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618)화 (618/1,004)

618화 해명할 수가 없네!

"월 가주, 지금 책임을 미루는 건가?"

범 가주가 입을 열지 않았는데 조운천이 말을 했다.

월령안은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범 가주를 바라보았다.

"범 숙부님, 며칠 전에, 숙부님 댁에서 몇만 냥이 나갔지요? 우리 저택의 하인들도 각각 몇십 냥씩 받았답니다. 범 숙부님께서는 가문도, 사업도 크니 이까짓 작은 돈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겠죠?"

범 가주의 얼굴이 퍼레졌다. 그는 시선을 여러 상을 건너 장남을 노려보았다.

체면이고 돈이고 다 잃은 셈이었다.

범 대공자는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하며 마주치질 못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다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았다.

월령안은 여러 사람에게 말을 많이 할 기회를 주지 않고 기세 사납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월 집사, 내가 준비한 편지지를 여러 숙부님께 드리거라."

월 집사는 어느덧 구석에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또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호위가 열 명 서 있었다. 호위는 손에 나무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그 접시 위에는 글이 써진 종이가 쌓여 있었다.

월령안이 손뼉을 치자 열 명은 앞으로 다가와 나무 접시의 편지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육십이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앞질러 월령안 앞에 섰다.

"월 누님, 누님 것이에요!"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지를 받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편지지를 받기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 숙부님들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먼저 글을 써 두었습니다. 이 편지지는 특별히 제작한 것입니다. 위에 모두 다섯 개의 선택지가 있는데 열 냥에서 만 냥까지 모두 다릅니다. 숙부님들께서는 기부하시고 싶은 금액을 대응하는 액수에 표기해 주시면 됩니다. 돈은 급하지 않습니다. 숙부님들께서는 언제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는 누군가 돈을 떼어먹을까 겁나지 않았다.

감히 그녀의 돈을 떼어먹는다면 앞으로 그녀와 협력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편지지에 한 획을 긋고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였다.

"발기인으로서 저는 대황자와 마찬가지로 천 냥을 기부합니다. 숙부님들께서는 급해 하지 마시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가실 때, 이 편지지를 집사에게 주면 됩니다."

상인들은 서로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월씨 가문의 이 조카는 정말 요물이네.'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지금 돈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들 중 누가 얼마를 기부하나, 또 기부했는지 안 했는지 전부 월령안의 입에 달렸다.

청주의 재해는 명확해진 셈이었다!

월령안은 목적을 이룬 뒤, 손에 든 편지지를 육십이에게 건네주었다.

육십이는 편지지를 받았지만 물러가지 않고 월령안의 편지지를 들고 위에 한 획을 더 그었다.

"우리 대장군께서는 만 냥을 기부하십니다! 오, 우리 대장군께서는 육씨시고 추밀사를 담당하십니다. 우리 장군 마님의 남편이십니다. 여러분들, 기억해 주십시오!"

육십이는 말을 마치고 월령안에게 입을 벌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약간 흉악했다!

월령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월씨 가문의 이 연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월령안도, 금나라의 대황자 완안경도 아니었다.

바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나 그의 전설이 전해지는 육 대장군이었다.

특히 육십이가 말한 '우리 장군 마님의 남편'이라는 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 총각은 무슨 뜻이지? 육 대장군과 월령안이 아직도 교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월령안은 단순히 군대의 장군들과 관계가 좋은 것이 아니고 군대의 수령이자 조정의 권신인 육 대장군과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말인가? 월씨 가문의 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호위들도 육 대장군이 월령안을 보호하라고 파견한 사람들인가?'

월령안과 완안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달라졌다.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친다. 그런데 해명할 방법이 없네!'

육십이가 끼어든 뒤, 월씨 가문의 연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업계 우두머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월령안이 경중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아보았다. 특히 육장봉과 연관된 일에 더욱더 신경을 썼다.

조운충도 더 이상 월령안을 적대하지 않고 월령안과 육장봉의 관계를 따져 물었다.

월령안은 여러 번 시도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잡을 수 없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것 말고 다른 일은 아주 순조로웠다.

육십이가 육장봉 이 비장의 패를 꺼낸 뒤, 자리에 있는 상인들은 아주 통쾌하게 돈을 기부했다. 범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었다. 완안경은 비록 황자였으나 주나라의 황자인 것은 아니었다. 주나라의 황자인들 또 어떡하리?

이 상인들은 아주 교활했다. 황자의 신분은 비록 고귀하나 권세로 따지면 병권을 움켜쥔 육 대장군보다는 절대적으로 못했다.

둘을 한데 놓고 보면, 그들은 분명 실권을 가진 대장군에게 아부하고 잘 보이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미시(未時 - 13~15시)가 되자 월씨 가문의 연회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월령안이 완안경에게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암시하려는 순간, 완안명이 먼저 나섰다. 그는 자기가 술을 많이 마셨다는 이유로 술을 깨야겠으니 월령안더러 쉴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상인들은 이 상황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월씨 조카, 우리를 상관할 필요가 없네. 우리는 알아서 가면 된다네. 대황자를 잘 모시게."

"월 누이, 사양하지 마시오. 우리는 자네 오라버니와 모두 좋은 벗이었소. 예전에도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었지. 모두들 잘 아는 사이니 배웅할 필요가 없소, 없소."

월령안을 누이라고 칭한 상인은 월령안의 아버지뻘 되는 상인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월령안이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나이가 어리나 촌수는 작지 않았다.

"령안 조카, 자네…… 적당히 하게!"

안 대상인은 떠나면서 완안경을 보았다가 또 육십이를 보고 얼굴에 저속한 미소를 띠었다.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친다 정말. 그런데 해명할 수가 없네!'

손님들을 모두 보낸 월령안은 본채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완안경을 만나러 갔다.

육십이는 몰래 숨어서 옆 뜰에 들어가는 월령안을 바라보고 몸을 웅크렸다. 그는 월령안이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내밀고 불쌍하게 손에 든 마대를 흔들었다.

"그놈을 마대를 뒤집어씌운 후에 때릴 수 있을까?"

"밤을 기다리자고!"

억지로 육십이를 감시하러 온 이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월 낭자께서 오셨으니 망정이지, 월씨 저택에서 금나라 대황자를 팬다면 우리가 어떻게 월 낭자께 말씀을 드리겠나?'

완안경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뜰 밖의 돌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월령안이 나타난 것을 보자 완안경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았다. 그의 차가운 눈매에 따스한 온기가 깃들었다.

"네가 올 때가 되었다고 짐작하고 있었지."

월령안은 완안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황자께서는 언제 청주로 오셨나요?"

"우리 사이에 이렇게 서먹하게 굴어야 하는 것이냐?"

완안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령안, 넌 예전에 나를 완안 오라버니라고 불렀어."

"완안 오라버니는 언제 청주로 오셨나요?"

월령안은 탁자 위의 주전자를 들고 물을 두 잔 부었다. 그녀는 그중 한 잔을 완안경에게 건네주며 티가 나지 않게 슬쩍 떠보았다.

완안경의 금색 비단 장포는 분명 미리 준비한 것일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찍히고도 전혀 몰랐으니 그녀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온 지 며칠 되었단다."

완안경은 얼버무리고 시선은 월령안을 지나쳐 뜰의 벽 밖을 내다보았다.

"네 주변에 잔챙이들이 많던데 내가 나서서 처리해 줄까?"

"그들은 저를 보호하는 사람들이에요."

월령안은 완안경이 가리키는 것이 암위라고 짐작했다.

완안경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시선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육장봉이 보낸 것이냐?"

월령안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완안 오라버니께서는 왜 청주로 오셨나요?"

"네가 청주에 있으니 내가 왔지."

완안경은 월령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월령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안 오라버니께서 저와 거래를 하려고 오신 건가요?"

"아니!"

완안경은 월령안이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삼 년 전에 이미 놓쳤다. 이제 난 더 이상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완안경은 힘차게 말했다.

"난 너와 우리의 혼약에 대해 얘기하러 온 거야."

"혼약이오?"

월령안은 경악한 얼굴로 완안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완안경과 혼인을 약속했던가?'

"혼약! 당신들……."

벽 밖에서 육십이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입이 막혔다.

"십이 년 전에, 네 아버님과 내 부황께서는 혼인을 정하셨지."

완안경의 시선은 다시 월령안을 지나쳐 벽 밖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에는 살기가 드리웠으나 순간뿐이었다. 완안경은 곧 살기를 거두었다.

'급하지 않아. 월령안이 날 받아들이고, 날 믿은 뒤에 다시 이 잔챙이들을 처리하면 되니까.'

'십이 년 전이라고?'

월령안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뭔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완안 오라버니, 그건 단지 농담일 뿐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다."

완안경도 정색했다.

"네 아버님과 부황은 그때 혼약을 정하셨다. 혼약서가 두 벌이 있고 그중 한 벌은 부황의 손에 있어."

"제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그 혼약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 둘의 혼약은 아닐 거예요."

금나라와의 애들 장난 같은 혼약에 대해, 그녀의 아버지는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늦게 본 딸이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가주 자리를 두고 경쟁할 기회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월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황실에 영원히 갇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가 오라버니와 함께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기 몫의 돈을 벌고 오라버니와 함께 월씨 가문의 가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 날 한 번은,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안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가 월씨 가문의 가주 중 일인이 되지 못해도 넌 황실 사람들에게 감금당하지 않을 것이다. 넌 금나라 다음 제왕에게 시집가 금나라의 황후가 될 것이다. 누구도 감히 널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녀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나서도 이 혼약을 진짜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금나라로 시집간다면 황제가 월씨 가문을 더욱 혐오하고 억누를 것이다. 월씨 가문에게는 나쁜 점만 있지 좋은 점은 없을 것이니 최악의 선택지였다.

그러나 지금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를 위해 황제의 미움을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