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내가 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
육십이가 방금 한 그 말들은 확실히 그녀를 적지 않게 도왔다.
최 승상과 육 대장군 두 뒷배가 있는 만큼 청주의 '재해 상황'은 곧 조정에 보고될 것이다.
조정에서는 줄곧 청주의 관리들에게 손쓰려 했다. 지금 그녀가 기회를 올려 보냈으니 조정에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월 누님, 기다리세요. 제가 곧 가져올게요."
육십이는 기쁜 나머지 펄쩍 뛰다가 하마터면 편지를 떨굴 뻔했다. 그는 그만 놀라 귀신처럼 울음소리를 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육십이가 어디서 저런 왕성한 정력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육십이는 금방 문방사우를 들고 왔다.
월령안도 그를 난감하게 하지 않았다. 붓을 들어 종이에다 몇 글자 적었다.
'읽었음, 월령안.'
그러고는 묵이 마르기도 전에 편지지를 접었다.
육십이는 심지어 먹이 한데 달라붙어 글씨가 엉망이 되는 것까지 보았다.
육십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월령안이 한데 엉켜 범벅이 된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봉하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입도 다물지 못했다.
"월 누님, 그게 끝은 아니죠?"
'너무 얼렁뚱땅하는 거 아닌가? 대장군께서 월 낭자의 답장을 받고 나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까?'
아무렴 대장군은 월 낭자는 아까워서 때리지 않을 것이다.
"가질 거예요, 말 거예요?"
월령안은 봉투에 넣은 답장을 육십이에게 건넸다.
"월 누님, 사람을 도우려면 끝까지 도우셔야죠. 누님 어떻게……."
육십이는 탁자 위의 필묵을 가리키며 글 쓰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가련한 표정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런 답장이 대장군에게 전달되면 대장군은 틀림없이 그를 때려죽이려 할 것이다.
그런데 늘 그를 총애하던 월령안이 이번에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냥 편지를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싫으면 그만두세요."
"줘요, 주세요, 그 답장 제가 가져갈게요……."
육십이는 허둥지둥 서둘러 편지를 빼앗아 갔다.
육이 형은 그에게 반드시 월 누님에게 답장을 쓰게 하라고 했다.
만약 월 누님의 답장을 못 받으면, 다음에 만날 때 반드시 목을 잡고 뽑아 버릴 것이라고 했다.
육십이는 육이 형에게 목을 뽑히기보다 대장군에게 맞아 죽는 길을 택했다. 적어도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보기 싫지 않고, 온전한 시신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육십이는 월령안이 번복할까 두려워 편지를 얼른 빼앗아서 가지고 도망쳤다.
월령안은 웃으며 돌아서서 추수, 상천에게 상을 차리라고 분부했다.
월령안이 청주상회 사람들을 남겨서 식사하려 했던 것은 예의를 차리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일부러 약속 시간을 점심으로 하고 요리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식탁에서 뭇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했다.
이제는 육십이가 망쳐 놓아서 그녀는 혼자 먹을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월씨 대저택에 다섯 상을 차려놓았다. 이미 준비된 음식이 많으니 이 기회에 주종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앉아서 그녀가 돌아온 것을 경축하는 셈 치기로 했다.
월령안, 상천, 추수, 웅 표사, 육십이와 월씨 가문 관리자 몇이 한 상에 앉았다.
금방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모두들 번갈아 가며 월령안에게 술을 권했다.
"큰아가씨,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큰아가씨께서 돌아오셨네요. 저희는 이제 희망이 있어요."
"큰아가씨, 저희는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요. 꼭 돌아오리라고 믿었어요."
"큰아가씨, 돌아오셨네요, 정말 좋아요!"
이 한 잔의 술은 기쁨도, 슬픔도 모두 들어 있었다.
월령안은 모두 거절하지 않았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누가 권하든 단번에 마셨다.
큰아가씨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사람과 심정이 똑같았다. 심지어 그들보다도 좀 더 복잡했다.
월씨 저택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익숙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마치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익숙한 월씨 저택에는 더는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도 없고 꿈속의 따뜻함도 없었다.
이 월씨 저택은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심지어 일말의 나약함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지금의 그녀는 월씨 가문의 큰아가씨이자 월씨 가문의 가주였다.
그녀는 몇만 명의 생사를 짊어져야 했다.
그녀는 시시때때로 굳세어야 한다고,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그녀는 반드시 월씨 가문이 사라진 지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월씨 가문 노복들을 위해 월씨 가문의 하늘을 떠받쳐 올려야만 했다.
월령안은 한 잔, 또 한 잔 연이어 마셨다. 그녀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주위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석하게 자신이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술을 마시고, 여전히 웃었다.
그녀는 술을 빌려 우울함을 해소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했다.
때문에 외부인이 있으면 그녀는 아무리 취해도 웃으며 정신을 놓지 않았다. 술을 빌려 그녀의 깊이를 떠보게 해서는 안 되었다.
월령안은 계속 웃으면서 계속 마셨다.
그녀도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 몰랐다. 어쨌든 누가 와서 술을 권하면 모두 마셨다.
그러다가 더는 마실 수 없게 되자 멈추었다.
추수의 부축을 받아 연회석에서 물러나고 다른 사람들더러 계속 마시라고 했다.
하지만 월령안이 떠나자 뭇사람들도 술을 계속 마실 기분이 없어졌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익숙하면서도 낯선 월씨 대저택을 둘러보았다. 몇몇 연로한 하인들은 술기운을 빌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갈 수 없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단 말이야."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기다리고 보니 그들은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십 년이야! 모든 게 달라졌어."
설령 그들이 모두 돌아왔다고 해도 십 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뜰에서 하인들이 대성통곡했다.
월령안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치켜세운 입꼬리도 한 치도 내리지 않았다.
십 년 전, 월씨 대저택을 나서던 그 순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어.'
월령안은 오늘 비록 많이 마셨지만 숙취가 별로 없었다. 해장국을 마시고 잠깐 쉬고 나니 곧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녀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온몸의 술 냄새를 말끔히 지웠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화장대 앞에 앉아 창밖의 석양빛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침울했다.
"똑똑히 알아봤어? 그들이더냐?"
청주는 상업이 발달했다.
토지가 없는 산민이라 하더라도 산에 의지해 작은 장사를 하면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옷과 양식이 모자라 굶어 죽을 정도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육십이가 만났던 산민들은 월씨 가문에서 그때 해산하여 돌려보낸 장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만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그들만이 계속하여 산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가씨께 알려드립니다. 바로 그들입니다."
추수는 두꺼운 수건을 받쳐 들고 월령안의 머리를 닦아 주었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과연 그들이었구나.'
월령안은 눈을 감았다.
"상천더러 준비하라고 해. 내가 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
추수의 차분하던 눈매가 마구 찡그려졌다.
"아가씨, 그 사람들은 너무 많고 복잡해요.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 무슨 변수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천천히 가 보는 게 어떨까요?"
월령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돌렸다.
"추수, 그들은 우리 월씨 가문의 장인들이다. 그들이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월씨 가문에서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월씨 가문은 이미 흩어졌다. 월씨 가문에서 그들더러 지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청주를 지키고, 그 산을 지키며 여태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 그들을 실망시킬 수 있겠는가.
물론 그들 중 누군가 배신했다면 그녀는 마음이 무르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인자함은 오직 자신의 사람에게만 남겨 주었다.
* * *
월령안은 흑색 망토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꽁꽁 감쌌다. 어두운 곳에 서서 만약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가자."
월령안은 추수와 상천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세 사람이 말에 오르는 동안 육십이가 갑자기 뛰쳐나와 월령안의 말을 막았다.
"월 누님, 장군께서 저더러 누님을 보호하라고 하셨어요. 지금 어디로 가실 건가요? 저를 데려가 주면 안 되나요? 제가 손과 발만 가지고 눈과 귀는 안 가지고 간다고 약속할게요. 어, 내 입도 안 가지고 갈게요."
"아가씨?"
추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다가오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녀의 무공은 육십이보다 나았다. 전력을 다한다면 육십이를 막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말 한 필을 주거라."
그녀의 곁에는 육장봉의 암위가 있었다.
육십이가 때마침 나타난 것은 분명 암위가 그에게 통지한 것이다.
추수는 육십이를 막을 수는 있지만 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육장봉이 알아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니 육십이를 데리고 가도 괜찮았다.
"감사합니다. 월 누님. 제가 말을 챙겨 왔어요."
육십이가 휘파람을 한번 불자 구석에서 검은 큰 말 한 필이 뛰어왔다.
과연 진작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월령안은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어두운 밤을 틈타 미친 듯이 달려 신속히 내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점점 더 편벽한 길로 달려갔다.
한참 동안 달려 결국 한밤중이 되었다.
동틀 무렵, 네 사람은 산기슭에 도착했다.
육십이는 말에서 내려 벌거숭이산을 보고는 놀라 말했다.
"월 누님, 여기는……."
월령안은 말 등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며 눈을 흘겼다.
"눈도, 귀도, 입도 안 가지고 온다고 했죠!"
"말하지 않을게요."
육십이는 입을 틀어막았다. 나중에 또 잘못된 것을 알고 눈을 막았다.
"보지도 않을게요."
"이 사람 혹시 바보 아닌가요?"
상천이 말에서 내리며 월령안 곁으로 다가가서 육십이를 힐끔 보았다.
"듣지도 않을 거예요."
육십이는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입과 눈을 막았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서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월령안은 말에서 내려 상천에게 경고 어린 눈길로 보며 말했다.
"대장군의 사람이야. 쓰고 던지지 말고 예의를 지켜."
'상천은 육십이를 이용한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상천은 못 들은 척하며 월령안에게 읍했다.
"아가씨,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산에 올라갈까요?"
"가자."
월령안은 바람에 벗겨진 모자를 여미고는 상천의 뒤를 따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산으로 올라갔다.
이때, 날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산 위에는 나무와 잡초가 없어 매우 걷기 편했다. 월령안은 상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걸음마다 안정되고 평온했다.
이 산은 월씨 가문의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곳에 한두 번 온 것이 아니었다.
반 시진 뒤, 월령안과 상천 일행은 어느 동굴 앞에 이르렀다.
가까이 다가가자 땀 냄새와 똥 냄새가 뒤범벅된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육십이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입을 열고 말하려다 추수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깜짝 놀라 얼른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