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황제가 될 수 없겠어요
"월씨 조카, 나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오."
안 대상인은 울상을 하고서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 양식은 나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주문한 것이네. 지금 구매자가 앞당겨 양식을 달라고 나에게 강요하는구먼. 사흘 뒤에 내가 양식을 내놓지 못하면 우리 가문 전체를 몰살시키겠다고 경고까지 한단 말일세.
월씨 조카, 우리 가문을 불쌍히 여겨 나를 한 번 만 도와주게나. 아니면 우리 온 가족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네. 손녀가 태어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되네. 내가 능력이 없으니 이렇게 자네에게 부탁을 하는 걸세."
월령안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유감스럽군요. 저는 계약서대로 할 겁니다."
'하나같이 나를 바보로 아나?'
"월씨 조카,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지."
안 대상인은 곧바로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월령안 앞에 다가가 그녀의 손을 와락 잡으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월씨 조카, 나를 좀 구해 주게……."
"스읍……!"
월령안은 상한 오른손이 안 대상인에게 잡히자 아픈 나머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힘을 써서 안 대상인을 떨쳐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손을 놓으세요!"
안 대상인은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월씨 조카, 이건, 이건…… 일부러 그런 거 아니네. 다친 줄 몰랐네."
보아하니 월령안이 크게 다친 것은 분명했다. 듣건대 조운충이 독도 썼다고 하는데 그건 진위를 알 수 없었다.
상처를 입은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중독된 것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월령안은 손목을 잡은 채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냉랭한 시선으로 안 대상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행동은 완안경이 요구한 거죠? 그리고 역시 그자가 당신더러 저를 윽박지르라고 했죠? 좋아요. 그럼 그더러 직접 찾아와서 저하고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안 대상인은 그녀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그녀 앞에서 불쌍한 척했다. 결국 일을 떠넘기려는 것이었다.
좋다. 그러면 그녀가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완안경은 양식을 비축하여 북요와 손잡고 주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좋다. 그러면 그녀는 완안경의 소원 또한 들어줄 것이다.
육장봉은 월씨 대저택에 완안경보다 한발 앞서 도착했다.
완안경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월씨 저택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가는 육장봉을 보았다. 곧장 발걸음을 멈추고 육장봉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게슴츠레 뜬 눈동자에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육장봉은 느낌이 닿았는지 뒤돌아서 완안경을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 눈빛은 담담하고 차분하여 마치 완안경이 너무나 예사로워 다시 볼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보였다.
완안경은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하여 월씨 대저택으로 걸어갔다.
육장봉은 월씨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월령안의 처소로 달려갔다. 자기 집처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줄곧 바삐 뛰어다니다 보니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을 보는 순간, 그는 기운을 차리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
"당신 손에 상처는 괜찮은 것이오?"
"설옥고를 썼더니 별문제 없어요."
월령안은 육장봉 앞에 걸어갔다.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옷소매를 걷어 하얀 천에 감긴 팔을 내보이며 손목을 흔들었다.
"보세요. 찰과상일 뿐이에요. 이젠 거의 다 나았어요."
"피부와 살만 다쳐도 다 아프잖소. 우리 할머니께서는 부딪쳐도, 상처 나도 입으로 불어 주면 아프지 않다고 했소. 어떻소? 당신도 한번 불어 줄까?"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가볍게 잡고 허리를 굽혀서 손목에 대고 가볍게 불었다.
월령안은 깜짝 놀랐다.
'육 대장군이 오늘은 어린애가 된 건가?'
그러나 그녀는 육장봉 눈 속의 아끼는 정과 걱정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육장봉의 이마에 이마를 갖다 대고 마주 보며 말했다.
"정말 아프지 않군요."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육장봉은 눈앞의 밝고 화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반쯤 웃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이 다치는 것을 정말 보고 싶지 않단 말이오."
그의 령안은 정말로 살뜰했다.
그는 왜 좀 더 빨리 그녀의 훌륭함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육장봉의 목소리는 침울하고 의기소침했다. 월령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아프지 않아요."
몸에 상처도 아프지 않고, 마음도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녀는 모두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육장봉을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육장봉이 그녀를 선택하면, 그녀는 육장봉이 책임감이 없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육장봉이 주나라를 선택해도 그녀는 육장봉이 그녀를 마음속 첫 자리에 놓지 않았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모두 좋은 선택이 아니고 그녀가 원하는 답도 아니었다.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대영웅도, 그녀만 사랑하는 임도 모두 원했다.
그녀의 상황은 그녀가 감성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직 육장봉이 충분히 강대해야만 그녀와 육장봉은 미래가 있었다.
"아…… 어머나…… 아가씨,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추수는 걸어오다가 두 사람이 서로 안고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얼른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곧바로 뒤돌아 두 사람을 등지고 말했다.
"아가씨, 금나라 대황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화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육장봉을 밀쳐냈다.
"할 일이 있어요. 당신은 먼저 가서 쉬세요."
어쩌면 그녀에게는 순간의 안정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평안하라는 의미로 령안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치 남들이 오행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과 같이 그녀의 팔자에 모자란 것을 이름 자에 넣어 주신 모양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평생 안정적으로 지낼 일이 매우 적다는 것을 일찍부터 아시고 그녀에게 령안이라고 이름 지어 주셨을 것이다.
"그자는 뭐 하러 온 것이오?"
육장봉은 밖에서 완안경을 봤었다. 하지만 이는 완안경에 대한 그의 혐오감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완안경은 지금 산통을 깬 것이다.
"제가 잘못 짐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몽산의 양식 종자를 원할 거예요."
안 대상인은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완안경은 갑자기 그녀더러 한 달 앞당겨 양식을 납품하라고 했다. 그의 목적은 절대 양식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전에 조의박 등 몇 사람은 몽산의 양식을 꽁꽁 숨겼었다. 누구도 조의박의 수중에서 양식을 운송해 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육장봉이 해냈다.
육장봉의 수중에는 몽산의 양식 종자가 있었다. 그녀와 육장봉의 관계상 육장봉의 수중에서 양식 종자를 얻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 그자가 지금 불로소득하려는 것이오?"
'완안경, 완전히 철면피로군. 나의 령안을 괴롭히려 하다니.'
육장봉은 낯빛이 차가워지더니 살벌하게 말했다.
"내가 만나러 가겠소."
월령안은 급히 육장봉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어요. 그자가 뭔데요. 당신이 나가면 그자의 체면을 세워 주는 거예요."
육장봉은 금세 온몸의 살기를 거두었다. 차갑고 냉담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좋소. 언제든 당신이 그자를 상대하기 싫으면 말하시오. 내가 대신 나서 주겠소."
"좋아요. 어서 가서 쉬세요. 다른 일은 당신이 기운을 차리면 다시 이야기해요."
육장봉의 눈에 아무리 생기가 있다고 해도, 얼굴에 쌓인 피로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두 달 치 해독약이오. 먼저 넣어 두시오…… 나중에 내가 직접 조의박을 찾아가 이야기해 보겠소."
월령안은 비단 주머니를 건네받은 뒤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희 집에 혈옥주의 해독제 처방이 있어요. 만약 약제를 모두 구할 수 있다면 혈옥주의 독을 충분히 해독할 수 있어요."
육장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청주 일이 끝나면 우리 해독약 찾으러 갑시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에요. 먼저 가서 쉬세요.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육장봉은 시원스럽게 대답했지만 월령안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인이었다. 때로는 구두 약속이 가장 쓸모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필경, 이 세상에는 늘 이런저런 부득이한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육장봉은 사흘 밤낮 동안 연일 길을 재촉했다. 지금 정말로 피곤하고 배고픈 상황이었다. 월령안이 완안경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더는 힘겹게 버티지 않고 하인을 따라 곁채에 가서 목욕하고 쉬었다.
* * *
월령안은 완안경을 바로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의 옷은 살짝 구김이 졌고 게다가 육장봉의 냄새가 배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그녀의 생활을 엿보는 것을 싫어했다. 더구나 낯선 사람이 그녀의 사적인 생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완안경처럼 속생각이 깊고 야망이 큰 사람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완안경은 꼬박 이각을 기다린 끝에야 월령안을 볼 수 있었다.
월령안은 모습을 드러낸 뒤, 한마디 해명도 없이 완안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황자 전하께서는 애초 체결했던 계약서를 가지고 오셨나요?"
"령안, 당신을 한 번 만나기가 너무 어렵군."
완안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안타까움과 총애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소."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역겨웠으나 얼굴의 표정은 변함없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황자 전하께서는 계약서를 가져오셨나요? 지금 계속 이야기를 나누실 건가요?"
"방금 전에 육장봉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소."
완안경은 말투가 메마르고 표정이 쓸쓸했다.
월령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완안경을 냉담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완안경은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오지랖이 참 넓기도 하지. 황제인 저 사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저러고 있는 걸 알고나 있을까?'
완안경은 월령안의 냉담함과 소원함에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그는 마치 월령안의 거부감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화내며 말했다.
"령안, 생각해 본 적 있소? 월 아저씨와 형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그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던 보배덩이가 육장봉에게 무시당하고도 이리 쉽게 용서해 주는 것을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는지?"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하지만 저는……."
월령안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이내 악랄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대황자 전하께서 방금 전에 하신 말씀을 들으니 당신은 살아생전에 금나라 황제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