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화 우리는 이만 먼저 가보겠네
"육 대장군, 과한 말씀이네. 소인은 일개 백성으로서 그렇게……."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부삼은 자신이 육장봉의 말에 말려든 것을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보아하니 육 대장군은 무력만 휘두를 줄 아는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군. 이러면서 육 대장군은 어찌 삼 년간 남한테 속임을 당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그동안 령안이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를 수 있나?"
"그건 저와 령안 사이 일입니다. 셋째 두령께서는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육장봉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이 일은 어떻게 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또한 그가 먼저 도리에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부삼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대장군은 령안이를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군. 아니지…… 출신이 고귀하신 육 대장군께서 출신이 평범한 령안이가 눈에 차지 않아, 하찮게 여긴 게지. 령안을 가볍게 여기니까 남한테 삼 년씩이나 속을 수밖에."
부삼은 말을 마치자 월령안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령안, 내 말이 맞느냐?"
"셋째 두령……, 다 지난 일이에요."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이미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려놓지 못할까.
"그래. 이제 다 지나간 거냐?"
부삼은 예리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월령안은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삼은 가볍게 탄식하더니 더 이상 월령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네가 지나갔다면 지나간 거지. 나는 다만 네가…… 다음에 또 억울한 일을 당하면 혼자 힘들어하지 마라. 어쨌든 너도 반은 우리 부씨 가문 사람이잖느냐."
육장봉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령안의 일로 부삼 두령을 걱정시키지 않겠습니다. 제가 있는 한, 령안을 억울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부삼 역시 냉랭한 얼굴로 육장봉과 눈을 마주치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대장군은 모르시는군? 여태까지 령안을 괴롭게 한 사람은 모두 당신…… 바로 육 대장군이란 말이오."
월령안이 누구에게 억울함을 당할 사람인가.
오직 육장봉밖에 없었다.
만약 월령안이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부삼은 벌써 사람을 데리고 가 이 못된 자식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육장봉과 부삼은 서로 마주 보며 일촉즉발의 태세에 돌입했다.
월령안은 두 사람이 다음 순간 맞붙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 그것도 상대방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절대 그만두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말이다.
월령안은 육장봉과 부삼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몸을 돌려 추수를 부르며 자리를 떴다.
"추수, 상천. 여기는 와호방 형제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가자."
그녀는 밤새 바쁘게 돌아다녔다. 옷에서도 아직 물방울이 떨어졌다. 더하여 팔의 상처까지 따끔따끔 아팠다.
그녀는 육장봉과 부삼을 위로할 기운도, 기분도 없었다.
두 사람이 싸우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육장봉도 손해를 볼 리가 없고 부삼도 이득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네, 아가씨."
상천과 추수는 거웅령을 벗어나자마자 부삼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부삼 사람들이 조운충의 병마를 막자 추수와 상천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상천은 잠시 쉬어 이미 기운을 회복했다. 추수의 부축을 받아 금방 일어섰다.
월령안이 움직이자 육장봉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는 먼저 부삼과 대치하던 시선을 거두고 부삼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얻어맞기 딱 좋게 한마디 분부했다.
"나머지 일은 부삼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부삼은 어이가 없었다.
'누가 육장봉에게 체면을 봐준다 했지? 감히 내게 폐를 끼쳐?'
"부삼 두령, 청산은 변하지 않고, 푸른 물도 마냥 흐르듯이 저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추후에 다시 만납시다."
육장봉은 부삼을 뚫어지게 한번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월령안에게 걸어갔다.
부삼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육장봉이 나를 위협하는 건가?'
"허!"
부삼은 냉소를 지으며 육장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선을 월령안에게 옮겼다.
"령안, 손에 상처가 가벼운 거 같지 않구나. 와호산이 여기서 가까우니 먼저 와호산에 가 상처를 처치하자꾸나."
월령안은 손을 들어 살펴보더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니에요. 월씨 대저택에 설옥고가 있어요. 와호산에 가서 처치하면 집에 가서 다시 약을 발라야 해요."
상처는 살갗만 한층 벗겨졌고 근육과 뼈는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월령안은 아픔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런 작은 상처로 부삼에게 폐를 끼친다면 정말로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삼의 인정 빚은 이리 쉽게 져서는 안 되었다.
"좋아. 돌아가서도 많이 조심해야 한다. 이제 네 손에 조운충이 있으니 조의박이 아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부삼은 더는 권하지 않고 다만 월령안에게 신신당부를 할 뿐이었다.
월령안은 말에 오르려다가 부삼의 말을 듣더니 잠깐 멈추고 말했다.
"셋째 나리, 제가 조운충의 두 손을 잘랐어요. 그 끊어진 손이 아직 초가집에 있을 거예요. 셋째 나리께서 형제들에게 꼭 잘 간수해 달라고 하세요. 제가 쓸 데가 있어요."
월령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육장봉이 육삼에게 명령했다.
"육삼, 가거라!"
"네, 대장군!"
육삼은 떠나기 전에 상천을 부축하고 있는 추수를 재빨리 한번 훑어보았다. 눈빛에는 한이 맺혀 있었다.
똑같이 주인 노릇을 하지만, 장군과 월 낭자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월 낭자는 비를 무릅쓰고 달려와 수하를 구해 줄 뿐만 아니라 수하에게 무척이나 신경 썼다. 하지만 그들 장군에게서는 그런 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월 낭자를 따라다니며 일을 한 다음부터, 정말이지 대장군을 배신하고 월 낭자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매일 솟아났다.
육삼은 소리 없이 탄식하고 모든 것을 단념한 채 거웅령으로 되돌아갔다.
대장군에게 수하들을 자상하게 돌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아하니 뒤처리는 나한테 폐를 끼칠 필요가 없는 것 같군. 육 대장군, 우리는 이만 먼저 가보겠네."
부삼은 워낙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육장봉의 이러한 처사는 대놓고 그에게 도발하는 것이었다.
그가 반격하지 않는다면 남들은 부삼이 조정의 사람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부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다 그만해! 가자."
조운충의 사람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아 곧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삼이 멈추라고 말하자마자 와호방의 사람들은 다짜고짜 모두 멈췄다. 조운충의 사람들은 살아날 기회가 생기자 조운충을 구하기를 바로 포기하고 뒤돌아 도망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운충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다.
월령안은 얼굴색이 바뀌더니 뒤쫓아 갔다.
"셋째 두령……!"
"령안, 이건 나와 대장군 사이 일이다. 너와는 상관없으니 끼어들지 마."
부삼은 월령안의 체면을 보아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매우 확고했다.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미소를 떠올렸다.
"셋째 두령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러 왔어요. 셋째 두령께서 저와 따지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와는 상관없단다."
부삼은 눈빛도,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럼 셋째 두령을 배웅하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살짝 창백한 얼굴빛이었다. 하지만 미소는 변함없었다.
이는 육장봉이 일찍 가장 싫어했던 미소였다. 위선적인 인사치레로 모든 진실한 감정을 숨겨 둔 미소였다.
이 순간 육장봉은 여전히 그런 미소가 싫었다. 하지만 미움 외에 약간의 안쓰러움과 미안함도 섞여 있었다.
월령안 그녀도 즐거움이나 불쾌함이나 마음대로 표현하고, 기쁘면 웃고 언짢으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밉보일 수 없고, 밉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를테면 지금 눈앞의 부삼만 해도 월령안은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육장봉은 침묵을 지키고 한쪽에 서서 더는 부삼과 기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가 부삼과 기 싸움을 하면 결국 나중에 힘들어지는 사람은 월령안이었다.
그는 추밀사이며 많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장군이었다. 그는 부삼 같은 비적에게 좋은 낯빛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부삼을 손봐주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지만 월령안은 청주에서 아직 부삼의 도움이 필요했다.
부삼은 육장봉이 그를 손보기 전에 월령안을 번거롭게 할 방법이 가득했다.
육장봉은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 설령 셋째 두령의 수하들이 일부러 도발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얼굴색이 아주 보기 흉했다.
월령안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대장군을 섭섭하게 했군요."
그녀는 육장봉과 부삼 두 사람이 서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에 만나면 틀림없이 불꽃이 튈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섭섭하지 않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지. 부삼은 당신이 도와 달라고 부른 사람이잖소. 내가 부삼을 적대시해서 당신을 난감하게 하지 말아야 했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을 귀 뒤로 정리해 주고 나서는 그의 어둡고 볼썽사납던 표정이 평소대로 되돌아왔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라도 월령안의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피곤한 기색을 띤 채 말했다.
"당신은 관리이고 부삼은 비적이에요. 당신은 본래 부삼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어요. 저 때문에 자신을 억울해질 필요도 없고요."
그녀는 육장봉이 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부삼에게 사람을 거느리고 와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만약 육장봉이 올 줄 알았다면 결코 부삼에게 전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와 비적은 원래부터 평화롭게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이 셋째 두령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삼에게 육장봉을 참아 달라고 요구할 자격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당신을 위한 것인데 어찌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역시 그가 제때 멈추고 부삼과 기 싸움을 하지 않은 게 옳았다.
만약 그가 양보하지 않고 계속 부삼과 맞섰다면 월령안이 어찌 그를 위로해 주었겠는가.
이 점 때문에라도 그는 셋째 두령의 오만방자함을 참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릴 거요."
그러나 육장봉은 부삼과 다시 만날 기회가 별반 없으리라 믿었다.
부삼과 같은 비적들이 가장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조정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