대부 도박장의 수익을 이 전의 삼 년보다 이 할 이상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녀는 앞으로 삼 년간 경영비용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일해 주기로 했다. 또한 수시로 대부 도박장을 회수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약속을 하여 대부 도박장의 주인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월령안은 서둘러 대부 도박장의 최근 삼 년간 모든 장부를 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