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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729)화 (729/1,004)

729화 오직 당신 손에만 질 것이오

"태후 마마……."

종실의 친왕과 흘석열은 난처해하며 태후가 냉정을 되찾을 수 있게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여인이 누군가의 설득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다른 이들이 달래거나 말릴수록 태후는 더 열을 올렸다.

특히 그녀는 자신과 금나라 황제의 비밀을 까밝힌 뒤, 종실의 친왕이나 흘석열이 모두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더욱 기가 살아났다.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그녀의 아들을 이용해서 주나라 사신을 난감하게 한 것은 물론, 아들이 주나라 사신에게 '개잡종'이라는 소리를 듣게 내버려 두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녀의 아들이 '개잡종'이면 아들의 아버지는 무엇인가. 개라는 말인가.

금나라 황제가 죽자마자 조정의 대신들은 그를 안중에 두지 않는단 말인가.

금나라 황제를 개로 생각한단 말인가.

태후는 이 말을 할 때 특별히 목소리를 크게 했다. 궁전 밖의 궁인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금나라 황제가 황궁 내에 심어 놓은 사람들도 들을 수 있었다.

승상 오림은 금나라 황제의 심복이지만 부승상 흘석열은 아니었다.

흘석열의 배후에는 각 부족의 수령들이 있었다. 금나라 황제와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이익이 불일치한 것도 사실이었다.

태후의 실없는 넋두리는 겉으로 볼 때는 자신과 완안유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는 듯했으나 사실은 흘석열을 겨냥한 것이었다.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결국 흘석열이 죽은 금나라 황제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고 힐난하는 것이었다.

흘석열은 알아들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태후가 말한 것처럼, 그는 확실히 죽은 금나라 황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태후를 기쁘게 하려고 그가 죽은 사람을 두고 겉치레를 해야 하는가.

태후가 울며불며 하소연해도 흘석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다 되자 두어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종실 친왕과 함께 자리를 떴다.

친왕은 태후 앞에서 흘석열의 체면을 봐주었다. 하지만 궁전에서 나오자마자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흘석열 대인, 주나라의 사람들이 너무 방자하군.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반드시 주나라에서 우리 완안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할 거야."

흘석열은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전하, 당시 일은……."

친왕은 차갑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흘석열의 말을 끊어 버렸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상관없네. 하지만 태후가 말했듯이 완안유의 생부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그는 어쨌든 우리 완안 가문의 자식이네. 그가 남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우리 완안 가문이 절대 가만있을 수는 없지. 나도 알고 있네. 지금 주나라와 정면충돌을 하기는 무리라는 것을. 이렇게 하게나. 주나라 사신에게 손쓴 하인을 내놓으면 이 일은 끝난 것으로 할 수 있다고 전하게."

친왕은 말을 마치고 소매를 떨치더니 자리를 떴다.

흘석열은 제자리에 서서 입가에 이상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곧이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두 사람이 멀리 가 버리자 냉궁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던 금나라 황제는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

금나라 황제는 화가 나서 욕을 퍼부었다.

"짐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나같이 역모하고 싶은 모양이군!"

곧이어 그는 또 오림의 저택으로 가서 오림이 어느 정도 다쳤는가를 알아보라고 난폭하게 분부하였다.

그가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밖에서 정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사람이어야 했다.

흘석열은 사심이 너무 많아 안 되었다.

오림은 비록 생명을 잃을 염려는 없으나 크게 다쳐 단시일 내에 정사를 주관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곧 태후가 완안유를 황궁에 불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 *

별원 안, 육장봉과 월령안은 계화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육삼의 보고를 듣고 서로 마주 보았다.

육삼은 이 모습을 보고 묵묵히 물러가면서 바깥에서 지키는 하인도 데려갔다.

육장봉은 바둑알을 놓았다. 눈에는 담담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

"역시 당신 짐작대로 금나라 황제가 결국 완안유를 쓰겠군."

"오림은 중상을 입고, 흘석열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외 세 황자는 이미 성인이 되어 실력도 갖추었고 세력도 강대하죠. 금나라 황제가 누군가를 쓰면 그는 차기 금나라 황제가 확실시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시로 금나라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죽은 척하던 것을 진짜 죽음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오직 완안유만이 가진 세력도, 기반도 없어 금나라 황제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죠. 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금나라 황제가 완안유를 쓰지 않으면 누구를 쓰겠어요?"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바둑돌을 놓았다. 그녀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대국하며 바둑판의 승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육장봉 역시 내키는 대로 바둑알을 놓았다. 그는 흰 돌을 바둑판 위에 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배후에 숨어 있으면 비록 남을 조종하는 쾌감은 있겠지만 빛을 볼 수 없고 많은 불편한 점들이 있을 거요. 이 금나라 황제는 이런 일들을 가볍게 여긴 듯하군."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 같아요."

월령안은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야 겨우 이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비록 그녀는 일찍부터 금나라 황제가 죽지 않았다고 추측했지만 그가 왜 이렇게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왠지 괜한 짓을 하여 화를 자초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육장봉이 비웃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완안유를 올려놓은 뒤에도 그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완안유도……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말이오."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아직도 금나라 황제가 왜 멀쩡한 왕도(王道)를 버리고 난세의 영웅을 따라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세의 영웅들은 어두운 곳에 숨어 남몰래 행동하며 손발을 묶이고 빛을 볼 수 없지 않았던가.

제왕으로서 그가 죽지 않은 이상, 그는 대의와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정의 대신과 황자들은 다른 마음이 있건 없건 꾹 참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몰래 숨어, 말로는 이 기회를 빌려 황자와 조정의 대신들을 관찰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의 마음은 떠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설령 정말로 충직한 신하,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운 아들이라도 황제가 죽은 뒤에는 방법을 대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스스로 제 목숨을 지키지 못하면 계속하여 충성하려고 해도 할 수 없잖는가.

신하가 이러한데 아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금나라 황제가 있을 때, 몇몇 황자들은 효도를 하고 충성을 다해 황위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금나라 황제가 죽은 다음에도 황위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육장봉은 금나라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무엇을 떠보려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보다가 모든 심복과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다 죽고 나서야 만족하려는 것인가.

월령안은 빙긋 웃으며 말을 받지 않았다. 바둑통에서 흑돌 하나를 꺼내 놓으려다 바둑판에 놓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겼나요?"

육장봉은 바둑판을 한 번 훑어봤다.

"그런 것 같소."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월령안은 왜 이렇게 놀라지?'

월령안은 뽀로통해져서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이길 수 있어요!"

육장봉은 잠자코 있었다. 왠지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단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만 같았다.

"왜 양보하지 않았어요!"

월령안은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저를 총애하고 저한테 양보한다고 했잖아요? 한 수도 양보하지 않고 바둑 한 판조차 져 주지 않다니. 이게 당신이 이야기하던 저를 총애하고 저한테 양보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한 적 있나?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알고 있었어요. 남자는 다 똑같아요! 얻고 나면 소중히 여기지 않죠."

월령안은 바둑알을 내던져 버리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아직 얻지 못했잖소."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는 그녀에게 일부러 오만한 척하는 모습도 아주 귀엽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뺨이 약간 붉어지더니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바둑도 져 주지 않으면서 제게 무엇을 원하세요?"

"내가 양보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소?"

육장봉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각기 다섯 알의 돌을 집어서 흑백 바둑통에 넣었다. 다시 흰 돌 하나를 옮겨 자발적으로 만회할 수 없는 국면을 만들었다.

"당신 차례요."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양보하려고요?"

"음. 양보하겠소! 평생 당신만 총애하고 당신한테만 양보할 거요."

육장봉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엄숙함을 띠고 있었다. 눈빛은 깊고 경박함도, 웃음기도 없이 오직 신중함뿐이었다.

계수 나무 아래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불편한 듯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장난친 거예요."

"나는 진지하오."

육장봉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손을 잡더니 바둑통에서 흑돌을 꺼내어 바둑판에 놓았다.

"이번 생에서 육장봉은 오직 당신 손에만 질 것이오."

그는 행동으로 월령안에게 자신은 평생 오로지 그녀에게만 양보하고 총애할 것임을 알려 주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그는 그녀의 손으로 자기 자신을 꺾을 수도 있었다.

기꺼이.

* * *

금나라 초년, 황위 계승은 대부분 형망제급(兄亡弟及)으로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계승했다.

하지만 형제간의 정은 부자간만 못하고, 형에 대한 존중 또한 부친에 미치지 못하므로 형제간에는 황위를 다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국가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금나라는 형망제급 제도를 폐지하고 주나라를 본받아 아들이 계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주나라와 다른 점도 있었다.

주나라에서는 적장자가 황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금나라에서는 적자, 서자 구분이 없이 모든 아들들에게 계승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중에 누가 황위에 오를지는 각자의 수단에 달려 있었다.

이 제도는 역시 황위를 다투는 것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나라 사람들은 무예와 강자를 숭상하므로 만약 기개와 수단을 드러내지 못하면 사람들의 믿음과 명망을 얻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줄곧 황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겼다. 그래야만 훌륭하고 기개 있는 계승자를 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위 다툼도 황자 사이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였다.

완안유는 대외적으로는 금나라 황제의 친동생으로, 조정에서 기반도, 세력도 없었다. 오림이 섭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최적의 꼭두각시였다.

완안유가 황궁으로 들어간 이튿날, 오림은 몸이 불편해 섭정할 수 없으니 완안유가 친왕의 신분으로 섭정하기 바란다고 상주서를 올렸다.

완안유는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오림을 위수로 하는 왕당파는 거듭 요청했다. 완안유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수락했다.

흘석열은 부승상으로서 시종일관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복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조회가 끝나고 조정의 대신들이 완안유를 에워싸고 축하할 때, 흘석열은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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