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우리 장군님의 편지예요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이미 계략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단순하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무심코 한마디 물었다.
한순간 생각이 짧은 상인이 당장 물었다.
"령안 월씨 조카, 이 소식은 어디서 들은 것이오? 우리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듣는데……."
하지만 그가 미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끊어 버렸다.
"재해를 입었네. 올해 우리 청주가 큰 재해를 입었다네. 내가 보기에 올해 가을 양식 징수는 힘들 것 같더라고."
"령안 월씨 조카, 다행히 자네가 돌아왔구먼. 자네는 모를 거네. 올해 우리 청주는 경작지 재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장사하기도 힘들다네. 돈을 벌기는커녕 밑지지 않으면 다행이야."
"령안 월씨 조카, 올해 우리 모두 재해를 입었다네. 밭에서는 양식 한 톨도 못 거둬들이고, 장사해서 돈도 못 벌었다네. 이제 당장 가을 세금이 나올 텐데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훤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오기 전에 소식을 받았다.
동 지주는 월령안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월령안과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자고로 백성은 관리와 겨루지 않는다.
동 지주가 엄포를 놓았다.
월령안이 만약 자신의 힘이 약하면 당연히 꼬리를 내리고 고분고분 후한 선물을 준비해 동 지주에게 화해를 구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월령안은 겁쟁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동 지주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월령안은 배경이 있고 인맥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돈을 벌려고 한다. 그들이 월령안에게서 이익을 취하려면 당연히 성의를 표해야 했다.
가을 징수가 바로 그들의 성의인 것이다.
월령안은 대상인들이 눈치 빠르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만족했다.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여러분께서 재해를 입었으면 마땅히 조정에 상주서를 올려 조정의 구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상인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완전 악질이었다. 세금을 바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조정에까지 끌고 가서 동 지주를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조정의 지지를 받는다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듯했다.
아무튼 동 지주의 미움을 샀으니 차라리 끌어내리는 것이 나았다.
"월씨 조카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게나?"
안 대상인이 잠깐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능글맞게 웃었다.
"제가 범씨 아저씨에게 일 할의 이윤을 약속한 것은 최 승상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어요."
"최 승상?"
"승상?"
"내가 생각하는 그 승상인가?"
상인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한껏 들이켰다.
하늘이여, 조정의 승상에게 이런 인정 빚을 지게 하다니. 이것은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맞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최 승상이에요."
월령안은 그녀가 최일을 구할 당시 그의 아버지가 승상이 아니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과정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냥 결과만 알면 되었다.
몇몇 상인은 저도 모르게 월령안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월씨 월씨 조카, 이 거래는 그저 감탄할 뿐이오."
"범 회…… 흠흠, 범씨 가주께서 이 사실을 알면 아마 화가 나서 피를 토할 것 같군."
그들 중 누가 돈이 모자라겠는가.
돈이 부족하면 방법을 대어 벌면 되었다.
하지만 조정 승상의 인정 빚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바꿀 수 없었다. 일 할의 이익은 물론이고 만약 승상의 인정 빚을 바꿀 수 있다면 이 할, 심지어 삼 할의 이윤도 내놓을 수 있었다.
추후 승상이 뒤를 봐줄 것이니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월씨 조카, 이런 사소한 일로 최 승상의 인정 빚을 쓰면 아까운 거 아닌가?"
안 대상인은 말로는 월씨 조카라고 불렀지만 이미 극히 낮은 자세를 취했다.
월령안에게 최 승상이라는 뒷배가 있는데 무슨 장사를 못 하겠는가.
다행히 그는 범씨를 따라가지 않았다. 만약 범씨를 따라갔다면, 승상에게 줄을 댈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인정 빚이라는 건 써 버려야 정말로 인정인 거예요."
월령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최 승상 같은 분이 한번 인정 빚을 지는 게 작은 일이 아니에요. 제가 끝까지 그것을 쓰지 않으면 최씨 가문에서도 계속 신경을 쓰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건 인정 빚이 아니라 원한을 지는 거죠. 여러분 제 말이 맞나요?"
"월씨 조카가 세상사에 훤하구먼."
"우리는 괜히 오래 살기만 했지 월씨 조카보다 세상사에 밝지 못했군."
몇몇 상인들은 또다시 아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진지해졌다.
하지만 월령안은 더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그들의 말을 중단시켰다.
"과찬이십니다. 이것 보세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다 보니 여러분께서 아직 식사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잊었네요. 제 체면을 좀 봐주어 남으셔서……."
이때 육십이가 편지 한 통을 들고 신바람이 나서 달려왔다.
"월 누님, 월 누님, 우리 장군님의 편지예요. 둘째 형은 저에게 꼭 누님 손에 건네고 누님께서 편지를 읽는 것을 확인하라고 명령했어요."
육십이는 달려 들어와 말하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음…… 월 누님, 저, 저는 손님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저를 나무라지 마세요."
"괜찮네. 괜찮아…… 우리는 한집안 사람이야. 손님이 아니지. 젊은이가 예의를 차리는군."
안 대상인은 육십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육십이의 태도가 괜찮은 것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이 젊은이는 누구시오?"
육십이는 대답하지 않고 먼저 월령안을 쳐다보았다.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도도하게 한마디 대답했다.
"저는 육십이, 우리네 장군의 호위병이고 월 누님의 동생입니다."
"십이 대인의 장군은 어떤 분이신지?"
안 대상인은 진작 짐작했지만 감히 믿을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대장군에게 이혼당한 게 아닌가.
월령안이 이익이 영원하여 서로 장사 거래를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 마음속의 의심은 여전했다.
이혼한 부부가 어떻게 그렇게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월령안이 말한 거래는 아마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대장군에게 달라붙어 돈을 안겨 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월령안과 대장군부의 관계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우리 집 장군은 육씨이고 월 누님의 남편입니다."
육십이는 정색하고 말했다.
월령안은 육십이에게 눈총을 주며 바로잡아 주었다
"전 남편이에요."
육십이는 헤헤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앞잡이처럼 월령안 앞에 서신을 바쳤다.
"월 누님, 장군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둘째 형은 누님더러 꼭 읽어 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대장군께 답장을 써 줄 수 없나요? 너무 길게 쓸 거 없어요. 아무렇게나 몇 글자만 적어도 돼요. 대장군께서 답장을 보시면 무척 기뻐할 거예요."
월령안은 편지를 건네받고 육십이를 몰래 노려보았다.
"누가 가르쳐 줬어요? 나이는 어린 게 속셈은 많네요."
"상천 형님이 알려 줬어요. 지금 누님한테 편지를 드리면 꼭 볼 거라고 했어요."
육십이는 월령안의 옷소매를 잡고서 가련하게 애원했다.
"월 누님, 저를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둘째 형이 저에게 분부했어요. 부탁하든 울든, 꼭 누님더러 대장군의 편지를 보게 하라고 했어요. 절대로 이전처럼 던져 버리면 안 돼요."
월령안은 할 말이 없었다.
'상천은 대체 육십이에게 무엇을 가르친 거야? 멀쩡한 아이를 그르치잖아!'
월령안은 화가 났다. 하지만 자리에 있던 상인들은 흥분하여 두 눈을 반짝였다.
"령안 조카, 대장군의 편지가 중요하지. 우리 방해하지 않겠으니 먼저 대장군에게 답장을 하게나."
"맞네. 맞아. 월씨 조카. 먼저 대장군에게 답장하게. 다른 일은 우리에게 맡기게나. 걱정하지 마시게. 우리 청주가 재난을 입어서 백성들이 살기 힘들다는 소식은 반드시 조정에 보고할 거네."
상인들은 환하게 웃었다. 월령안을 보는 눈길은 마치 금산을 보는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월령안은 몰래 탄식하며 편지를 거두었다.
"답장하는 일은 급하지 않아요. 시간도 늦었으니 여러분 먼저 식사를 합시다."
"밥 먹는 건 작은 일이네. 다음번에 우리가 령안 조카를 청할게. 우리 먼저 물러가겠네. 일 보게. 일을 보게나……."
몇 사람은 월령안이 그들을 남길까 두려워 누구보다 빨리 달아났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 대장군의 편지였다.
무장의 으뜸이자 추밀사를 겸임했던 육 대장군이었다.
이 줄은 최 승상보다 더 굵으니 단단히 잡아야 했다.
육장봉의 편지는 냉담하고 직접적이었다. 군인답게 분명하고 간결하며 불필요한 말은 한 글자도 없었다. 물론 정 같은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첫머리에 인사말 없이 단 한마디만 남겼다.
그는 이미 국경에 이르렀고 철광산에 관한 일은 황제의 사람에게 맡겨 조사하게 했다. 그는 북요와 현음 공주가 주나라로 돌아갈 데 관한 일을 두고 비공식적인 담판을 진행하고 있다.
자신의 근황을 전한 후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청주의 그 몇 노친네가 최근 몇 년간 적지 않은 양식을 비축했고 요즘 들어 빈번히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만약 그들이 내몰리면 기필코 출병할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 그는 명령조의 말투로 다음과 같이 썼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인내하고 있으시오. 내가 청주로 가면 당신을 위해 결정할 것이오.'
육십이의 '감독'하에 월령안은 한눈에 열 줄씩 편지를 훑어보았다.
편지를 다 읽은 후 월령안은 웃고만 싶었다.
육장봉은 도대체 어디서 온 자신감인가. 그가 이 월령안을 대신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또 무슨 근거로 그녀더러 참으라고 하는가.
변경은 남의 영역인 것만큼 그녀는 하찮은 일개 여 상인으로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청주에 이르러 그녀의 집, 그녀의 세력 범위에 와서도 그냥 참는다고 하자. 그게 만약 밖에 전해지면 남들은 그녀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렇게 해서 월씨 가문이 청주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육장봉의 말을 한 글자도 듣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나서 즉석에서 던져 버렸다.
"던지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월 누님…… 절대 버리지 마세요. 대장군께서 아시면 제가 일 처리를 잘못한다고 싫어할 거예요."
육십이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편지가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았다.
"위험했다. 위험했어. 더럽혀지지는 않았어."
육십이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받쳐 들었다. 옷이 더러워진 것도 관계치 않고 민첩하게 기어 일어나서는 알랑거리며 웃었다.
"월 누님, 대장군께 답장해 줄 수 있나요?"
"너무 욕심부리지 마세요."
월령안은 육십이를 흘겨보았다.
"월 누님, 방금 제가 누님을 도와주었잖아요."
육십이는 넉살 좋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얀 이는 그의 얼굴을 더욱 검게, 더욱 불쌍해 보이게 했다.
월령안은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그럼 붓을 가져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