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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616)화 (616/1,004)

616화 초대장을 보이시지요

월령안과 함께 나온 청주 대상인들은 한바탕 놀라고 난 뒤, 침착해졌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눈길로 월령안은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월령안을 한숨 짓게 만들었다.

그녀는 해명할 수 없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완안경이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니 그녀가 의연하게 완안경을 거절해도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가 많으면 가렵지 않고, 빚이 많으면 걱정이 없는 법. 그녀가 어떻게 하든 황제는 그녀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도 하나 더 보태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범씨 저택은 월씨 저택과 가장 가까웠다. 범 가주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서둘러 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침 이 모습을 보고 잠깐 멈췄다. 곧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범씨 가문과 금나라의 장사는 아마도 그른 것 같구나. 우리 범씨 가문 전체의 세력으로 월령안 어린 계집애를 이기려면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상회에서 발언권을 잃고 또 금나라의 장사로 그르쳤다면 십 년 뒤, 누가 이기고 지겠는지는 정말 말하기 어렵겠군.'

범 가주는 깊은 생각에 잠겨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월령안은 그의 상상보다 더욱 상대하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하면 범씨 가문 백 년의 뿌리가 그의 손에서 망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

범씨 가문의 다섯 공자는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범 가주보다 한걸음 늦었다. 그들이 마차에서 내렸을 때는 완안경이 이미 월령안의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일어선 뒤였다. 그는 월령안과 함께 월씨 저택의 대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범 가주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 마음속의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그는 큰아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씨 가문의 대공자 눈에는 흉악한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께서 친히 왕림하셨는데 월씨 가문에서 맞이하는 가주가 하나도 없다니. 정말 우리 범씨 가문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군요."

'예전에는 월령안의 오라버니가 나를 짓눌렀지. 지금 월령안 이 콩알만 한 계집애도 날 짓누르려는 것인가?'

범 가주가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 월씨 가문의 집사가 앞으로 다가와 범 가주에게 예를 올렸다. 집사는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범 나리, 우리 큰아가씨께서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나리께서 오지 않으실 줄 아시고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범 나리께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음험한 수를 써서 우리 월씨 가문을 함정에 빠뜨리고도 금나라의 대황자가 왔다는 말에 쭐레쭐레 찾아와서는 우리 월씨 가문의 주인이 맞이하기를 바란다니. 정말 염치가 없군.'

집사는 자기의 수양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범씨 가문의 염치없는 행위에는 도저히 진실된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범 가주는 보지 못한 척, 다정하게 말했다.

"다 나 때문이네. 나이가 많아서 행동이 굼떠. 내가 령안 조카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겠지?"

그의 아들이 사적으로 사람을 찾아 월령안을 괴롭힌 일을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척한 것은 이 기회로 월령안에게 작은 교훈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

월령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금의 청주가 아직도 그들 월씨 가문의 청주인 줄로 알고 나대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그러나 월령안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처사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법을 고수했다. 웃는 얼굴이 부를 가져온다는 상냥한 방식 대신 바로 범씨 가문 얼굴에 따귀를 철썩, 날렸다.

분명 범씨 가문의 마차를 보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의 가족을 내버려 두고 떠나 버렸다. 범씨 가문의 체면을 땅바닥에 짓밟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 범씨 가문이 일부러 '짓밟아 주십시오' 하고 덤빈 꼴이니 화를 내려고 해도 따질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번 판에 또 지고 말았다.

범 가주는 마음속으로 갑갑했지만 얼굴의 미소는 더욱 상냥해졌다. 그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몰래 욕 한마디를 했다.

'늙은 여우.'

육십이는 집사의 뒤에 서서 몰래 팔을 껴안았다.

"저 사람의 웃음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네요."

집사는 이 말을 듣고 육십이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금나라의 대황자 완안경이 온 것은 청주의 상인들에게는 일종의 신호였다. 월씨 가문과 금나라 황실 사이에는 교류가 있다는 신호였다.

금나라의 장사에 눈독을 들이는 상인들은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몇몇 상인들이 건너왔다. 그들 중 몇 명은 초대장이 있었고 몇 명은 아예 월씨 가문의 초대장이 없었다. 또 초대장을 받았지만 어디에 둔 것인지 몰라서 못 가져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초대장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집사가 맞이해서 들어갔다. 초대장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집사가 모두 웃으며 문밖에서 거절했다.

초대장을 가지고 월씨 가문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은 월령안이 이미 초대장에 적어 놓은 내용이었다. 비록 거절당한 상인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집사 뒤에 서 있는 살기등등한 호위들을 바라보자 하나같이 겁을 먹었다.

'월씨 가문의 이 큰아가씨는 너무 기세가 강하군. 건드리지 못하겠어!'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자기가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 지주는 다급히 월씨 저택에 다다랐지만 집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넌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감히 날 막아?"

"대인께서는 청주의 부모관(父母官 - 옛날, 지주 등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이신데 소인이 당연히 알지요."

집사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동 지주의 앞을 가로막고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동 지주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우리 월씨 가문의 연회는 초대장이 있는 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집사는 동 지주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상냥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 누구에는 당연히 대인께서도 포함되십니다."

"너……."

동 지주의 손은 집사의 코에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 한참 '너, 너' 거리던 동 지주는 집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를 내며 손을 거두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너희 월씨 가문은 내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 것이냐?"

집사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당신 동 지주는 우리 월씨 가문에서 아무런 체면이 서지 않는데 무슨 체면을 봐달라는 것이지?'

물론, 그는 동 지주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예의바른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조의박의 명을 받고 조운천이 월씨 저택으로 왔다.

동 지주는 조운천을 보고 마치 가족이라도 만난 듯, 다정하게 다가갔다.

"백작 나리, 마침 잘 오셨습니다. 월씨 가문 좀 보십시오. 어디 조정이나 대인을 안중에 두고 있습니까? 월씨 가문의 비천한 집사마저 이렇게 방자하게 저를 문밖에 막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조의박의 삼형제는 모두 작위에 봉해졌다. 조의박은 후작이고 조운천과 조기충은 백작이었다. 그들 셋의 작위는 고종 황제가 봉한 것이었다. 다만 조의박은 조 수비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운천과 조기충만 백작 나리라고 불렸다.

"손님을 문밖에 두는 것이 바로 당신네 월씨 가문이 손님을 접대하는 방식인가?"

동 지주는 조씨 가문 삼 형제의 사람이었다. 조운천은 당연히 조 지주의 편을 들었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바로 집사에게 따졌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집사는 당연히 조운천과 변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리가 있든 없든, 조운천이 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큰아가씨는 월씨 가문은 벼락부자가 아니니 세력을 얻었다고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세력을 얻었기에 금의야행(錦衣夜行 - 부자가 사람들 앞에서 나다님)이 아니니 예전처럼 괴롭힘을 당할 일도 없다고 했다.

'우리 월씨 가문은 물러터진 감이 아니다!'

조운천은 권세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들 월씨 가문도 예의 바르게 대할 필요가 없었다.

"조 백작 나리, 오늘의 연회에는 손님이 많이 오셨습니다. 손님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월씨 가문의 초대장에 똑똑히 써 두었습니다. 오늘 연회는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초대장을 보낼 때도, 우리는 초대장이 없다면 들어오시지 못한다고 일깨워 드렸지요. 조 백작 나리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집사는 조운천에게 예를 올렸다. 예의가 바르나 강경한 기세도 없지 않았다.

"지주의 체면이 초대장 한 장보다 못하다는 것이냐? 만약 나도 초대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넌 감히 나를 밖에 세워 두겠느냐?"

조운천은 월씨 가문에서 동 지주를 밖에 세워 둔 것은 동 지주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들 어떡하리?

'청주에서의 도리는 바로 우리 삼형제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낱 상인 집안과 도리를 따질 필요가 있겠나?'

조운천은 위압감을 내뿜으며 차갑게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조 백작 나리, 우리 월씨 가문에서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합니다."

집사 얼굴에 걸린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운천이 위압감을 내뿜는 순간, 집사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손을 들어 뒤에 있는 육십이를 비롯한 사람들더러 나서라고 눈치를 줬다.

'하나같이 우리 월씨 가문을 정말 만만히 보는군! 우리 월씨 가문의 가주께서 돌아오셨다고! 우리 월씨 가문을 괴롭히고 싶다면 자기가 그 능력이 되는지 봐야지.'

육십이는 호위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일 자로 줄을 서서 조운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두머리인 육십이는 더욱더 오만하게 아래턱을 치켜들고 도발적으로 조운천을 바라보았다.

'월 누님의 체면을 봐서 그 금나라 황자는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이 노친네 하나는 혼내 줄 수 있지!'

동 지주가 화가 나 안색이 변한 뒤, 조운천도 화가 나 안색이 변했다.

"월령안은? 그녀더러 당장 여기 나오라고 하거라!"

"백작 나리께서 사전에 약속을 잡으시지 않아 우리 큰아가씨께서 오늘 백작 나리를 뵐 틈이 없을 듯하십니다."

'재주가 있다면 날 쳐 봐!'

"좋다, 좋아! 월령안이 날 만날 틈이 없다니 내가 만나면 되겠지! 나도 묻고 싶다. 나 조운천의 체면을 월령안이 감히 안 봐줄 수 있는지!"

조운천은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알이 튀어나왔다. 그는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호위를 들이받고 분기탱천하여 안으로 쳐들어갔다.

집사는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자기의 책임을 잊지 않았다.

"나리, 초대장을 보이시지요."

"없다!"

조운천은 손을 쳐들더니 집사를 치려고 했다. 바로 그때, 조운천의 뒤를 따르던 하인이 매우 빨리 달려들어 집사의 뒤를 감싸고 초대장을 꺼내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대인의 초대장은 여기 있습니다."

다행히 그가 초대장을 가져왔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오늘 망신을 당할 뻔했다.

"조 백작 나리, 안으로 드시지요."

집사는 초대장을 받고 바로 한걸음 물러서서 조운천이 들어가게 했다.

그는 나이 든 몸으로 얻어맞고 싶지 않았다.

"흥!"

정말 싸운 게 아니라서 조운천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낯뜨거운지라 오만하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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