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십이 년 전의 혼약
월령안은 완안경과 혼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금나라 황실과의 혼약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의 혼약서는 본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뭘 썼는지 모릅니다. 전 다만 아버지께서 제가 금나라로 시집가는 것의 전제가 월씨 가문 가주가 될 수 없을 때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기억합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그때 두 가문의 혼약이 성립될 수가 없어요. 만약 완안 오라버니께서 혼약 때문에 오셨다면 우리 사이에 상의할 얘기가 없을 듯합니다."
월령안 얼굴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지만 말에서는 소원함과 차가움이 묻어났다.
완안경은 눈앞의 낯설고도 익숙한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월령안은 이미 그에게 매달려 시집가겠다고 떠들던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정도 없었다. 심지어 그를 깊게 경계하기까지 했다.
완안경은 마음속의 실망감을 감추고 이성적으로 월령안을 설득하려 했다.
"령안, 만약 나한테 시집오면 금나라는 병사를 파견해 주나라를 도와 북요를 멸할 수 있단다. 이것으로 월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자유를 바꿀 수 있지."
"완안 오라버니, 사람을 잘못 찾으셨어요. 육 대장군의 호위병이 바로 제 저택에 있는데 그들더러 와서 오라버니와 얘기하라고 할까요?"
돌 탁자 아래에 놓은 월령안의 두 손이 꽉 움켜쥐었다.
'북요를 멸해? 완안경, 아니, 금나라는 뭘 하려는 속셈이지?'
"넌 북요를 증오해. 아니야?"
'나한테 시집오면 모든 문제가 순리적으로 풀리게 되는데 월령안은 왜 거절하는 거지?'
"전 조의박 삼형제도 증오하는걸요."
'내가 증오하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데 다 멸할 수나 있겠어? 또 내가 북요인을 증오하고, 북요인을 날 증오하지 않나?'
"네가 원한다면 난 그들을 죽여 줄 수 있어."
완안경과 월령안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월령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또다시 그를 거절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이 바로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한테서 얻은 이익이지요. 완안 오라버니, 전 간도 작고 죽음도 두려워해요. 전 돈은 좋아도 이런 이익은 바라지 않아요. 특히 집까지 찾아와서 주는 이익이라면 더요."
완안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의할 여지도 없는 것이냐?"
'내가 너무 서둘러 표현하여 령안을 놀라게 했나?'
"장사라면 상의할 수 있지만 혼사라면 안 합니다. 저 월령안의 혼인은 장사가 아니니까요."
월령안은 일어나서 완안경에게 예를 올렸다.
"완안 오라버니, 시간도 늦었고 오라버니께서 술도 깨셨으니 전 이만 오라버니를 잡지 않겠습니다."
완안경은 어두운 안색으로 씁쓸하게 말했다.
"령안, 네가 믿든, 말든 너에게 알려 줘야겠구나. 난 성의를 가지고 너와 혼인하러 온 것이다. 내가 너와 혼인하고 싶은 것도 내 진심이지 이익과 상관이 없단다. 내가 그런 것을 말한 것은 단지 널 흔들고 싶었을 뿐이란다."
"알아요. 금나라에는 성인이 된 황자가 여섯 분 계시지요. 만약 제가 금나라 황실에 시집간다면, 제가 고른 남편감이 바로 다음 제왕일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완안경의 성의를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겹겹이 쌓인 이익 속에서 완안경이 진심이라 해도 그 진심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금나라의 황제에게 월령안은 그저 쓰기 좋은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중 오직 나만이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다. 나만 계속 널 기다리고 있었다."
월씨 가문이 몰락한 뒤, 그의 부황과 형제는 모두 그 혼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그만 그와 손가락을 걸고 달콤하게 말하던 여자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완안 오라버니, 령안이가 크면 가장 예쁜 신부가 될 거예요. 령안이를 데리러 오세요."
그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온 것이다.
"완안 오라버니, 저와 혼인하겠다는 이유가 금나라의 황위를 위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월령안은 미소로 마음속의 비웃음을 감췄다.
"당연히 아니지!"
그때, 그의 부황과 월령안의 아버지가 혼인을 약속할 때, 월씨 가문은 몰락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부황은 그 혼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동생들도 진작 대갓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구혼하러 온 것은 절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건가요?"
월령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억지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렇다."
완안경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월령안은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제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완안 오라버니가 절 만났을 때, 전 겨우 여섯 살이었네요!"
완안경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오라버니는…… 여자 아동을 좋아하시는 거군요!"
월령안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목소리도 냉혹해졌다.
완안경이 말했다.
"아니다!"
그러나 월령안은 완안경의 해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
"완안 오라버니, 전 이만 오라버니를 잡아 두지 않겠어요."
완안경은 잠깐 멍해졌다가 한참 뒤에야 월령안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령안, 넌 꼭 이렇게 해야겠느냐?"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주나라 사람이에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완안경에게 예를 올리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나를 위해 주나라와 손을 잡고 북요를 멸하겠다고? 역시, 남자는 여인을 방패막이로 삼기를 좋아하는구나.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야심을 사랑으로 포장하려 하는구나.'
월령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시선에는 조롱이 담긴 웃음이 가득했다.
월령안은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육십이가 재빨리 안으로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월령안은 잠깐 멈칫하다가 돌아서서 육십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가자. 월 누님이 보시지 못하게 하자고."
육십이는 다급해졌다. 그가 마대를 들고 돌아서서 뛰려고 하는 순간, 뒤에 있는 사람이 꼼짝도 하지 않자 자기도 모르게 급해졌다. 그는 상대방을 힘껏 밀었다.
"전 이미 봤어요."
월령안이 말했다.
"월 낭자."
육십이에게 밀려 비틀거린 호위가 절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 월 누님?"
육십이는 잠깐 굳어졌다. 그는 바로 손에 든 마대를 버리고 재빨리 돌아서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처럼 감히 월령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당신들은 지금……."
"낙엽을 담으려고."
"대추를 치려고."
육십이와 호위로 분장한 장병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또 동시에 서로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눈빛으로 상대방이 일을 그르쳤다고 질책했다.
월령안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녀는 그들이 버린 마대와 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이렇게 준비를 제대로 해 놓고 지금 저한테 낙엽을 담고 대추를 친다고 말하는 건가요?"
'사람에게 마대를 씌우려 했던 거잖아.'
"월 누님, 우리는……."
육십이는 풀이 죽어 감히 월령안을 바라보지 못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이, 그는 금나라의 황자예요. 만약 우리 집에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하겠어요?"
"월 누님, 제가 잘못했어요."
육십이는 아주 빨리 잘못을 시인했다. 월령안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그를 때리려거든 우리 영역에서는 안 되죠. 또 서둘러서도 더욱 안 되고요."
"월 누님, 우리가 저자를 때리려고 한 것을 혼내시지는 않는 거죠?"
'월 누님은 저 무슨 대황자라는 인간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거지?'
"때리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반드시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해요. 사람들이 만약 당신들이 했다는 것을 알아낸다면 전 당신들의 품삯을 깎을 거예요!"
월령안은 경고하듯 육십이를 노려보았다.
이 일은 육십이가 시작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호위는 바로 긴장해지며 정중하게 장담했다.
"월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육십이를 잘 감시해서 그가 사고를 치지 않게 할게요."
육십이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 억울해.'
"좋아요. 여러분들이 있어서 아주 시름이 놓이네요."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육십이와 호위는 모두 움직이지 못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대장군께 서신을 쓸 때, 금나라가 북요를 멸할 생각이 있다고 말하세요."
그녀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
* * *
북요와 주나라의 담판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북요에서 관리를 보내 육장봉과 담판하게 했다. 양측이 마주하자 육장봉은 그 관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 앞에서 죽여 버렸다.
"사람을 바꾸어라!"
육장봉은 피가 흥건한 검을 육이에게 던져 주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남은 북요 관료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우리 북요를 이길 수 있는 무장은 역시 남다르군!'
외교 사신이 살해되자 북요의 관리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들은 즉석에서 국서를 써서 육장봉의 행위를 질책했다.
그러나 조정의 지배가 멀리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다. 변방에서는 육장봉의 말이 법이었다. 북요의 국서는 변경에 닿지도 못했다.
북요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주나라의 주둔군과 교섭하게 했다. 하지만 주나라의 주둔군은 대답하고 사람을 남겨둔 채, 돌아섰다.
주나라의 무성의한 태도는 북요의 모든 사람을 화나게 했다. 주나라가 순순하게 나오지 않자 북요도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고 사신을 더 파견하지 않았다.
육장봉도 재촉하지 않았다. 마치 북요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육장봉은 진작에 북요로 잠입하여 현음 장공주를 만났다.
현음 장공주는 북요인들에 의해 지하 궁전에 감금되었다. 자유가 없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다 괜찮았다. 생활은 심지어 호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현음 장공주를 감시하는 사람은 북요의 새 남원대왕 야율신(耶律辛)이었다.
이 새 남원대왕은 월령안과 현음 장공주가 받들어 올린 사람이었다. 양쪽은 정치적 동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가 손해를 입으면 양쪽이 다 피해를 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양쪽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 왔구나."
현음 장공주는 육장봉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불만스러워했다.
"역시 네 아버지처럼 감정으로만 일을 처리하는구나!"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현음 장공주를 힐끗 보고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나갔다.
현음 장공주도 잡지 않고 육장봉이 떠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모자 사이는 적보다 더 차가웠다.
그러나 육장봉의 모습이 지하 궁전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현음 장공주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주, 이게 무슨 고생인가요?"
현음 장공주의 시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손수건을 현음 장공주에게 건네주었다.
"힘들지 않다!"
현음 장공주는 얼굴의 눈물을 닦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는 굳센 의지만 남아 있었다.
"내가 비록 그를 낳았어도 그를 기른 적은 없었다. 또 그가 원하는 온정을 줄 수도 없지. 난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그가 날 존경하고 사랑해 주기를 바랄 자격도 없다. 날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할 자격은 더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