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화 저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까짓 심리전 정도쯤이야. 완안경은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담판하기 전에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좋아! 내가 끝까지 상대해 주지!'
이변이 없었다. 완안경은 얼굴이 시커메지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령안, 당신…… 나는 당신을 위했던 것이오."
"대황자 전하, 저 역시 전하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에요."
월령안은 완안경의 말투를 흉내 내며 탄식했다.
"대황자 전하, 저도 한동안 궁중에서 지내며 황제의 일상을 본 적이 있어요. 황제는 매일 수많은 일을 처리하며 잠시도 쉬지 못할 정도로 바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홀가분하지도 않아요. 황제가 된 사람이 도량이 넓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간섭하려 한다면 아마 힘들어 죽을 거예요."
완안경은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몰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음속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령안, 당신은 꼭 이렇게 나를 대해야 하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도량이 없고 오지랖이 넓다고 욕하다니. 그가 월령안을 너무 잘 대해 주어서 월령안이 그를 너무 쉽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대황자 전하께서 먼저 저에게 손쓴 거 아닌가요?"
그녀는 다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처한 것뿐이었다.
금나라의 대황자만 날뛸 수 있고 월령안이 반격하면 안 된다는 도리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먼저 나를 거절한 것이오!"
완안경은 월령안이 금나라 변경에 있는 월씨 가문의 병기방(兵器坊 - 병기를 다루는 곳)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그 병기방은 그가 월령안을 혼내 주려고 일부러 주나라에 소식을 누설한 것이었다.
원래는 일이 터지면 월령안이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 굽힐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그녀는 억지로 버티면서도 결코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거절요?"
월령안은 화가 나서 웃고 말았다.
"대황자 전하께서는 혼약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완안경은 차갑고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한 금나라 대황자가 이혼당한 여인에게 구혼했다. 그런데 월령안에게 거절당했다. 이런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주지 않으면 그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대황자 전하, 너무 많이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월령안은 사실 당신은 참 낯가죽이 두껍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거절이라?'
완안경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그녀가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분명 우리 월씨 가문과 금나라는 혼약이 있어요. 하지만 그 혼약의 주도권은 제게 있다는 것을 대황자 전하께서 잊고 계신가 보네요. 우선 먼저 제가 그 혼인 약속을 지키고 싶은지는 차치하고, 설령 제가 혼약을 지킨다고 해도 제가 꼭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금나라의 황자들 가운데서 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 시집가도 다 됩니다. 제가 원한다면 저는 당신 아버지께 시집갈 수도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저를 모후(母後)라고 불러야 하죠."
완안경이 이 혼약을 염두에 두고 줄곧 대비(大妃)를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꼭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자로서 다들 자부심이 있었다. 언제나 그들이 남을 골랐지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고른 적은 없었다.
완안경의 동생들은 모두 일찍 대비를 맞아들였다. 아마 간택당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당당한 황자로서 여 상인에게 간택당하다니. 밖에 전해지면 금나라 황실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이리 말도 안 되는 혼약을 하다니. 금나라 황제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완안경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월령안 앞에서는 인내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월령안이 거듭 도발하자 완안경이 아무리 좋은 성격이라도 더는 억제할 수 없었다.
"령안, 나를 화나게 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오. 당신도 알고 있잖소."
"대황자 전하를 불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월령안은 시원하게 사과했다. 완안경이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사과의 뜻으로…… 양식 문제는 제가 한발 물러설게요. 대전하께서 사흘 안에 양식 천 석을 요구하신다고요? 됩니다. 사흘 뒤 대전하께서는 청주와 서남 경계로 사람을 보내 양식을 받으면 됩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내가 원하는 것은 보통 양식이 아니오!"
완안경은 그가 강경하게 말하자 월령안이 양보하는 것을 보고 더 사정없이 요구했다.
그가 기어코 강경하게 나와야 고분고분해지니 그도 월령안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찌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황자 전하, 저를 난처하게 하시는군요."
"령안,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소.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지. 아니오?"
완안경은 기세등등하고 기고만장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갑고 강경하며 거만한 자태로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황자 전하, 아시다시피…… 그것은 보통 양식이 아닙니다. 만약 굳이 사시려고 한다면 제가 틀림없이 당신을 도와 가져올 것입니다. 하지만 가격은…… 보통의 양식 가격대로 할 수 없습니다."
완안경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한 석 당 백 석으로 치지."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한 석 당 천 석으로 쳐야 합니다."
"령안, 내 인내심은 한계가 있소!"
'월령안은 지금 나와 흥정하는 건가?'
"대황자 전하, 저는 단지 상인일 뿐입니다. 대전하께서 요구하는 양식을 모두 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석을 내놓을 수 없고 반 석만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보통 양식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대황자 전하께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지금 다시 계약서를 작성해서 사흘 뒤에 서남과 청주 경계에서 납품할 것입니다. 만약 안 된다고 생각하시면……."
월령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보통 소상인일 뿐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큰 힘이 없습니다."
진기한 물건은 사둘 만하다.
조의박과 육장봉 외 몽산의 양식 종자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완안경은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완안경은 잠깐 생각을 거쳐 동의했다.
"말로 해서는 증거가 남지 않으니 다시 계약서를 작성합시다."
월령안은 완안경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집사를 불러 다시 계약서를 만들게 하는 한편, 원래 계약서를 거둬들여 폐기했다.
새로운 계약서는 같은 양식으로 세 부를 만들어 쌍방이 각각 한 부씩 가지고, 나머지 한 부는 청주상회에 남겨 두었다.
"대황자 전하, 청주상회에 같이 가시죠?"
계약서는 상회에 넘겨 보관해야 했다. 물론 계약서를 뜯어고치는 일이 없도록 상회도 도장을 찍어야 했다.
"좋지!"
완안경은 계약서를 한 번 본 뒤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계약서에는 안 대상인과 월령안이 원래 체결했던 양식 구매계약서를 무효로 하고 새로운 양식 구매계약서를 작성한다고 적혀 있었다.
금나라 황자 완안경은 잡곡 천 석을 사들이고, 월령안은 몽산 작물인 감자와 옥수수를 반 석을 그 잡곡의 오백 석으로 치고, 다시 잡곡 오백 석을 더해 모두 천 석을 팔 예정이었다.
쌍방은 사흘 뒤, 서남과 청주 접경지인 유사강(流沙崗)에서 납품하기로 약정했다.
청주상회는 지금 월령안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상회의 사람은 계약서를 한번 보고는 쌍방이 모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곧바로 도장을 찍어 월령안과 완안경에게 돌려 주었다.
상회에서 나오자 완안경은 월령안을 바래다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에게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지금 청주에는 양식이 모자랍니다. 양식 천 석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대황자 전하,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름을 적고 도장까지 찍었다. 그녀는 완안경과의 거래를 연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가서 완안경에게 커다란 선물을 선사할 준비를 해야 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속이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계약서를 육장봉에게 보여 주었다.
육장봉은 계약서에서 반 석의 몽산 작물로 오백 석의 양식을 대체한다는 부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 몽산의 양식 종자를 그에게 팔 생각이오?"
월령안은 방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누가 양식 종자를 판다고 했어요?"
"당신 여기……."
육장봉은 계약서의 조항을 가리켰다.
"잘 보세요. 작물이라고 했지 양식 종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품속에 앉아 있었다. 눈매에는 온통 득의양양한 기운이었다.
'완안경, 잘난 척만 잘하는 바보!'
"무슨 차이가 있소?"
육장봉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털끝만큼의 실수가 큰 잘못을 초래하죠. 이야기해 보세요. 차이가 있나요 없나요?"
월령안은 일부러 신비롭게 말했다.
"계약서에 함정을 파 완안경을 빠뜨린 거요?"
그는 월령안이 판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득의양양해 하는 눈빛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 아가씨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단정하고 대범하며 분수에 맞게 처신했다. 오로지 이런 순간에만 그녀의 여자아이다운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음."
월령안은 뜸을 들이지 않고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몽산에서 빼앗은 작물 가운데 일부가 물에 젖어 종자로 쓸 수 없잖아요. 그것들을 모두 삶아서 익힌 다음 반 석을 모아서 제게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줄 거예요. 양식 오백 석 값으로 줄게요."
남을 함정에 빠뜨려 번 돈은 써도 아깝지 않았다.
"삶아서 익힌다고?"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완안경이 원하는 건 익힌 작물이 아니잖소. 그가 원하는 것은 양식 종자인데 당신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저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계약서에 정확하게 썼나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시나? 그가 무엇을 원하면 제가 그걸 줘야 하나요? 저는 그 사람의 부모가 아니거든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당신은 제가 왜 안 대상인하고 이야기하지 않고 완안경더러 저하고 이야기하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육장봉은 완안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므로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되뇌었다.
"맞아요."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조소가 서려 있었다.
"기술에는 전공이 있어요. 완안경은 자기가 황자라 모든 일이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제가 오늘 좀 혼내 주려고요. 각 업종마다 나름 규칙이 있는 법이에요.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니. 제가 그런 사람을 속이지 않으면 누구를 속이겠어요?"
월령안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눈으로 한기를 뿜었다.
"내가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해도 그는 저를 어찌할 수가 없어요. 계약서에 분명하게 적혀 있거든요. 저는 계약서대로 납품했기에 이 송사는 금나라에 간다 해도 저는 무섭지 않아요."
"내가 있는 한, 당신이 약속대로 납품하지 않고 계약을 파기했다고 해도 두려울 것 없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그녀의 어깨에 턱을 고이고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양식을 준비해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는 완안경이 익은 양식 반 석을 받고 무슨 기분이 들지 몹시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