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척연과 온조
그렇다 해도 양측은 의사청에서 하루 종일 토론을 벌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쌍방은 십 년 쟁탈전의 모든 조항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별수 없었다. 계약서는 반 자 높이나 되어 한 번 훑어보는 데도 몇 시진이 걸렸다. 게다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월령안과 범씨 가문 가주는 한 글자, 한 글자 전부 살펴보고, 연구해야 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마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계약서는 같은 양식으로 세 부 만들었다. 월령안, 범씨 가문 가주와 조계안이 각각 도장을 찍고 세 사람이 각기 한 부씩 가졌다.
계약서를 교환한 다음, 조계안은 드디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눈매를 치켜세우더니 말 같은 말을 한마디 했다.
"앞으로 십 년 동안, 두 분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월령안과 범씨 가문 가주는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답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 둘 다 눈빛이 평온하기만 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각자 눈길을 돌렸다.
오늘부터 그들은 적수이다.
한 가문이 흥하면 한 가문은 멸하는, 사활을 건 적수였다.
월령안과 범씨 가문 가주는 동시에 지주부를 떠났다. 두 사람은 지주부를 나서자 오른쪽, 왼쪽으로 나뉘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그러나 월령안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날 밤에 청주를 떠났다.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의박이 조운충을 데리러 간 그날 밤, 월령안과 육장봉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청주를 떠났다.
청주의 상인들은 모두 월씨, 범씨 두 가문의 십 년 쟁탈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두 가문 간 십 년 쟁탈전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뭇사람들은 이미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모두 이 기회를 빌려 한번 큰돈을 벌어 보려 했다.
상회에서 월령안을 지지하는 상인들은 이미 돈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월령안이 입을 열기만 하면 그들은 월령안과 함께 새로운 성곽, 새로운 상업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성곽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월령안의 작별 편지 한 통만 받게 되었다.
월령안은 편지에서 그들에게 일이 있어 한발 앞서 청주를 떠난다고 했다. 직접 작별을 고하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로 한마디 하니 실례되는 점이 있으면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곽을 건설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고 투자도 만만치 않으므로, 만약 이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현장 조사를 거친 다음 결정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정중하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상회의 상인들에게 돈을 가지고 관성에 가서 그녀를 찾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관성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관성의 태수, 수비에게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며 새로운 무역로를 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 했다.
이 밖에 그녀는 비록 청주를 떠나지만 심복 상천을 남겨 둔다고 밝혔다. 상천은 청주에서 그녀를 도와 청주상회의 사무를 처리할 것이므로 무슨 일이 있으면 상천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청주상회의 상인들은 모두 월령안의 친필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모두 별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편지를 받은 시간도 비슷했다. 모두 월씨, 범씨 가문 십 년 쟁탈전이 결정된 사흘 뒤였다.
유독 부삼만 월령안이 그녀가 떠난 이튿날에 그 편지를 받았다.
그는 월령안이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일이 결정되자마자 지주부에서 나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육장봉과 함께 떠났다는 사실을 알자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나까지 속이다니. 참 많이 컸구나."
하지만 조의박이 미친 듯이 월령안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부삼 마음속의 자그마한 불쾌감도 금세 사라졌다.
월령안이 잘한 것이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했다.
월령안의 안전에 비하면 그의 불쾌감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월령안이 청주를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변경에 가서 소함연을 맞아들인 나씨 가문 장남은 소함연을 데리고 서남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청주를 경유하므로 소함연은 월령안을 만나 보려 했다.
나씨 가문 장남도 월령안과 친분을 쌓으려 했다. 가능하다면 월령안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는 변경에서 월령안이 청주에서 한 일들을 전해 들었다. 그녀가 청주의 판을 뒤엎고 서남의 양 씨, 송 씨 두 씨족을 귀순시킨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만약 월령안의 지지를 얻는다면 이는 서남의 양 씨, 송 씨 두 가문의 지지를 얻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충분한 조건을 마련하고, 청주의 지지를 받는 동생과 한번 경쟁해 볼 만했다.
그런데 애타게 찾아온 그들 부부에게 돌아온 것은 월령안이 이미 청주를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소함연은 그 자리에서 울화통을 터뜨렸다.
월령안은 그녀를 돕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만나 주지도 않고 그냥 도망쳐 버렸다. 이게 돕는 거란 말인가.
다행히 그들은 아무 성과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그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편지라기보다 추천서였다. 이 추천서가 있으면 소함연 부부는 양 토사와 송 토사를 만나기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양 토사와 송 토사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는 월령안의 소관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추천서 외에 추수더러 몰래 소함연에게 따로 명단 한 장을 주게 했다. 소함연만이 알고 있는 명단이었다.
월령안은 이 명단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물론 추수도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양씨, 송씨 두 성씨로 시작된 이름을 보고서 소함연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은 월령안이 서남에서 그녀에게 남겨 준 인맥이었다.
명단에 가득 적혀 있는 이름들을 보면서 소함연은 눈마저 빨갛게 달아올랐다. 감동한 것이 아니라 질투가 나고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넌 늘 이렇지……. 네가 원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어. 너는 언제나 쉽게 주위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너를 보게 만들지. 분명 나야말로 소씨 가문 큰아가씨인데도 매번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늘 너만 궁금해했어. 청주에 며칠밖에 안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유용한 사람을 사귀다니. 난 정말 네가 싫어."
소함연은 말을 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담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일 뿐이었다.
머나먼 변경에서 서남으로 시집왔고 또 힘든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임무를 완성할 수 없을까, 청주에서 죽을까 두려웠다. 더욱이는 소씨 가문을 연루시킬까 두려웠다.
소씨 가문은 이미 어떤 작은 풍파도 이겨 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래도 월령안이 준 이 명단은 그녀더러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했다. 그녀가 서남에서 혼자만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다 해도 소함연은 수중의 명단을 갈기갈기 찢으며 울부짖었다.
"월령안, 난 정말 네가 싫어. 나한테 인맥을 남겨 주었어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소함연은 거의 통곡하다시피 했지만 회복도 빨랐다. 한순간에 평소대로 되돌아와 별다른 점을 눈치챌 수 없었다.
추수는 소함연의 강인한 표정과 단호한 눈빛을 보고 그녀가 필히 서남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이 추수에게 남겨 준 청주에서의 마지막 임무는 소함연을 만나 보고 그녀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마치면 추수는 변경에 가서 수횡천과 합류하여 상천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추수는 월령안과 마찬가지로 밤에 떠났다. 그녀는 아포를 데리고 떠났다.
부삼의 연줄로 거웅령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독을 잘 쓰는 아포와 무예가 뛰어난 추수에게 있어서 거웅령을 가로지르는 것은 전혀 도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거웅령을 벗어나자 헤어졌다. 추수는 변경으로 가고, 아포는 곧바로 서역으로 가서 월령안을 도와 해독약을 찾았다.
반달 뒤, 추수는 변경에 이르렀다.
입성하자마자 그녀는 아무것도 할 틈도 없이 염 황숙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추수는 놀라 멍해졌다. 가장 먼저 곧바로 월령안에게 편지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급히 달려온 서 선생에게 저지당했다.
추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 선생을 바라보았다.
"이 일을 숨긴 걸 알게 되면 아가씨께서 불쾌해하실 거예요."
그녀는 아무래도 아가씨를 불러 염 황숙의 임종을 보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를 믿으시오. 염 황숙께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설령 일이 있어도 월령안을 불러올 수 없었다.
추수는 갈등하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서 선생은 추수가 소식을 누설할까 두려워 그냥 끌고 황궁에 갔다. 곁에 두고 지키려는 것이었다.
* * *
그 시각, 월령안과 육장봉도 관성에 이르렀다.
육장봉 이 대장군이 있기에, 두 사람은 입성하자마자 관성의 수비 척연(戚然)과 태수(太守 - 옛 중국의 지방관) 온조(溫兆)의 열정적인 접대를 받았다.
환영회에서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척연과 온조를 소개했다.
이 두 사람은 육씨 가문과 교분이 있기에 신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니니 그녀더러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척연은 무장으로 육장봉과 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즉석에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살아생전에 육 대장군의 입에서 우리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듣다니 정말 놀랍구먼."
온조는 문관으로 상대적으로 점잖았다.
"제수씨 덕분에 우리가 육 대장군으로부터 좋은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있게 됐네요. 그럼 술 한잔 권할게요.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월령안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온조가 부르는 제수씨는 속뜻이 따로 있어 그녀를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은 묵인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들 그녀가 육장봉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그 날에 이혼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온조의 제수씨를 받아들일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박하면 그것은 남들 앞에서 육장봉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었다.
사석에서는 그녀가 육장봉과 티격태격하고 심통을 부려도 괜찮았다. 하지만 밖에서, 특히 육장봉의 친구들 앞에서는 어쨌든 그의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월령안은 득의양양한 기색을 감추며 짐짓 무덤덤한 척하는 육장봉을 몰래 노려보았다. 그녀는 온조가 부르는 호칭을 애써 무시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온 대인, 척 수비. 이번에 저는 청주상회 회장으로서 육 대장군께 대인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은 장사를 하러 왔으니 사적인 교분은 따지지 맙시다. 대인들께서는 저를 월 회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