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감히 나를 놀리다니!
완안경은 월령안이 준 몽산 작물 반 석이 모두 익은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오백 석의 양식도 모두 몇 해 묵은 양식으로서 비록 먹을 수는 있지만 모든 양식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완안경은 수하의 보고를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연거푸 두 번이나 물어보고 나서야 사실임을 받아들였다.
"월령안! 간이 부었구나! 감히 나를 놀리다니!"
완안경은 분노하여 눈앞의 탁자와 의자를 걷어찼다.
"가자. 월씨 대저택으로 찾아가자."
"대황자 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월령안은 계약서에 따라 납품했습니다. 이렇게 월령안을 찾아가도 우리에게는 그녀에게 따질 명분이 없습니다."
안 대상인은 급히 입을 열어 저지했다.
그때 당시 그는 월령안과 완안경이 체결한 계약서를 보고 계약서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그는 월령안이 공개적으로 완안경을 함정에 빠뜨릴 정도로 담이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사실이 되었다.
어찌 보면 그가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월령안은 청주 땅에서 청주의 태자나 다름없는 조운충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금나라 대황자 완안경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월령안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말이냐?"
완안경이 걸음을 멈추고 안 대상인을 노려봤다.
"대황자 전하, 이 일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황자 전하께서는 물론 과실이 없습니다. 하지만 계약서대로라면 월령안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계약서대로 납품했을 뿐입니다. 익은 양식 반 석뿐만 아니라, 나머지 오백 석 양식도……."
안 대상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 갔다.
"계약서에 대전하께서는 사는 양식이 햇곡식인지 아니면 몇 년 묵은 양식인지 명확하게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질에 대해서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월령안이 묵은 곡식을 주어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완안경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나를 놀리는 거지, 무엇이냐? 너희 상인들은 역시 교활하구나.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
안 대상인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누르며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했다.
상인들은 교활하지만 사실대로 말한다. 이건 분명 함정이 있는 계약서였다. 하지만 완안경이 스스로 체결한 것이지 상인들이 강요해서 체결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체결하고서는 뒤돌아서 그들 상인들이 자기를 놀린다고 말하다니. 정말로 품위가 떨어지는 처사였다.
완안경은 하찮다는 듯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계약서가 대수냐? 너희 상인들이나 신경 쓰지!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이 계약서는 폐지일 따름이다. 저리 비켜! 내 길을 막지 말아라."
완안경은 옷소매를 젖히며 안 대상인을 밀쳐 내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안 대상인은 땅바닥에 호되게 넘어졌다. 꼬리뼈에서 찰카닥,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났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몸의 상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몹시 불안했다. 이 금나라의 대황자는 계약서마저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한 구두 약속 또한 지킬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안 대상인은 몹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완안경과 같은 배에 올랐다. 내리려고 해도 이미 불가능했다.
* * *
완안경은 월령안에게 놀아났다고 여겨 화가 울컥울컥 치밀었다.
그는 호위병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월씨 저택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수하 사람들에게 가서 문을 두드리게 했다. 월령안더러 자신을 만나러 나오라고 했다.
"큰아가씨! 금나라 대황자께서 사람을 거느리고 저희 집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아가씨더러 나와서 만나자고 합니다. 살기등등한 것을 보아 나쁜 의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월씨 대저택의 집사는 말을 이렇게 했지만 표정이 차분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진 것을 인정하지 않고 체면을 만회하러 왔군요."
월령안은 비웃으며 일어나려다 육장봉에게 잡혔다.
"내가 가겠소."
"제가 처리할……."
"당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육장봉은 손목을 움직이더니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손이 좀 근질근질하구먼."
그는 오래전부터 완안경을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완안경은 그의 여자를 빼앗으려 들 뿐만 아니라 월령안 앞에서 그를 헐뜯었다. 그가 본때를 보여 주지 않으면 완안경은 아마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인물인 줄 알 것이다.
월령안은 잠깐 멈칫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사람을 때려죽이지 않는 한, 아니…… 때려죽여도 별일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야망이 들끓어 일이 없어도 만들어 낼 것이다. 완안경을 때려죽여도 금나라의 야심을 앞당겨 폭로시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월령안은 더욱 제지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완안경을 혼쭐내게 내버려 두었다. 좌우지간 육장봉이 기뻐하면 그만이었다.
월씨 저택 대문이 갑자기 열렸다.
완안경은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거만하게 말 등에 앉아 월령안이 나와 그에게 사죄하며 안으로 청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이때, 육장봉의 두 호위병이 태사의(太师椅 - 옛날식 팔걸이 나무 의자)를 들고 나왔다. 오만방자하게 태사의를 정문 앞에 놓아 대문을 막아 버렸다.
'월령안은 이게 무슨 뜻이지? 나한테 으름장을 놓는 건가?'
완안경은 월씨 저택 대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금방 좋아졌던 얼굴빛이 다시금 검푸르게 되어 좀 전보다 더 볼썽사나웠다.
완안경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육사와 육오가 의자를 가져다 놓은 다음 곧이어 평상복을 입은 육장봉이 월씨 저택 대문에서 나왔다. 그는 완안경을 한번 흘겨본 뒤 차분하고 담담하게 태사의에 앉았다.
"금나라 대황자이신가?"
육사와 육오는 육장봉의 뒤쪽 양편에 섰다.
"육장봉!"
완안경은 육장봉을 보자 사흘 전 그가 월씨 저택을 찾았을 때, 육장봉과 어깨를 스쳐 지났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육장봉의 담담하다 못해 하찮다는 듯한 눈빛이 떠올랐다.
이래저래 원한이 쌓인 완안경은 육장봉을 독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를 갈며 고함쳤다.
그는 육장봉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월령안은 아무 대비 없이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 없었다.
이 일은 기필코 육장봉과 관련이 있을뿐더러 심지어 육장봉의 뜻일 수도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대장군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네. 내 이름을 당신이 부르라고 지은 건 아니니까."
육장봉의 목소리는 완안경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차분하기만 했다.
완안경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호칭을 가지고 실랑이질하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그 삶은 양식 반 석은 당신의 뜻인가?"
육장봉은 웃으며 물었다.
"맛은 괜찮던가?"
"감히 나를 놀리다니!"
육장봉이 인정했다. 역시 육장봉이 꼼수를 부린 것이었다.
'령안은 이렇게 나를 놀릴 수가 없지.'
"놀렸으면 어쩔 건데? 나를 감히 때릴 수나 있겠나?"
육장봉은 악랄하게 도발했다.
"육장봉, 여기는 청주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완안경은 화가 난 나머지 오히려 웃고 말았다. 자신이 끌고 온 사람들을 훑어보며 속으로 맞붙어 싸워 이길 가능성을 가늠했다.
"나는 언제나 공무에 충실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한 번도 마음대로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때려 주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곧장 완안경을 급습했다.
완안경의 사람들은 육장봉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손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잠깐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완안경을 가운데에 에워쌌다.
"어서, 전하를 보호해라."
슝!
육장봉은 전혀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날아 왔다.
말 머리를 딛고서 한 발에 하나씩 완안경을 에워싼 호위를 차서 날려 버렸다. 뒤이어 허공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완안경 양쪽에 서 있던 호위를 모두 걷어차 버리고 완안경 한 사람만을 남겨 두었다.
육장봉은 움직이지 않고 말 등에 서서 완안경을 농락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젠 당신 차례네."
완안경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미친 듯이 마구 날뛰며 울부짖었다.
완안경은 말이 들썩이는 바람에 볼품없이 되자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육장봉, 네가 감히!"
"할 건 이미 다 했군. 아직도 감히 할 수 있느냐고 묻다니? 당신 좀 어리석은 거 아닌가?"
육장봉은 인정사정 보지 않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장 완안경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이 발차기는 빠르고도 날쌨다. 완안경은 자신의 무공이 괜찮은 편이지만 육장봉의 이 발차기를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완안경은 일격을 피하려고 말 등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렸다. 그러나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에 육장봉의 공격이 눈앞까지 닥쳐왔다. 그는 여전히 발차기로 공격했다.
완안경은 피할 데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어 막았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완안경은 육장봉의 발차기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옷소매에도 커다란 발자국이 남겨졌다.
그러나 육장봉은 멈추지 않고 또다시 바싹 다가들었다. 그의 몸놀림은 가볍고 신속했다. 여전히 발차기였다.
완안경은 육장봉의 일격을 막아내고 그의 무공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확연한 실력 차이라 완안경이 아무리 정신을 바싹 차린다고 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완안경은 기세등등한 육장봉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수십 수 맞붙었다. 완안경의 몸 곳곳에는 육장봉의 발자국이 남겨졌다.
설령 완안경이 아무리 잘난 척한고 해도 육장봉이 일부러 그를 모욕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육장봉! 이 원수는 기억해 둘 거야."
완안경은 수치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더 싸워도 모욕을 자초하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뜨려 했다.
싸워 안 되면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육장봉을 두고 볼 것이다. 육장봉의 재간이 아무리 뛰어나도 천군만마를 이길 수 있겠는가.
완안경은 고의로 육장봉의 발차기에 당한 다음 그 힘을 빌려 뒤돌아서 도망쳤다.
하지만 완안경이 도망치려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꺼지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꺼지려 하다니 예의가 없군?"
육장봉은 예리한 화살처럼 완안경에게 날아갔다.
이번에 육장봉은 더는 힘을 빼지 않고 바야흐로 따라잡는 찰나,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며 발차기로 완안경을 길옆의 담벼락에다 힘껏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안경은 그 자리에서 뒤쪽의 높은 담벼락으로 날아갔다. 담벼락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완안경도 벽돌과 흙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한순간 먼지가 휘날렸다.
완안경은 안간힘을 써서야 흙과 벽돌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는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햇빛 아래에 서 있는 깔끔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성을 잃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육장봉, 죽여 버릴 거야!"
그런데 바로 이때, 길모퉁이에서 질서 정연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