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그때는 내가 잘못했소
육장봉은 시선을 내리깔고 무거운 얼굴을 했다.
그는 언젠가 기회를 봐서 월령안과 이혼서에 관해 자세하게 해명을 하여 월령안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 주자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월령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훤히 꿰뚫고 있었다.
월령안은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하지 마세요! 절대 저한테 미안하다는 종류의 말을 하지 마세요. 미안해하실 것이 없어요. 그때 한쪽은 군신이고, 함께 자란 형제이자 같은 조상과 가문을 가진 사촌이었고 다른 한쪽은 얼굴도 모르지만 끈질기게 매달렸던 아내이니 그들의 편을 든 것이 당연한 거예요. 저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냉정하고 이지적이나 의리와 정을 중시하는 사람. 이것이야말로 육장봉이지 않는가?'
"그때는 내가 잘못했소. 내가 너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겼소."
육장봉은 월령안 앞으로 걸어가 가볍게 월령안의 허리를 당겨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앞으로 내 선택은 당신뿐이오. 내가 지킬 사람도 당신뿐이오!"
이번에 월령안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협조하지도 않고 육장봉이 안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창밖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항상 맑던 눈동자가 지금은 막막하기만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육장봉은 그녀 평생의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제 육장봉을 미치도록 싫어했지만, 동시에 그가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쳐 올 때마다 조금씩 흔들릴 정도로 깊은 곳에 그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잘 생각해 보아야 했다.
월령안은 천천히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문밖에서 양홍엽의 명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월 언니, 월 언니……."
"이 손 놓으세요! 애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칠라!"
월령안이 굳어지더니, 순식간에 육장봉이 만들어낸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육장봉을 밀어젖히고 머리를 숙여 자신의 옷자락을 정리하였다.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남과는 정말 맞지 않는군!'
양홍엽은 함께 놀려고 월령안을 찾아온 것이었다. 길에서 자기에게 선물을 주러 가던 추수를 만난 양홍엽은 내외하지 않고 바로 추수의 손에서 하나를 골라 목에 두르기까지 했다.
양홍옆은 앞뜰로 들어왔다. 그러나 앞뜰에 사람이 보이지 않자 홀로 월령안이 묵는 뒤뜰까지 온 것이었다.
양홍엽은 털털하지만 사람 됨됨이는 꼼꼼해서 뜰에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요령 있게 소리쳤다.
양홍엽은 서남 백성 특유의 높고도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마당 하나를 사이 두고도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밀치고 나서야 자기가 과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내숭을 다 떤' 뒤였으니 육장봉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먼저 나갈게요."
월령안은 살짝 정리를 하고 또 구리 거울을 한번 비추어 보았다. 목에 두른 목수건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걸어갔다.
"요리산에 가는 것이오?"
육장봉은 어젯밤 양문종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절대 자기가 한낱 코흘리개에게 질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기억력이 좋을 뿐이었다.
"네."
이것은 그녀가 정했던 계획이었다. 육장봉 때문에 일정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 꼬맹이도 같이 가오?"
육장봉이 또 물었다.
"전 그저 양홍엽만 불렀지요. 그러나 예외가 없는 한, 그도 분명 같이 갈 거예요. 또 다른 사람도 불러서 그 애 혼자만 가는 것은 아닐 거예요."
월령안은 줄곧 양문종을 피했다.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녀가 일시적으로 너무 신나는 바람에 경계하는 것을 잊은 탓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러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선을 지킬 것이다.
그녀는 비록 육 대장군을 '맞이하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거절하지도 않았다.
생각을 한 뒤, 월령안은 해명을 덧붙였다.
"요리산은 나씨 가문의 영역이에요. 양홍엽이 절 데려가지 않는다면 전 갈 수가 없어요."
"뭔가를 찾고 싶은 것이오?"
육장봉은 비록 월령안 곁에 있지 않았으나 월령안 옆에는 모두 그의 눈이었다. 월령안이 서남에서 뭘 하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월령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옥이 깔린 강을 찾고 있어요. 서남의 옥광은 범씨 가문, 담(譚)씨 가문 등 몇몇 대상인들이 손에 쥐고 있어 제가 개입할 수 없어요. 제가 이쪽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다른 곳에서 상품의 공급원을 찾아야 해요. 아버지께서는 진작에 서남에 오셨다가 한 강의 바닥에 깔린 돌이 옥인 것을 발견하셨어요. 서남은 아주 큰데다 아버지께서는 밤에 나가셨던 것이라 길과 구체적인 환경을 기억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강을 하나하나 찾아 볼 수밖에 없어요."
"같이 갑시다."
육장봉은 긴 다리를 쭉 뻗어 월녕안쪽으로 걸어갔다.
육 대장군의 신분은 너무 높았다. 그와 함께 간다면 반드시 양 토사, 송 토사, 심지어 전 토사의 주의도 끌 것이 뻔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육장봉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면 그들 젊은이들은 놀러 다니는 것이었다. 전 토사가 불쾌하더라도 별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육장봉을 데리고 전씨 가문의 영역으로 간다면 전 토사는 분명 그들이 뭔가를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월령안이 머뭇거리고 있던 순간에 양홍엽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월 언니, 빨리 나오세요. 우리 모두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막내 삼촌이 송씨 오라버니와 언니를 초대해 우리 함께 요리산에 사냥하러 가기로 했어요. 막내 삼촌이 오늘 요리산에 가서 사냥도 하고 밥도 짓재요."
"갑시다."
육장봉이 먼저 나갔다.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뜸 들일 필요가 없지.'
월령안과 육장봉이 동시에 걸어 나갔다. 뜰 밖에서 양홍엽은 다급히 또 재촉했다.
그러나 막상 월령안을 마주하자 양홍엽은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대, 대, 대……장군, 왜, 왜, 왜 월 언니 방에서 나오시는 거죠? 두 분 혹시 어젯밤에……."
너무 놀란 탓에 양홍엽은 뒤로 넘어지면서 발도 쳐들어 하마터면 뒤로 구를 뻔했다. 그녀는 매우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깜짝 놀라 재빨리 다가가 양홍엽을 일으켰다.
"홍엽이 아프지 않아? 옷은 더러워지지 않았어? 내가 가서 다른 옷을 찾아올게."
"아니, 아니에요. 월 언니, 전 괜찮아요. 전 단지 발밑이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이에요. 바닥도 더럽지 않으니 털면 돼요."
양홍엽은 작은 얼굴을 붉히며 힘껏 치마를 잡아당겼다. 방금 전, 자신의 낭패를 월 언니에게 다 보여 준 것을 생각하자 그녀는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여 몰래 육장봉에게 눈을 부릅뜨고 이를 꽉, 악물었다.
그녀는 이 사람이 싫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월 언니를 빼앗아 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홍엽이 간 크게 육장봉에게 '메롱'을 해 보였다.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월령안이 좋아하지만 않았더라면 진작에 진주를 시켜 밖으로 내던졌을 거야.'
월령안은 양홍엽의 옷이 아직 멀쩡한 것을 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손을 내밀어 양홍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네 월 이모는 비밀을 지켜 줄 거야. 절대 다른 사람들이 네가 넘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할게."
양홍엽은 성격이 시원스러운지라 바로 내려놓았다. 먼젓번의 일이 떠오르자 양홍엽은 몰래 육장봉을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월 언니, 이 나쁜…… 이 대장군이 어떻게 언니의 방에 계셨어요? 어젯밤 저분과 함께 아기 낳는 일을 하신 건가요?"
이번에는 월령안의 얼굴이 빨개질 차례였다.
'서남의 소녀들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들인 거지? 매일 아기 낳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는 건가?'
육장봉은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쩌다 양홍엽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이 여자애가 매일 월령안 앞에서 그의 막내 삼촌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그는 이 여자애가 월령안을 찾아오는 것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양홍엽은 목소리가 작아 뒤에 있는 육장봉이 듣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월령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또 낮은 목소리로 건의를 제기했다.
"월 언니, 정말 저분과 아기를 낳을 거예요? 저분은 비록 좀 잘생기긴 했지만 아주 무섭게 생기셨는걸요. 저분과 아기를 낳지 마세요. 만약 태어난 아기도 무섭게 생겨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러면 아기가 분명 아주 슬플 거예요."
육장봉 얼굴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 소녀는 너무 성가시군. 역시 내던져 버려야 했어.'
양홍엽은 길가는 내내 아기를 낳는 주제를 가지고 재잘거렸다. 월령안은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소녀의 흩어진 생각을 다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양홍엽도 그저 말하는 것뿐이었다. 월령안이 말을 잇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는 것을 보고 말을 마친 뒤, 또 요리산의 일을 꺼냈다.
양문종과 송씨 남매는 모두 앞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양홍엽의 목소리가 들리자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앞으로 다가갔다. 월령안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세 사람은 월령안 뒤에 있는 육 대장군을 보았다.
양문종과 송 토사의 아들 송옥성(宋玉成) 얼굴의 미소가 바로 굳어졌다. 그들은 인사하는 말도 차마 하지 못했다.
송씨 가문 여식의 눈에는 월령안만 있는지라 육 대장군을 아예 보지 못했다.
송씨 가문의 여식은 월령안을 보자마자 양홍엽처럼 즐거운 얼굴로 다가가 육장봉을 밀치고 월령안의 다른 한쪽 팔을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월 언니, 경대를 주셔서 고마워요. 너무 예뻐요. 너무 좋아요. 월 언니, 저 이미 목에 둘렀어요. 보세요! 어때요? 예뻐요?"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남에서 월령안을 주로 노리는 무리들이 소년이 아니라 소녀들이었어?'
육 대장군은 역시 분위기를 깨는 고수였다.
그가 나타나자 양문종과 송옥성은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월령안에게 매달리던 송씨 가문 여식도 육 대장군이 출발하자고 말하니 묵묵히 월령안의 손을 놓았다.
그녀도 자기가 왜 월령안의 손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육 대장군은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하게 두려움을 느껴 본능적으로 월령안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심지어 월령안과 가까이 서지도 않았다.
"엉엉엉……. 홍엽아, 저 대장군 좀 무서워!"
송씨 가문 여식은 겁을 먹고 묵묵히 맨 뒤로 걸어가서 양홍엽의 손을 잡고 오돌오돌 떨었다.
'대장군은 분명 그리도 잘생겼는데 난 왜 대장군이 흉악하게 느껴지는 거지? 내 눈이 안 좋은가?'
"옥기(玉琪)야, 말하지 마. 네가 말을 하니 내가 울고 싶어지잖아. 너한테 몰래 알려 줄게. 아까 내가 월 언니를 부르러 갔을 때, 난 깜짝 놀라서 넘어졌어. 그것도 월 언니 앞에서. 창피해 죽겠어."
양홍엽은 잔뜩 심통이 나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나더러 대장군과 멀리하라고 하셨어. 대장군 이 사람은 우리가 넘볼 수 없대. 우리 할아버지도 정말 미치신 거 아니야? 이렇게 무서운 늙은 사내를 내가 어찌 좋아할 수 있겠어? 난 월 언니에게 시집가도 저 남자한테는 시집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