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화 제 사람은 어디에 있죠?
월령안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동 지주의 아우성은 아주 처절했지만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동 지주는 청주에서 조의박이라는 버팀목을 너무 크게 믿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적지 않게 했다.
그녀가 좀 전에 말했듯이 동 지주는 조정에서 율법에 따라 심판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동 지주를 놓아줄 권리도, 처형할 권리도 없었다.
동 지주가 끌려가고 문밖의 호위가 멀리 갔다.
건물에는 그녀와 조계안 두 사람만 남았다.
월령안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조계안이 입을 열었다.
"남아 있어."
월령안은 어이가 없었다.
'전하는 정말 병이 깊은가 보다! 지난번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마치 월령안이 거절할 것을 알고 있는 듯 조계안은 한마디 덧붙였다.
"명령이다!"
말이 떨어지자 조계안은 몸을 일으켜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월령안의 곁에 걸어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딱 오늘 밤만 있어 줘."
오늘 밤이 지나면, 그는 암황이 된다. 월씨, 범씨 두 가문의 십 년 쟁탈전을 감찰하는 암황이다.
공평무사함을 보여 주기 위해, 월씨, 범씨 두 가문의 쟁탈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월령안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명령이야!'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조계안과 눈을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남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남들에게 욕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우리 월씨 가문은 체면이 있습니다."
그녀가 명원에서 묵고 가면 내일 청주의 모든 사람들이 월씨 가문의 딸이 육체를 이용해 윗자리에 기어올랐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월씨 가문에서 그런 망신을 당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문밖에서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번쩍거리자 두 사람의 얼굴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순간 번쩍이는 번개 빛 속에서 조계안은 월령안 눈 속의 차가운 빛과 단호함을 보았다.
조계안은 눈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온몸에 분위기가 따라서 음침해졌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월령안은 몸을 돌려 폭풍우 속에 걸어 들어갔다.
"낭자!"
암위가 나타나 월령안에게 우산을 들어 주며 묵묵히 뒤를 따랐다.
월령안은 발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조계안은 방안에 서서 월령안의 모습이 차츰차츰 어둠 속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박장대소했다.
"월령안, 과연 모질구나!"
'모질어서 나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고, 일말의 희망도 남겨 주지 않는구나. 뭐 내가 조씨라서 안 된다고!'
육장봉의 어머니도 조씨이다. 육장봉도 몸속에 조씨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왜 그 자식은 거절하지 않는가.
'결국 내가 육장봉이 아니라서잖아.'
조계안은 검을 확 뽑더니 뒤돌아서 들보를 내리쳤다.
탕!
하는 굉음과 함께 들보와 기둥이 끊어지고 기와가 떨어졌다. 폭우 속에서 서쪽 건물이 우르르 무너졌다.
월령안은 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서 명원의 연회는 부득불 앞당겨 끝났다.
상인들은 곡 대인의 만류를 거절하고 비를 무릅쓰고 떠나갔다.
월령안이 나왔을 때 뭇사람들은 이미 흩어지고 월씨 가문의 마차만 밖에 있었다.
"아가씨!"
"큰아가씨."
육삼과 추수가 함께 걸어왔다. 육삼은 우산 하나를 들고 추수 옆에서 걸었다.
우산은 대부분 추수에게 쏠려 있었다. 빗물이 우산 면을 따라 흘러내려 육삼의 정수리를 적시면서 그에 따라 온몸이 흠뻑 젖었다.
반면 추수는 상체에 빗물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월령안은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가자."
월령안은 암위의 손에 든 우산을 받아 쥐고 마차에 올랐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마차는 어둠 속에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렸다.
갑자기 마차가 멈추고 육삼이 마차 문을 열더니 나무함을 들이밀었다.
"큰아가씨, 방금 누가 마차를 막고 이걸 보내주었습니다. 지명해서 꼭 아가씨께 드리라고 하면서 상천 형제와 관련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월령안은 나무함을 열어 보았다. 함에는 피범벅이 된 엄지손가락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에는 피로 붉게 물든 반지가 있었다.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는 바람에 엄지손가락이 더욱 희고 음침해 보였다.
"아가씨, 상천의 손가락이에요."
추수는 한눈에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월령안도 알아봤다. 나무함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은 너무 힘이 들어가 하얗게 되었다.
피범벅이 된 손가락 밑에는 편지가 있었다.
월령안은 심호흡을 하고서 편지를 꺼냈다.
번개가 다시 번쩍이자 월령안은 눈을 크게 뜨고 핏빛 글씨를 보았다.
'이 세자가 거웅령에서 월 낭자가 오기를 기다리겠다! 기다리는 동안 반 시진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를 것이다.'
"조운충!"
월령안은 끝부분의 낙관을 본 다음 편지지를 마구 주물러 구겨 버렸다.
"아가씨……!"
추수는 월령안 옆에 서 있어서 역시 편지의 글을 읽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성은 그녀에게 이것이 함정이니 반드시 아가씨를 막고 아가씨더러 모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무함에 담긴 손가락을 보니 상천이 떠올라 설득하려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상천이 조운충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만약 아가씨가 가지 않으면 상천은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차에서 내려! 거웅령으로 가자."
월령안은 추수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결정을 내렸다. 마차에서 뛰어내려 호위의 말을 빼앗아 올라탔다.
"즉시 부삼을 찾아가 내가 거웅령에 있다고 알려라."
말을 마치자마자 월령안은 말을 몰아 달려갔다.
밤길은 원래도 워낙 걷기 힘들었다. 오늘은 특히 폭풍우까지 억수로 쏟아져 빗물이 눈앞을 가렸다. 월령안은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청주를 익히 알고 있기에 느낌대로 눈을 감고 앞으로 달려갔다.
한번은 하마터면 나무에 부딪칠 뻔했다. 다행히 번개가 번쩍이며 앞을 환하게 비추는 바람에 제때 방향을 돌려 사고를 모면했다.
"아가씨, 천천히 가세요!"
그녀의 뒤를 따르던 추수는 놀라 혼비백산했다. 한달음에 달려가 월령안을 막아 세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녀는 상천을 걱정하느라 자신의 직책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아가씨더러 모험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큰아가씨, 저를 앞에서 달리게 해 주세요."
육삼도 놀라기는 추수보다 덜하지 않았다. 번갯불에 월령안이 하마터면 나무에 부딪힐 뻔하고 또한 그녀를 태운 말이 물웅덩이를 밟아 그녀를 떨어뜨릴 뻔하자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얼굴을 힘껏 훔치고 다리로 말을 단단히 고정하고 쫓아갔으나 끝내 월령안을 따라잡지 못했다. 조급한 나머지 뒤에서 소리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는 바람에 두 사람이 뒤에서 목이 터지게 외쳐도 월령안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설령 그 소리를 들었더라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대낮이라도 성안에서 말을 타고 거웅령까지 전력을 다해 달리면 한 시진 반이 걸린다. 오늘 밤은 악천후라 그녀가 두 시진 이내에 거웅령까지 도착할 수 있다면 빠른 셈이다.
조운충의 편지에 따르면 반 시진마다 상천의 손가락을 하나씩 끊일 것이라고 했다. 두 시진이면 네 손가락에 앞서 그녀에게 준 한 손가락을 더하면 손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거웅령에 재빨리 도착해야 했다. 조운충이 이유를 찾아 상천을 괴롭히게 해서는 안 되었다.
비바람이 너무 심해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저항력을 줄이기 위해 월령안은 말의 목을 안고 상체를 말 등에 딱 붙였다.
다행히도 청주는 상업이 발달해 마차가 자주 성을 드나들었다. 때문에 청주의 이 관도는 넓고도 크게 닦았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월령안처럼 달렸으면 말에서 몇 번을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듯이 달려 두 시진이 지나 월령안과 육삼, 추수는 거웅령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릴 때, 월령안은 다리에 힘이 빠졌다. 추수의 부축이 없었다면 그녀는 진흙탕에 곤두박질을 쳤을 것이다.
"아가씨!"
추수는 온몸이 흠뻑 젖은 월령안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괜찮아, 어서 가자!"
월령안은 얼굴을 훔치고 거웅령으로 걸어갔다.
"아가씨, 함정일지도 몰라요.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추수는 월령안을 자기 등 뒤로 보내고 앞에서 걷고 육삼더러 뒷길을 살피게 했다.
"아가씨, 어디로 갈까요?"
거웅령은 매우 컸다. 조운충은 다만 거웅령이라고 말했을 뿐, 구체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번에 조정의 흠차 대신들이 발을 묶였던 분지로 가거라."
거웅령의 길은 원래 걷기 어려웠다. 이 시각 장대비까지 내려 월령안 등 세 사람은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반 시진 가까이 걸어서야 비로소 월령안이 말한 분지를 찾을 수 있었다.
조운충은 과연 분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운충의 사람들은 분지 한가운데에 초가집을 지었다.
조운충은 초가집에 앉아 있었다. 초가집 가운데에는 불이 있었고 양쪽으로 체구가 우람한 병사가 두 줄 서 있었다.
불빛이 조운충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동시에 그의 등 뒤 어둠을 더욱 오싹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제가 왔네요."
월령안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초가집에 들어가 조운충과 눈을 마주쳤다.
빗줄기가 너무 강해 월령안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그녀는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상천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사람은요?"
"두 시진 반, 월 낭자…… 말해 보시지. 내가 그 자식의 왼손을 자를까 오른손을 자를까?"
조운충은 몸에 흰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 망토는 무슨 옷감인지 빗물이 전혀 묻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밤, 깔끔하고 상쾌한 조운충은 다른 사람들을 더욱 볼썽사납게 보이게 했다.
"조 세자가 오라고 해서 약속대로 왔네요. 이제 사람을 좀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월령안은 조운충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직접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월령안은 불의 온기에 온몸이 푹 젖었던 것이 적지 않게 따뜻해졌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도 어느덧 핏기가 돌았다.
"쯧쯧쯧, 월 낭자의 이 모습은……."
조운충은 월령안을 사악하고 방자하게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당신의 그 언니보다 못지 않군. 당신의 그 언니는 그야말로 사람 혼을 빼 주던데 말이야.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 형부라고도 할 수 있지."
"무례하군."
월령안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육삼과 추수가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손을 쓰려 하자 월령안이 막아섰다.
"개하고 무엇을 따지겠느냐."
"월 낭자의 입 솜씨는…… 시험해 보고 싶군."
조운충은 여전히 월령안을 방자하게 훑어보았다. 시선은 곧 월령안의 가슴 위에 떨어졌다.
옷이 빗물에 홀딱 젖었다 보니 몸에 칭칭 감겨 있던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그의 파렴치한 시선에 시달리고 말로 희롱을 당하면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월령안은 차분하게 반쯤 마른 치맛자락을 한 겹 찢어 내어 몸에 걸쳤다.
"저를 화나게 하려고요? 당신은 아직 멀었어요. 조 세자, 제 사람은 어디에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