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이번에는 내가 해냈어
얼마 가지 않아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시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웅 표두는 보고 들은 것이 많은데다 좀 전에 월령안의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히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육삼도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가 아니었다. 비록 전에는 암흑가 사람들과 별로 접촉이 없었지만 천하의 권력다툼은 모두 똑같았다. 그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육삼은 월령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전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대장군은 정말 안목이 좋았다. 마님과 대장군은 정말 하늘이 점지해 준 한 쌍이었다.
월령안 일행은 곧 와호산 사람의 안내 하에 의사청(議事廳)에 들어섰다.
의사청 안, 얼굴이 험상궂고 체격이 건장한 장정 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녀에게 포권하여 예를 올렸다. 마음대로 곁눈질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좀 전에 맘대로 곁눈질하던 자는 이미 월령안의 손에 죽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다시 한번 그녀의 성격을 시험해 보고 싶지 않았다.
육삼의 손은 줄곧 칼자루에 놓여 있었다. 수시로 칼을 뽑아 월령안을 위해 위엄을 돋워 주려 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녹림호걸들은 월령안 앞에서 서원의 선생 앞에 선 서생들보다 더 얌전했다. 일순간 저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청주의 암흑가 사람들은 다 이렇게 쉬운가.
바로 그때, 금빛 호랑이 무늬의 검은색 괘자(褂子 - 소매가 없고 등솔기가 길게 찢어진 옷)를 입은 중년 남자가 내실에서 걸어 나와 월령안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월 가주!"
남자는 잘생긴 외모에 기품이 있었다. 거칠고 사나운 호랑이 무늬 괘자를 걸쳤어도 부드러운 기품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녹림 인사 같지 않고 오히려 서원의 대유학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자가 의사청에 서 있어도 전혀 뜬금없어 보이지 않고 아주 조화롭다는 것이었다.
월령안은 남자에게 살짝 허리를 굽혀 존경을 나타냈다.
"셋째 나리!"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의사청 안의 다른 장정들도 모두 일어나 예를 올렸다. 월령안에게 예를 올리던 것과 달리 남자에게 예를 올릴 때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남자는 전혀 느끼지 못한 듯이 또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눈길조차 뭇사람에게 주지 않았다. 오직 월령안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셋째 나리, 축하합니다."
웅 표두는 남자에게 예를 올리고 월령안의 뒤에 가서 섰다.
"귀댁 큰아가씨 덕분이지."
뭇사람들에게 셋째 나리로 불리는 남자는 상석에 있는 호랑이 가죽 의자에 앉았다.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것이 총애에도, 모욕에도 놀라지 않는 모습이었다.
웅 표두는 일시에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몰라 헛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월령안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 나리는 담담히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술잔을 들고 정색하며 말했다.
"오늘 일은 와호방(臥虎幇)이 월 가주에게 무례했네. 앞으로 월 가주께서 시킬 일이 있으면 우리 와호방은 감히 거절하지 않을 것이네."
월령안 역시 옆에 놓인 술을 들고 대범하게 말했다.
"그 일을 아까 거기서 끝났어요. 그 사람은 제가 이미 죽였으니 지나간 것입니다. 셋째 두령께서 앞으로 많이 보살펴 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월령안은 먼저 술을 단숨에 비웠다.
셋째 나리도 월령안의 체면을 확실히 봐주었다. 술을 그릇째로 한입에 마시고는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말했다.
"앞으로 암흑가에서 월 가주를 괴롭히는 건, 곧 나 부삼(傅三)을 괴롭히는 것이다."
부삼은 원래 와호방의 셋째 주인이었다. 청주 암흑가에서는 모두 '셋째 두령' 혹은 '셋째 나리'라고 불렀다.
셋째 두령의 이름은 암흑가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설령 아는 사람이 있어도 감히 부를 사람이 없었다.
"오늘 밤 일은 셋째 두령께 부탁드립니다."
월령안은 말을 마치자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었다. 표사 차림을 한 사나이 여덟 명이 큰 상자 네 개를 메고 들어왔다.
여덟 명은 의사청 한가운데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자 그 속을 가득 채운 은괴가 횃불 아래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뭇사람들은 하마터면 그 빛에 눈을 상할 뻔했다.
"은괴잖아?"
"이거 우리에게 주는 거야?"
"월 가주, 대범하시군!"
부삼은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한가운데 놓인 돈을 보자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하여 일어섰다. 당장 달려들어 돈을 품속에 껴안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작은 성의예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월령안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았다.
암흑가의 사람들은 의리를 중히 여겼다. 하지만 이익이 우선이었고 이익이 없는 일에 그들은 힘을 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월 가주께서 씀씀이가 대단하시군. 오늘 밤은 월씨 가문에 주는 내 첫 만남 인사인 것으로 하지."
부삼은 얼굴의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속에는 거절의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앞으로 더는 월령안과 협력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월령안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태도 역시 단호했다.
"이는 제가 셋째 두령께 드리는 것입니다."
부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월령안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월령안도 대범하게 마주 보면서 상대방이 지켜보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부삼이 지금 그녀와 지속적으로 협력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접전은 곧이어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의사청의 몇몇 장정은 숨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 상자에 가득 담긴 은괴도 그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들은 불안에 떨며 부삼과 월령안을 지켜보았다.
한참 뒤에 부삼은 드디어 눈길을 거두고 대답했다.
"좋네!"
"셋째 두령,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등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부삼의 한마디 '좋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월령안은 청주에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청주에서 서남 장사를 포함한, 어떤 장사를 하든지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거웅령은 청주와 촉주(蜀州)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양쪽은 물에 닿아 있고 한쪽은 촉주의 끊임없는 산맥과 이어져 있으며 다른 한쪽은 청주와 접하고 있었다.
거웅령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밖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가 어려워 청주와 촉주 현지 백성들은 감히 거웅령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조정의 흠차 대신들이 거웅령에 숨어든 것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월령안이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급히 사람을 이끌고 구원하기에 급급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늦으면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시체도 남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월령안과 부삼이 사람을 이끌고 거웅령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웠다. 정탐꾼이 먼저 산에 들어가 있다가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달려와 보고했다.
"조정의 인원은 아주 적습니다. 거웅령의 북쪽 어느 한 옴폭 들어간 곳에 밀려난 채 포위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다만 조정 사람들 중에 고수가 있습니다. 그의 무예가 뛰어나 잠시 수비군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음. 알았다. 들어가자!"
부삼 나리는 보고를 다 듣고 먼저 말을 몰아 거웅령에 들어갔다. 동작이 날렵하지만 경솔하고 성급해 보이지는 않았다. 녹림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문인의 풍모를 지닌 무장 같아 보였다.
"형제들, 산에 들어갑시다!"
그를 뒤따라온 녹림 호걸들의 동작도 느리지 않았다. 부삼 나리와 말 한 필의 거리를 두고 역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웅 표두도 뒤처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부하 표사들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돌진했다.
"큰아가씨, 저희도 산속에 들어갑니다."
"잘 살펴보세요."
월령안은 한마디 당부했다. 눈매가 차갑고 도도하며 다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냉담함이 깃들어 있었다.
육삼은 옆에서 지키고 있을 뿐, 감히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는 지금의 월령안에게서 그들 대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참히 무찌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강대하고 냉정하며 흉악하고 사나워 감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틀림없이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그의 눈이 침침해진 탓일 것이다.
육삼은 몰래 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등을 곧게 폈다.
그가 대장군 밑에서 만큼 월 낭자 밑에서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삼의 곧은 등은 월령안이 차가운 눈초리로 쓸어보자 그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는 월 낭자가 대장군보다 더 흉포한 것 같다고 느꼈다.
다행히 거웅령 쪽에서 곧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 월령안의 주의를 끌었다.
월령안은 더는 얼이 빠져 있는 육삼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선을 대웅령 쪽으로 돌리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마 안 되어 거웅령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연중에 또 청주 수비군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린 군인이다! 화적이 아니다!"
'바보 멍청이들!'
달빛 아래에서 월령안은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었다.
신분을 드러내면 부삼이 산 증인을 남겨 둘 수가 있겠는가.
한 시진이 지난 뒤, 웅 표두의 사람들이 관을 메고 나왔다.
"큰아가씨, 다행히 임무를 제대로 완수했습니다."
"좋아요!"
월령안이 말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부삼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얼굴에 악귀 가면을 쓴 남자를 부축하고 나왔다.
'조계안?'
그녀는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월령안은 양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말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셋째 두령, 그 사람 혹시 조 대인……."
"월령안……!"
조계안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피를 토했다.
"내가 네 어머니를 모시고 왔어."
달빛 아래 조계안은 흡혈귀 같은 미소를 짓더니 곧 온몸에 힘이 빠져 나른해지면서 무너져 내렸다.
"조 대인……!"
월령안은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조계안은 그녀의 품에 기대어 미약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번에 나는 네 앞까지 버티고 와서 쓰러졌다!"
말이 끝나자마자 조계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고 온몸을 월령안에게 맡겼다.
월령안이 팔이 무거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큰아가씨, 저에게 맡겨 주세요."
육삼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월령안의 손에서 조계안을 넘겨받아 등에 업었다.
"음."
월령안의 시선은 조계안의 귀신 가면에 닿았다.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십 년 전에 북요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유골을 가져온 것이 육장봉 한 사람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만난 사람은 육장봉 한 사람뿐이었고 그녀를 위로해 준 사람도 육장봉뿐이었다.
조계안의 말에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