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누구 반대할 사람이 있나요?
동 지주는 말을 마치고는 소매를 젖히며 떠나갔다. 고문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문도 쫓아가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들 대인은 월씨 가문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주와 그 옆 지역, 그리고 청주의 백성들 중에서 월씨 가문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월씨 가문에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대인이 월령안에게 밉보이고서 청주에서 치적(治績 - 정치상의 업적)을 세우려면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월령안이 떠들썩하게 돌아온 것을 선포했다. 청주에서는 수많은 눈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지주를 찾아간 일도 청주 상인들이 중점적으로 관심하는 일이었다. 지주가 월령안을 만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상인들은 얼떨떨해졌다.
"동 대인, 미친 거 아닌가?"
"월씨 가문의 가주가 찾아갔는데 동 대인이 만나 주지 않았다고. 동 대인은 누구를 만나려고 그러는 거지?"
"동 대인은 역시 범상치 않군. 난 또 범씨 가문에서 월씨 가문과 서로 맞불을 놓을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가장 첫 번째로 나서서 월씨 가문에 본때를 보여준 사람이 동 대인이라니. 동 대인은 역시 백성을 자식같이 아낀다니까. 직접 나서서 월씨 가문을 떠 보니 우리가 나서서 미움을 살 필요가 없잖아."
상인들은 동 지주가 그들을 앞세워 월령안을 떠보지 않고 직접 나서서 그녀와 맞불을 놓자 은근히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지주부로부터 월령안과 왕래하지 말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건 우리더러 줄을 서라는 거야?"
"이것 역시 너무…… 공공연하게 월씨 가문이랑 척지는 거잖아.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백성은 관리와 싸우지 않는다고. 동 대인은 왜 우리를 난감하게 하지."
"우리는 소상인일 뿐인데 어찌 관아와 맞서겠는가."
상인들은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월령안이 지주부에서 돌아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은 여전히 후한 예물을 준비해 월씨 저택을 찾아갔다.
한편 찾아오는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월령안은 일일이 다 만날 수 없었다.
대부분 소상인은 예물을 상천에게 건네 상천더러 다시 월령안에게 전달하게 했다. 이렇게만 해도 소상인들은 만족했다.
월씨 가문에서 그들의 예물을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우호적인 태도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청주상회의 대상인들은 대부분 월씨 저택에 도착했다. 범정(範正) 회장만 남겨 놓고 있었다.
범정은 오지 않았고 월령안도 가지 않았다. 대상인들은 월씨 하인들에 의해 화청에 모셔졌다. 일찍 온 사람은 이미 한 시진을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 시진씩 멍하니 앉아 있어도 아무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귓속말을 숙덕이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하며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은 범씨 가문과 월씨 가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줄을 서야 했다.
범씨 가문 사람과 월령안이 늦게 오는 것도 좋았다. 그들도 어떻게 줄을 서야 할지 좀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심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월령안과 범씨 가문 가주 범정이 동시에 화청에 나타났다.
범씨 가문 가주 범정은 나이가 적지 않았다.
월령안은 그를 부축하여 들어왔다. 월령안은 자세를 낮추었고 범정도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마치 조손처럼 화기애애하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상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뜻밖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상업계에서 경쟁 관계이지만 서로 철천지원수가 아니었다.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 서로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월령안은 범정을 부축해 상석에 앉히고서야 뒤돌아서 모든 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월령안이 말을 마치자 장내는 잠깐 적막에 빠졌다. 대상인들은 서로서로 마주 보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월령안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이었다.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 분위기가 꽤 어색했다.
그러나 월령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방그레 웃으며 그 자리에 서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했다.
"월씨 조카……!"
심지가 굳지 못한 대상인 몇몇이 가만있지 못하고 마지못해 입을 열어 분위기를 좀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몇 글자 내뱉기도 전에 범정이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말했다.
"령안을 나무라지 말게. 이 늙은 것이 십 년을 보지 못했다고 월씨 조카를 잡아 두고 한참을 얘기했다네. 그래서 늦은 것이네."
범정이 입을 열자 마치 신호 같았다. 대상인들은 더는 조신하게 가만있지 않고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범 회장도 너무하시군요. 당신이 십 년 동안 령안을 보지 못했으면 우리 같은 늙은이도 역시 십 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다고요. 당신이 할 말이 있는 만큼 우리도 할 말이 많다니까요."
"령안을 보니 저도 모르게 얘 아버지가 생각나는군. 지금 생각해 보면 꼭 어제 같기만 한데."
"눈 깜짝할 새에 월씨 조카이 이렇게 컸구먼."
"십 년 동안 월씨 조카는 잘 지냈는가? 나도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다네. 월씨 조카이 변경에서 우리 청주 상인들을 위해 위세를 떨쳤다고. 변경의 잘난 척하는 것들에게 우리 청주 상인들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고 하더군."
"난 또 월씨 조카가 변경에 가서 세도가에 시집가면 더는 장사를 하지 않을 줄 알았네. 생각 밖으로 월씨 조카는 한번 손쓰면 완전 사람을 놀라게 하더군. 내 상단이 변경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변경 사람들은 월씨 조카를 재신의 친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더군. 돌도 금으로 만드는 재간이 있다고 한다더구먼."
"월씨 조카는 과연 월씨 가문 자손답군. 월씨 가문의 이름값을 단단히 해냈네그려. 월씨 아우도 저승에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야."
대상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는 점차 분위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거짓이든 진심이든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꼬투리도 잡을 수 없었다.
월령안은 방글방글 웃으며 그들 말속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
뭇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가씨는 아가씨였다. 두어 마디 구슬리니 곧 들떠 버렸다.
변경의 상인들이 그녀를 대단하게 소문내서 엄청나게 대단한 줄 알았다.
지금 보니 그녀가 변경에서 장사를 그렇게 크게 한 것은 육씨 가문의 덕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그런 대단한 뒷배가 있으면 틀림없이 월령안보다 더 잘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 사는 몇몇은 얼굴빛에 경멸이 서려 있었다.
범씨 가문에 줄을 댄 주(朱) 대상인은 범정을 흘끔 바라보았다.
범정이 미소를 머금고 지금 상황에 흡족해하는 듯하자 잠깐 망설이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월령안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월씨 조카, 시간도 늦었네. 나는 집에 일이 좀 많아서 다음에 월씨 조카를 따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뒤돌아 가 버렸다. 월령안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모두들 저도 모르게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월령안이 사람을 잡을까 안 잡을까 추측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월령안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상회의 규칙대로 팔 할의 인원이 모이면 대회를 열 수 있어요. 주씨 아저씨, 안녕히 가셔요."
"무슨 대회?"
월령안이 잡지 않았으나 주 대상인은 가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 상석의 다른 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을 월씨 저택에 왜 초대했는지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더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지금 제가 여러분께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회장이 되렵니다. 누구 반대할 분이 있나요?"
월령안은 방그레 웃으며 뭇사람을 둘러보았다. 시원시원하고 대범하면서도 어린 아가씨의 귀여움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상석에 앉은 범정을 포함한 대상인들은 모두 그녀를 보통 여자애로 생각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월령안을 경시하던 몇몇 대상인들 역시 표정을 바꾸고 정색하여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월령안이 이번에 그들을 초청한 것은 자기들에게 얼굴을 내밀거나 자기들을 끌어들여 지지를 얻으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좀 전까지도 어떻게 먼저 월령안을 속일까 생각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전혀 이치에 따라 패를 내지 않았다. 그냥 나서자마자 대범하게 강수를 두었다.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그들이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월령안은 그들이 말을 듣기만을 원했다.
이 자리에 모인 대상인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이었다.
월령안이 '내가 회장이 될 건데 누가 반대하는가'고 말할 때, 모두들 청주상회 회장직을 꼭 따내려 하는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전에 범정 때문에 월령안에게 차가운 낯빛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범정을 위해 월령안의 체면을 구기는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월령안이 회장이 되려고 해도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앞장 설 생각은 없었다.
살짝 월령안의 기세를 꺾어 범씨 가문의 비위를 맞춰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범씨 가문을 위해 월령안에게 밉보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상업계에서는 남과 완전 척지는 것을 가장 꺼렸다.
설령 월령안의 장사 재간이 형편없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변경의 뒷배가 있었다. 월령안의 뒷배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청주의 상인들은 모두 월령안을 떠받들 것이다.
물론 이런 떠받듦은 사탕발림이었다. 개인의 이익과 연관되면 이 사람들은 사탕발림으로 하는 떠받듦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상인들은 범씨 가문을 위해 월령안의 청주 상업계 첫 등장부터 그녀에게 밉보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 대상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 가문은 범씨 가문에 빌붙어 일어서게 되었다. 남들은 자기 이익만 챙기면 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주 상인은 아무 망설임 없이 곧장 조롱하듯이 되물었다.
"너 이 어린 계집애가……."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월령안이 말을 가로챘다.
"주씨 아저씨는 상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셨으니 잘 모르실 거예요. 청주상회는 설립 초기에 한 가지 규칙이 있었어요. 우리 월씨 가문 사람은 회장직에 대해 한 표 부결권이 있어요. 저는 저 말고 어떤 사람이 회장직을 맡아도 부결할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월령안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예리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쓸어 보았다.
"지금 다시 물을게요. 제가 회장직을 맡을 겁니다. 누구 반대할 사람이 있나요?“
분명히 열여덟 살의 어린 아가씨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기세는 자리에 있는 상업계 큰손들을 당황하게 했다.
몇몇 나이 든 대상인들이 월령안을 보는 눈빛은 더욱 아련했다.
그들은 마치도 월령안의 몸에서 일찍이 기백이 넘쳤던 월씨 큰나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