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불에 타 버린 것들
곽하는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빈 무장이었다. 슬픔이 지나간 뒤 재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그가 공주부에서 찾아낸 증거는 해주 공주의 역모 의도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 역모 의도를 대황자에게 들키자, 해주 공주는 대황자를 감금했을 뿐만 아니라, 죽여서 입을 막았다.
지금 그는 이 증거들을 가지고 황궁에 들어가 고해야 했다. 해주 공주의 죄행을 만천하에 알려야 했다.
곽하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다. 하지만 궁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곽하는 궁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완안경의 시신을 궁문 입구에 내려놓았다. 또한 해주 공주의 반란 음모를 증명할 수 있는 용포, 옥새, 서신을 시신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는 궁문 입구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꿇어앉아 있었다.
대신들은 어젯밤에 그가 군사를 이끌고 해주 공주부를 압수 수색한 것을 일찌감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뜻밖의 변고가 없으면 대신들은 틀림없이 황궁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곽하는 무릎을 그리 오래 꿇지 않아도 되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금나라의 원로대신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궁문 앞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렸다. 그들은 우선 먼저 궁문 입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곽하를 보았다. 그리고 화려한 용포, 용포 옆 서신 및 옥새도 보았다. 맨 나중에 본 것은 완안경의 시신이었다.
잇달아 도착한 대신들은 가마에서 내려 이 광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이 굳어졌다.
멀쩡하던 대황자가 어찌 공주부에서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혼란에 빠질 조짐이었다.
금나라 황제가 승하한 뒤, 잠시 정사를 책임진 사람은 금나라 승상 오림(烏林)이었다.
그는 제일 늦게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곽하 옆에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곽씨, 무슨 일이 있으면 궁전에 들어가 다시 상의합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조정에서 반드시 철저히 수사할 것입니다. 대황자 전하께서 억울하게 가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림은 금나라 황제의 심복이었다. 어젯밤 그는 곽하가 해주 공주부에서 용포와 옥새를 찾아낸 일을 보고받았고, 이 사실을 최대한 빠르게 숨어서 치료 중인 금나라 황제에게 전했다.
분노한 금나라 황제는 오림에게 아무리 무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잡아들이고 놓아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림은 금나라 황제의 답신을 보자마자 해주 공주가 끝장났음을 알았다.
금나라 황제에게 있어서 해주 공주는 그의 딸로서 포악하든, 방자하든, 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만, 유독 그의 황위를 넘봐서는 안 되었다.
해주 공주는 이제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죽지 않더라도 반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다.
"오림 대인, 제발…… 대황자 전하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사나이는 눈물이 있어도 쉽게 흘리지 않는다. 다만 슬퍼할 때가 되지 않았을 뿐.
곽하도 오림을 괴롭히지 않고 그가 부축하자 일어섰다. 눈물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대황자 전하께서는 해주 공주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발견하고 공모하지 않으려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곽하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고통스럽게 가슴을 쳤다.
"오림 대인, 대황자 전하께서는 폐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곽하는 반 시진 넘게 무릎을 꿇으면서 이미 냉정해졌다.
그는 대황자의 죽음도, 해주 공주부의 용포, 옥새도 모두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인가 이용당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 이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대황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남에게 이용당한 것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해주 공주가 역모를 모의한 것으로 모는 것이었다. 대황자가 이 사실을 알고 해주 공주에게 동조하지 않으려다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도 대황자의 죽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황자의 외삼촌일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대장군이었다. 그에게는 가족과 수하 부지기수의 추종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 수하의 병마를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내가 반드시……."
펑……!
오림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황궁 동남쪽 구석에서 갑자기 불빛이 솟구쳤다.
오림은 멍해 있다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그의 옆에 있던 젊은 관리가 소리쳤다.
"저기는…… 폐하의 빈소입니다."
"어서! 궁문을 열어라. 당장 들어가야겠다."
오림은 황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살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흑의인 무리들은 사전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궁문이 열리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뛰쳐나와 궁문 입구로 돌진했다.
"자객이다!"
"대인들을 보호하라!"
"이건 무슨 냄새야……."
"조심해……!"
궁문을 지키던 시위는 반응이 매우 빨랐다. 가장 빠른 시간에 칼을 빼 들고 관리들을 등 뒤로 보내 보호했다.
그러나 흑의인들은 시위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흑의인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몸에 지녔던 화절자(火折子 - 옛 등불)를 꺼내 자기 몸에 불을 달았다.
쾅!
흑의인들은 몸에 무엇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불꽃이 몸에 떨어지자마자 불길이 거세게 솟구치면서 활활 타오르더니 그들을 감쌌다.
"아악……!"
갑자기 쏟아져 나온 흑의인 일곱은 삽시간에 불덩이가 되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목숨을 내걸고 시위들에게 달려들었다.
흑의인들은 온몸이 불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비참하게 울부짖으며 난폭하게 시위와 관리들에게 덮쳐들었다.
시위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어 연신 뒤로 물러섰다.
"어서, 대인 여러분 어서 대피하세요. 그들의 몸에 등유가 있어 위험합니다. 절대 접근하지 마십시오."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리들 역시 뒤로 물러섰다. 흑의인의 화염에 놀라서 흩어졌다.
그러나 흑의인들의 목표물은 관리들이 아니라 궁문 앞에 놓인 용포와 서신이었다.
시위와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화염에 휩싸인 흑의인이 갑자기 궁문 입구에 놓인 용포와 서신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탕!
흑의인은 용포와 서신을 몸에 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증거다! 해주 공주 역모의 증거다!"
곽하는 이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다른 한 흑의인이 완안경의 시신을 덮쳤다.
"비겁하군!"
완안경의 시신과 이미 잿더미가 됐을 가능성이 큰, 서신 사이에서 곽하는 시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곽하는 잽싸게 앞으로 나아가 완안경의 시신을 번쩍 들어 안았다. 동시에 회전하여 뛰어오르면서 한 발에 흑의인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젠장! 죽일 것들!"
탕!
흑의인은 온몸이 화염에 싸여 있었다. 오랫동안 탔기 때문에 몸은 이미 까맣게 타버렸다. 마지막 숨이 남아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곽하의 발에 걷어차여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게 탄 몸뚱이만이 계속하여 타고 있었다.
곽하가 흑의인 하나를 해결한 다음, 시위들은 흑의인들이 이미 목숨이 다해 전투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너도나도 앞으로 나아가 칼로 검게 그을린 흑의인을 막았다.
곧 흑의인 일곱은 하나씩 쓰러지더니 아무 전투력도 없었다.
그제야 시위는 급히 나아가서 용포와 서신 위에 엎드린 흑의인을 젖히며 그에게 깔렸던 용포와 서신을 구출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흑의인에게 깔렸던 용포와 서신은 한 조각도 남지 않고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증거가 사라졌다.
승상 오림은 줄곧 시위의 보호를 받아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는 인차 평정심을 되찾고 냉정하고 잔혹하게 말했다.
"현장을 보호해라.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 우리는 먼저 황궁에 들어가야 한다. 폐하의 빈소에 불이 났다. 반드시 당장 가 봐야 한다."
"네, 대인!"
관리들은 이견이 없었다. 곽하도 감히 의견을 내지 못했다.
새로운 황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당연히 금나라 황제를 우선으로 해야 했다. 설령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냥 한 구의 시신이라 해도 다른 것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완안경이 죽었으니 곽하도 이제 앞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지금의 그를 안중에 둘 필요가 없었다.
승상 오림의 인솔하에 대신들은 황급히 금나라 황제의 빈소로 달려갔다.
빈소의 불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림을 비롯한 이들이 달려갔을 때, 빈소의 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러나 금나라 황제의 관은 그의 시신과 함께 불타 버렸다.
"소인이 직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대인들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시위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서 저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나서서 변명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빈소에 불이 난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은 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오림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다행히 빈소에 있는 시신은 금나라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그의 것이었다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오림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굳어져 버렸다.
빈소 안의 시신이 정말로 금나라 황제의 것이면 오히려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사람이 이미 죽은 상태에서, 새로운 황제는 자기의 효심을 보여 주기 위하여 제대로 지키지 못한 몇몇 하인들을 처리할 뿐 그들 대신들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빈소에 있는 시신은 금나라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금나라 황제가 만약 그들이 가짜 시신 한 구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추후에 반드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림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이 일은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해야 했다. 누군가 나서서 금나라 황제의 화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시위는 이번에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극구 변명했다.
"대인, 불길은 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빈소에는 스님 아흔아홉 명, 순장될 소녀 서른세 명, 그리고 평소 지키고 있던 내관과 궁녀뿐이었습니다. 폐하의 관이 대전 중앙에 놓여 있었고 누구도 가까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관에 갑자기 불이 일더군요.
저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뛰어 들어가 불을 껐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창문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저희는 잠시 바깥에서 막고 있다가 다시 뛰어 들어왔을 때, 폐하의 시신은……."
시위는 여기까지 말하고 감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빈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느냐? 관에 불이 났는데, 그들은 불을 끄지 않았던 것이냐?"
오림은 격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대인께 알려드립니다. 소인이 빈소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내관, 궁녀, 스님, 순장될 소녀들이 불을 끄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옷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불을 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길이 더 세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