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가는 길이 순조롭기를 바라오
"보아하니 남 교주는 혈기가 왕성한가 보군. 역시 처음이 다르긴 다르네."
육장봉은 얼굴에 먹구름을 띄우고서 수횡천의 곁을 지나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수횡천은 몸을 움직여 육장봉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 교주, 황금당의 문제는 당신이 일으킨 것이오. 당신이 해결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수 맹주가 걱정할 필요 없소."
육장봉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차가운 눈초리로 수횡천을 쏘아보았다.
"비키시오."
수횡천은 화가 나서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육장봉을 한바탕 두들겨 놓거나 아니면 차가운 얼굴을 보여 주고 거들떠보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육장봉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참기로 했다.
수횡천은 육장봉이 귀찮아할까 두려워 재빨리 말했다.
"남 교주, 령안 모친의 시신이 아직 변경에 있소. 령안이 이번에 급히 떠나다 보니 모친의 시신을 청주에 모셔가 안장할 수 없게 되었소. 이번에 모친의 시신을 가져가지 않으면 다음번은 언제가 될지 기약하기 어렵소. 혹시 괜찮으면 당신이……."
"월령안은 내 아내요. 그녀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당신이 입을 열 필요가 없소."
육장봉의 말투는 여전히 냉담했다. 하지만 온몸의 한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남 교주께서 이렇게 말하니 그럼 나는 걱정하지 않겠소."
육장봉이 처리하겠다고 하자 수횡천은 기뻤다.
그의 태도가 나쁜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육장봉의 그에 대한 태도는 줄곧 나쁘기만 했다. 만약 육장봉의 태도가 좋으면 그는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수횡천은 기쁘게 길을 비켜 주었다.
육장봉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곧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때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수횡천은 하늘을 바라보고 난 뒤 산에서 느릿느릿 내려갔다.
이 시간에 월령안과 소육자는 아직 깨지 않았다. 그는 산에서 내려가도 할 일이 없었다. 또다시 육장봉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더는 육장봉의 어두컴컴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육장봉이 산에서 내려갔을 때, 월령안은 아직 깨지 않았다.
육장봉은 인기척 없이 월령안의 방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월령안은 뺨이 새빨개서 달콤하게 자고 있었다. 육장봉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단시간 내에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담 생선은 대단한 보약이었다. 그는 어제저녁에 먹고 열기가 왕성하여 힘들었다. 월령안도 어제 저녁에 적지 않게 먹었다. 다만 그녀는 몸이 허약하고 냉한 데다, 앞서 한번 먹어 이 물고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반응도 그처럼 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잠을 깊게 자는 것뿐이었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월령안의 건강에는 이로웠다.
"조심하시오. 내가 청주에 가서 당신을 찾을 것이오."
육장봉은 허리를 굽혀 월령안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녀 귓가의 잔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넘겨 주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보양을 잘해 몸의 피부뿐만 아니라 양손도 남보다 야들야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월령안의 뺨을 스쳐 지나면서 그녀의 여린 피부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일부러 힘을 뺐다.
하지만 그의 동작이 아무리 가벼워도 손가락의 굳은살 때문에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옅은 흔적 하나를 남기고 말았다.
특별히 눈에 거슬려 다시 한번 어루만져 그 흔적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물론 육장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손을 대면 월령안의 얼굴에는 더욱 많은 흔적이 남을 것이다.
월령안은 아직 그를 완전히 받아 주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얼굴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더욱 미워할 것이다.
그녀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육장봉은 마음속의 열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단호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눈앞의 즐거움에 사로잡히면 안 되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육장봉은 창문을 뛰어 넘어갔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그가 창문을 닫는 찰나, 달콤하게 잠들어 있던 월령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빛은 아주 맑아 금방 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처소에서 나와 떠나가려 했다.
가다가 뜰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보라색 등꽃이 보였다. 육장봉의 뇌리에는 월령안이 화려한 복장을 입고서 배나무숲 속에서 춤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육장봉의 깊은 눈동자에는 정이 넘실거렸다. 그는 등나무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나뭇가지에 올라서서 맨 위에 가장 아름답게 핀 보라색 등꽃을 몇 갈래 꺾어 화관을 엮었다.
육장봉은 보라색 등꽃을 화관으로 엮은 뒤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러고는 화관을 월령안의 방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청주로 가는 길이 순조롭기를 바라오."
육장봉은 화관을 내려놓고 뒤돌아서 떠났다.
창문을 닫았기에 월령안은 육장봉이 무엇을 했는지 몰랐다. 또한 그가 갔는지 안 갔는지도 몰랐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만나고 싶지 않아 아예 다시 자는 척했다. 소육자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큰 소리로 깨우고 나서야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입구에 놓인 보라색 등나무 꽃 화관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화관은 정교하게 만든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등꽃 하나하나가 아주 산뜻하고 아름다웠다. 화관을 만든 사람이 무척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화관이군."
월령안은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놓인 화관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묻지 않아도 이건 육장봉이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봉관까지 써 보았는데 이 화관이 마음에 들까.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땅에 놓인 화관을 건드리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못 본 척하며 화관을 건너뛰어 걸어갔다.
그녀는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망가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못 본 것으로 할 것이다.
월령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월령안을 포함한 세 사람은 짐이 단촐해서 꾸릴 것도 없었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출발할 때가 다 되어서 문제가 생겼다.
수횡천은 말이 없었다.
물론 마차도 없었다.
무림맹 전체에 탈것이라고는 없었다. 수횡천은 외출하면 항상 걸어 다녔다.
월령안은 이미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수 오라버니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가 너희들 뒤를 따라갈게. 내가 좀 빠르거든."
수횡천은 월령안과 소육자의 말을 힐끗 바라보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월령안은 수횡천을 말을 뒤따라 달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수횡천에게 말채찍을 건네며 말했다.
"저는 소육자와 함께 탈게요. 우리 이따 시장에 가서 말을 사요."
수횡천은 잠깐 망설이다가 거절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말 두 필에 나눠 앉아 재빨리 무림 산장을 빠져나갔다.
허름한 산장은 세 사람의 뒤에서 점차 멀어졌다. 굽이에서 월령안은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방으로 돌아가 방문 입구에 있던 화관을 주워 침실의 탁자 위에 놓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말이 굽이를 돌자 등 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월령안도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것을 포함해서, 그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이의 호의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육장봉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 *
월령안은 돈이 많았다. 시장에 이르자마자 수횡천에게 말을 사 주려 했다. 하지만 수횡천은 거절했다.
"말을 살 필요가 없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왕이면 너는 마차를 타야 편하지 않겠니. 우리에게 말 두 필이 있잖아. 교대로 마차를 끌 수 있어. 여정에 지장이 없을 거야."
말을 오래 타면 그들 같은 사내들도 견디기 힘들었다. 월령안 같이 어린 아가씨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허벅지가 닳는 통증 같은 건 그들 같은 사내들이나 겪으면 되었다. 아가씨는 그래도 아껴 주어야 하는 법이다.
월령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시간이 좀 있는 틈을 타서 조용히 경성에 다녀오려고요.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해서 청주로 가져가고 싶어요."
"어…… 그 일은…… 남 교주가 처리해 준다고 했어."
수횡천은 자신 없이 입을 열었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반응은 심각했다.
"남상권? 수 오라버니께서 그 사람에게 부탁한 거예요?"
수횡천은 불안해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령안아, 내가 잘못한 거니?"
월령안은 몰래 한숨을 쉬다가 수횡천에게 고개를 저으며 억지웃음을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수 오라버니께서 저의 어머니 일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육장봉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될수록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 보니 아마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인정은 그녀가 빚진 것이었다.
"령안, 나는…… 네가 따로 생각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네가 몸을 뺄 수 없는 줄 알았어."
월령안이 입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수횡천은 그녀 얼굴의 억지웃음을 보고 일이 그녀가 말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횡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발생한 일이라 그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육장봉도 협조하지 않을 게 뻔했다.
월령안은 수횡천이 좋은 의도로 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일이 이미 발생한 다음이니, 아무리 수횡천을 나무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많이 가벼워졌다.
"제가 사전에 오라버니께 말하지 않은 탓이에요. 수 오라버니께 감사드려요. 남 교주의 도움을 받게 되면 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변경에 다녀올 필요가 없어요. 마차에 앉아 천천히 가도 되겠네요."
길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면 월령안은 당연히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곧바로 현지에서 가장 큰 마차 가게에 가 편의성이 가장 좋은 마차를 한 대 샀다. 그러고는 수횡천과 소육자 두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타고 청주로 달려갔다.
청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수횡천, 무림의 최고수가 곁에 있어 월령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수횡천은 습격하는 자가 월령안의 근처에 다가오기 전에 모두 해결해 버렸다.
월령안의 종적을 쫓던 정탐꾼도 마찬가지였다. 수횡천이 보호하는 이가 월령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는커녕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명줄이 긴 것이었다.
때문에 설령 모든 이가 월령안이 죽지 않았고 수횡천이 호송하는 그 '소년'이 십중팔구는 그녀일 것을 의심하면서도 확인은 하지 못해서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는 못했다.
황금당의 명성은 드높았고 또한 맹세코 월령안이 그들 손에 죽었다고 말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월령안이 무사하다고 해도 수횡천이 호위하는 척하게 만들어 시선을 끌고 본인은 다른 곳으로 종적을 감추려 하는 건지도 몰랐다.
황제는 수횡천이 마차를 몰고 한 '소년'을 호송하여 청주 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해 그 '소년'이 월령안인지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역시 허탕을 치고 말았다.
다른 이들은 더욱 비참했다. 최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을 제외하고, 수횡천과 그 마차에 접근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수횡천의 손에 죽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