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문지기일 뿐인걸요
월씨, 범씨 두 가문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아니. 아니다. 이곳은……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어. 너보다 더 익숙해."
범정은 령안에 대한 경계를 은근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월령안은 웃으면서 되받아쳤다.
"아무리 오래 살면 뭐 하겠어요. 문지기일 뿐인걸요. 주인이 돌아오면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잖아요. 아닌가요?"
"월씨 조카는 변경에 있는 십 년 동안 배운 게 정말 많구먼."
범정은 얼굴빛이 싸늘해졌다. 얼굴의 미소도 거두었다.
"주씨, 우리 같이 갑시다. 다른 형제들은 기다리지 않겠네. 이만 먼저 가 보겠네."
이것은 위협이었다.
자리에 있던 대상인들은 범정을 따라갈지 말지 망설였다.
이때 월령안이 말했다.
"그때 당시에는 청주가 가난해서 모든 사람이 청주를 떠나지 못해서 한스러워했습니다. 오늘날 청주의 백성은 모두 청주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그런 청주를 몇 개 더 만드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뭐라고?"
"령안 조카, 뭐라고 했어?"
"월씨 조카, 그 말은 무슨 뜻이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던 대상인 몇은 월령안의 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작이 빨라 이미 일어선 사람도 뒤따라 도로 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월씨 조카, 월씨 조카 하며 다정하게 불렀다.
문턱을 넘어 나가려던 범정과 주 대상인마저도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자신이 뭐라고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월령안은 당연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에도 아주 만족했다.
같은 상인으로서 만일 청주성 한 채를 더 세울 수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을지는 훤히 꿰고 있었다.
그리고 월령안은 청주성을 하나도 아니고 몇 채를 더 짓는다고 했다. 그 이윤은 생각만 해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여러분들께서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저와 함께 청주성 같은 것을 몇 채 더 지을 생각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월령안은 범정을 한번 쏘아보고는 몰래 한마디 비아냥거렸다.
"방금 범씨 아저씨도 이야기했죠. 제가 변경에 있는 십 년간 적지 않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중에는 변경 무장들과의 친분도 있죠. 여러분, 변방의 오지를 두 번째 청주성으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청주성은 서남과 접해 있었다. 서남에 있는 많은 희귀한 물건들은 오직 청주성을 통해서만 외부에 판매되었다.
외부의 상인들은 서남의 옥석, 산미(山味 - 산에서 나는 나물이나 과실등의 맛), 약재를 밖으로 내다 팔려면 청주를 경유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남 사람들이 소금과 양식을 사려면 청주를 거쳐야 했다.
상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으면 백성들 수중의 돈도 점점 더 두둑해졌다.
따라서 청주는 당연히 번화해졌고 번화한 성안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모두 돈을 벌 수 있었다.
특히, 먼저 토지를 얻는 사람은 돈더미에 올라앉을 수 있었다.
편벽하고 가난하며 인적이 드문 성곽을 번화하고 풍요롭고 사람이 오가는 상업 도성으로 건설하는 것은 거대한 공사이다.
그 어려움에 대해서 외부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는 이윤이 엄청났다. 심지어 자손이 누워서도 돈을 벌 정도로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청주의 대상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문턱을 넘어서던 범씨 가문 가주와 주 대상인도 되돌아와 한몫 끼려고 했다.
월령안은 피식 웃으며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되물었다.
"범씨 아저씨, 전 좀 막돼먹어서요. 제 상회에서는 제가 모든 걸 결정해야 합니다. 범씨 아저씨께서는 제 말을 들을 수 있나요?"
범씨 가문과 월씨 가문 사이에는 십 년 쟁탈전이 있었다. 범씨 가문이 월씨 가문의 말을 들으면 월씨 가문을 이길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월령안의 이 말은 너무나 심장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범정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뒤에 난 뿔이 우뚝하구나. 네 아버지가 저승에서 아시면 마음이 놓이겠다."
"범씨 아저씨와 비길 바가 아니죠. 아직도 후손들을 위해 동분서주하시잖아요. 고생 많으시네요."
월령안은 일어서서 범정에게 허리 굽혀 배례했다. 범정은 하마터면 화가 나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범정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월령안이 버는 돈 가운데 일 할은 그들 범씨 가문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월씨 조카, 나는 네가 모든 게 순조로워 다 함께 큰돈을 벌기 바란다. 네 사업 중에 일 할은 우리 범씨 가문의 것이잖니. 네가 돈을 벌면 우리 범씨 가문도 돈을 버는 거니까."
월령안은 범정에게 읍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씨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양로금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고작 이윤의 일 할이다. 범정의 양로금으로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언쟁은 필요 없다. 능력이 있으면 상업계에서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
월령안은 눈길이 매서웠다. 숙연한 표정으로 심지어 거짓 웃음조차도 보여 주지 않았다
범정도 얼굴의 가식적인 인자함을 거두고 살기등등하게 그녀와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화가 나서 소매를 젖히고 떠나갔다.
그는 속았다.
그는 월령안 아버지와 동년배였다. 월령안의 아버지가 아이를 늦게 낳았고 그녀 또한 월씨 가문의 막내였다. 따져 보면 그의 손자도 월령안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월령안에게 자극받아 그녀를 적수로 간주하고 직접 나서서 그녀와 겨루었다. 이는 그녀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며 그녀가 그와 대등한 지위라고 인정한 셈이었다.
그는 오늘 이후로 그의 아들, 손자들이 월령안 앞에서 모두 한풀 꺾일 것임을 상상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속셈이 깊어 짐작할 수가 없었다.
범정은 떠나기 전에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런 딸을 두었으니 월씨 형제는 나보다 복이 있군.'
"범씨 아저씨, 안녕히 다녀가세요. 배웅하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잇속을 차리고서 인사치레를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범정은 월령안을 등지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월령안을 다만 재능이 좀 있고 허영심이 강한 아가씨로 여겼었다. 자그마한 재주를 가지고도 모든 이가 알게 떠들썩하게 내보였고, 또한 바보같이 남자를 위해 앞으로 십 년 수익의 일 할을 거래로 내놓는다고 생각했다.
좀 전까지도 그는 월령안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아가씨가 그들 범씨 가문을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월령안을 디딤돌로 삼아 자손들을 단련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마저 월령안에게서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월령안에게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말한 대로 그는 계속해 후손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범정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범정이 떠난 뒤 월씨 가문 대청의 분위기는 한층 느긋해졌다.
대상인들은 월령안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녀를 칭찬하는 데에 어찌나 낯 뜨겁게 추어올리는지 그녀가 아무리 뻔뻔스러워도 듣기가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고 아랫사람으로서 그녀는 웃어른들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들어야 할 말은 들어 주어야 했다.
아부를 하는 것도 일종 학문이다. 그녀도 잘 배워 둘 것이다.
월령안은 방그레 웃으면서 대상인들의 아부를 받아 주었다. 하지만 듣는 건 듣는 것이고 이익은 하나도 약속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고서 많은 상인들은 월령안이 나이가 어리지만 절대 대충 속여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웃어른의 자태로 그녀를 억누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몇 마디 아부에 속아 방방 뜨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에 이렇게 훤하니 정말 어떻게 자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상인들은 마음속으로 투덜댔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우호적이고 친절했다.
"월씨 조카, 이 도성을 건설하는 일은 우리가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우리한테 얘기 좀 해 주지 않을 텐가?"
아부가 먹히지 않으면 그들도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요긴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다.
월령안은 한참 동안 아부하는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여러분, 모두 결정하셨죠. 계속하여 청주상회에 남는 것으로요. 그런가요?"
"물론이지. 우리는 청주상회 사람이다."
대상인들은 연거푸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해상 사업은 지금 범씨 가문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만만찮았다. 범씨 가문에서 그들을 뿌리치고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월령안의 이 장사가 그녀의 인맥이 없으면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여러분의 이 말씀이 있으니 저는 마음이 놓입니다."
월령안은 상석에 앉아 수중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한담하듯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십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청주의 상황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입성하기 전에 육 대장군의 호위병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얘기로 우리 청주에서 재해를 입어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땅이 없는 산민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산 한 채를 벌거숭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좀 외딴곳에 있는 소작농들도 형편이 어려워 모두 집에 먹을 양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인가요?"
"육 대장군의 호위병?"
누군가 예리하게 이 점을 알아채고 떠보듯이 물었다.
"령안 월씨 조카, 육씨 가문과는 틀어진 거 아니었어?"
월령안이 육씨 가문의 미움을 사 쫓겨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소문과 사실이 이리 어긋난단 말인가.
"안(顔)씨 아저씨, 이익은 영원한 거예요. 저와 육 대장군은 부부가 될 수는 없지만 함께 거래는 할 수 있죠. 육 대장군의 호위병은 지금 우리 집에 머물고 있어요."
그녀는 육십이와 삼백 명의 장병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그들을 먹여 살린 돈을 벌어야 했다.
안 대상인은 얼른 일어나 월령안에게 사과했다.
"령안 월씨 조카, 화내지 마시게. 안 삼촌은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월령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했다.
"안 삼촌, 예의를 차리시는군요. 웃어른으로서 저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월령안은 손을 들어 안 대상인을 앉으라고 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여러분, 제가 듣기로는 우리 청주가 재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양식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하고 산간 지대 작물도 줄어들고 장사하기도 아주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녀는 마음이 좁고 원한을 기억하기 싫어했다. 줄곧 원한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갚고 절대로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않았다.
동 지주가 체면을 봐줄 때 챙기지 않으니 그녀가 그의 체면을 안팎으로 모두 짓밟았다고 탓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수중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 대상인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옹졸할 뿐만 아니라 인색하기까지 했다.
그녀에게서 그렇게 쉽게 이득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돈을 벌려고 해도 괜찮았다.
그러면 성의를 보여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