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육 노태군
육장봉의 말은 이 대목에서 모처럼 정서가 잡혔고 말마다 비꼬는 투였다.
그러나 월령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머릿속으로 노태군이 그녀에 대한 '가르침'을 자세히 되돌아보았다.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비교해 보니, 노태군은 정말 육장봉이 말한 것처럼 그녀를 살뜰히 살피고 간, 쓸개 내줄 것처럼 대했으며 그녀를 자기의 손녀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녀는 육씨 가문 전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했다. 스스로를 육씨 가문 사람이라고 여기고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육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보살폈다.
'이게 바로…… 육 노부인에게 '길들여진' 것인가? 아니, 아니, 아니!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내가 이렇게 크도록 육장봉이 예닐곱 살 때보다도 총명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왜 그러시오?"
육장봉은 당연히 월령안이 멍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월령안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전…… 뭔가가 떠올라서요."
그녀는 자기가 육장봉이 예닐곱 살 때보다도 못하게 육 노태군의 '진심'과 '진정'에 감동받았다고 육장봉과 말할 수 없지 않는가?
충격을 받은 월령안의 모습에 육장봉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깝게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소. 속내가 있는 사람이 꿍꿍이가 없는 사람을 상대하는데 당연히 이기지. 이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오."
월령안이 그의 할머니에게 넘어간 것은 더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결국에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육씨 가문 전체를 등에 지지 않았는가.
"전…… 단지 좀 불편할 뿐이에요."
누구라도 진심으로 자기를 대하던 어른이 사실은 온통 계략만 가득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가볍게 다독이고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말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시오. 내 할머니는 사실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오. 그녀가 한 모든 일은 육씨 가문을 위한 것이오. 그녀가 당신을 대할 때도 진심으로 잘해 준 것이오."
그는 월령안의 기분이 이해가 갔다. 그도 예전에 같은 기분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육씨 가문에 시집갔을 때, 육 노태군은 절 정말 잘 대해 주셨어요. 마치 절 친손녀처럼 보살피셨죠. 전 줄곧 그녀가 저에게 어느 정도의 진심은 있는 줄 알았어요. 저도 처음에는 약간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진심을 다해 제 할머니로 여기고 효도했어요."
그때의 일은 그녀가 원해서 한 것이었다. 그녀와 노태군은 양측이 모두 원하는 일이었고 누가 누구한테 미안하거나 누가 누구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육 노태군은 그녀가 육씨 가문을 일으키기를 바랐고 그녀도 육 노태군을 통해 육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그녀와 육장봉의 혼인은 처음부터 결국에는 서로 이용한 것이었다. 누구도 누구보다 고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말한 노태군의 처사를 들은 뒤로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진심이라고 여긴 것이 결국에는 아주 잘 감춰진 허위였을 뿐이었다.
대조적으로, 그녀는 갑자기 육장봉이 3년 동안 냉대했던 것이 도리어 그녀를 그렇게 괴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적어도 진실했다.
그녀가 허상 속에서 살아가게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노태군은 이미 죽었고 또 그녀를 어찌한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혈육의 정이나 총애로 그녀를 속였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이런 일로 죽은 사람에게 따질 수 없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더는 생각하지 말자고 애써 다짐했다.
"다 지난 일이에요. 지금 이런 것을 말해도 의미가 없죠. 이런 오래된 일로 나들이하는 우리의 기분을 망치지 마세요."
육장봉을 재촉해 계속해서 산에 오르게 하려던 월령안은 시선을 들어 육장봉의 웃음기를 머금은 눈과 마주쳤다. 월령안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당신이 저와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은 저한테…… 그때 절 모른 척하시고 아내로 여기지 않으신 것이 저 때문이 아니라 제가 노태군의 눈에 든 손주며느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으신 것인가요?"
"맞소."
육장봉은 가볍게 대답하고 월령안의 손가락을 잡으며 일부러 흘리듯 말했다.
"할머니의 마음에 든 손주며느리는 반드시 육씨 가문에 유리할 것이오. 그때, 소함연과 소영화의 일은 이미 경성에서 소문이 났소. 그러나 할머니는 나 몰래 소함연과의 혼약을 정했었지."
그는 더 이상 할머니를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할머니는 육씨 가문을 위해 혼전부터 방탕했던 여인을 아내로 점찍었는데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월령안은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녀의 좋은 기분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그녀와 이런 말을 한 것이 완곡하고 어색하게 그녀를 냉대한 그 삼 년을 해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그녀와 소함연을 한데 묶어 얘기하는 것을 듣자 월령안의 마음은 역시나 더없이 불쾌했다.
육장봉도 잘못한 게 없다고 이성이 말해 주고 있었다.
월령안은 속으로 더없이 갑갑했다. 그러나 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산을 오르는 것으로 마음속의 불만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는 이미 육장봉이 어렸을 때 겪었던 불행에 대해 생겼던 안타까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육장봉과 비했을 때, 안타까운 쪽이 오히려 자기라고 생각되었다.
월령안은 온몸으로 '나 기분 상했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육장봉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일부 상처는 아무리 아파도 다시 도려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은 듯해도 속은 진작에 문드러져 고름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월령안이 묵묵히 산만 오르고 말이 없자 육장봉의 눈에는 웃음기가 드리웠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월령안은 잔뜩 화가 난 모습도 아주 귀엽군.'
육장봉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이 각이 되지 않아 월령안은 숨을 헐떡이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이미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지쳤다.
지금 이 순간, 무슨 억울함이오, 우울함이오, 안타까운 기분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단지 누워서 푹 쉬고만 싶었다.
'너무 힘들어!'
고개를 들어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산꼭대기를 바라보자 월령안은 울고 싶어졌다.
'날이 저물기 전에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아니…… 산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아. 내가 지금 육장봉과 등산하기 싫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육장봉이 허락할까?'
월령안이 육장봉과 상의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순간, 육장봉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등을 내주었다.
"오르시오. 내가 업어 주겠소."
월령안은 잠깐 멍해졌다가 기쁜 얼굴로 올라탔다.
"당신이 말한 거예요…… 제가 업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등산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업겠다고 했으니 그녀가 사양하지 않았다고 탓할 것도 없었다!
'흥, 육장봉을 고생 좀 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화도 없는 줄로 알 거야.'
"맞소. 내가 스스로 한 말이오."
육장봉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그녀를 업었다.
"꽉 잡으시오."
산길이 험난하여 월령안의 체력으로는 분명 홀로 산에 오르기 힘들었다. 그는 길을 가면서 월령안이 애교를 부리며 그더러 업어 달라고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월령안은 종아리가 덜덜 떨 정도로 지쳤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포기하려고 하면서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아내인데 아끼는 것 말고 그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월령안이 입을 열지 않자 그는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넓고 튼튼한 등에 업히자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져 종아리를 흔들었다.
"전 좀 무거워요. 힘들면 절 내려 주세요."
'흥, 내 기분을 상하게 하더니. 어디 한번 힘들어 봐라.'
"좋소."
육장봉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때에는 내가 무겁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난 도대체 무슨 남자를 찾은 거야. 입에 발린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네!
전에 달래지 않은 것은 그렇다 해도, 지금도 이렇게 나한테 충격이나 주고. 육장봉은 내가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릴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거짓말인 것이 뻔한데 그래도 듣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을 업고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월령안의 무게를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는 듯했다.
"가끔 저도 절 기쁘게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마치 지금처럼요."
육장봉의 등에 업힌 월령안은 많이 여유로워졌다. 말투도 어딘가 애교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육장봉의 차갑게 굳은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꼬며 말했다.
"마치…… 우리 할머니처럼 말이오?"
월령안은 갑자기 굳어지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이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었을 거예요."
'육장봉은 내가 그때 얼마나 멍청했던지 꼭 이렇게 콕 찍어 말해야 하나? 내가 진심과 가식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다고!'
육장봉이 낮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난 당신이 나한테 시집온 것을 아주 감사하게 여기오."
월령안은 얼굴을 붉히며 부자연스럽게 목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해요?"
'달래야 할 때는 안 달래더니 내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달래고. 참……. 그래, 기분이 좀 좋아지네.'
그녀는 육 노부인의 호의도 이제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육장봉이 말한 것처럼 노태군이 진심이든, 가식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육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었고 육장봉과 엮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육 노태군 덕분이기 때문이었다.
육 노태군이 마음을 다해 육씨 가문을 위하는 사람이 아닌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였다면 출신이 평범치 않은 손자에게 상인 여인을 맺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업고 느긋하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이 빠르지 않았지만 아주 안정감이 있었다. 그의 등에 엎드린 월령안은 조금도 흔들림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 편한 탓인지 햇살이 비치자 월령안은 온몸이 노곤해졌다. 그녀는 육장봉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육장봉은 이미 그녀를 업고 산꼭대기에 도착한 뒤였다.
"제가 얼마나 잤나요? 왜 절 깨우지 않으셨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등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