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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95)화 (595/1,004)

595화 수횡천, 기억해 두겠어

월령안과 소육자가 나간 뒤 수횡천도 일어섰다.

"남 교주, 뒷산에 가서 좀 걷지 않겠소?"

육장봉은 수횡천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수횡천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뒤돌아 나가 버렸다.

육장봉은 물고기를 아주 많이 먹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만일 뒷산의 한담(寒潭 - 차가운 연못)에 가서 몸을 담그지 않으면 한밤중에 열기가 올라 잠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육장봉에게 물어봤다. 육장봉 스스로 그의 호의를 차 버렸으니 더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육장봉이 야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그를 탓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수횡천이 나가자마자 육장봉의 밋밋하던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무척 과식했다.

육장봉은 사방에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묵묵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월령안이 주방에서 나올 때까지 화청을 대여섯 바퀴 돌았다.

육장봉은 성큼성큼 월령안에게 걸어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윽하게 바라만 보았다.

월령안은 별수가 없어서 먼저 물었다.

"남 교주께서 무슨 일이 있나요?"

"이야기나 합시다."

육장봉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한 쌀쌀함을 띠었다. 평소 말하는 목소리와 사뭇 달랐다.

월령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육장봉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제야 육장봉이 가면을 쓰고 무림 협객 차림을 하면 군인의 냉혹함과 백절불굴의 기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강호인의 자유분방함과 마교 교주로서의 진중함과 차가움 그리고 도도함을 지니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육장봉은 늘 그렇게 많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으며 또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녀는 육장봉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그녀를 위해 타협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이 말하겠다고 하는데 그녀가 거절하고 듣지 않으면 오히려 그녀가 옹졸해 보일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그의 뒤를 따라 보랏빛 꽃이 만발한 등나무 아래까지 갔다.

밤이 되자 산장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오직 산들바람만이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월령안이 오후에 앉았던 그 의자는 아직 등나무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앉을 생각이 없었다.

육장봉은 등나무 아래에 서서 손목을 살짝 들어 보라색 등꽃을 꺾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국경에 한번 갔다 와야 하오. 당신과 함께 청주에 갈 수 없게 되었소."

"괜찮아요. 수 오라버니가 있어요."

그녀는 육장봉에게 기대한 적이 없었다.

천하를 가슴에 품은 남자는 시간과 정력을 남녀의 정에 쏟을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육장봉 없이 그녀 혼자서 능히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남자에게 기댈 필요가 없었다.

육장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손에 쥔 보랏빛 등꽃이 짓이겨졌다. 꽃의 즙이 그의 손가락을 연보라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이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청주에 미리 가 있소. 청주에서 누구도 당신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남 교주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사리 분별이 없이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필요했다.

조정에서 주는 도움이 필요했다. 육장봉은 조정의 인물로서 그가 사용한 것도 조정의 병마였다. 조정에서 주는 도움은 주는 만큼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월령안이 협조적으로 나오자 육장봉은 더는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로 되돌아간 듯했다.

그때 그녀는 온몸에 가시가 돋친 것처럼 그를 경계하며 온순하게 협조함으로써 반골 기질을 감추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곧추세운 가시가 없지만 소원해진 느낌이 있었다.

다만 그녀는 더욱 원만해져 조금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월령안이 말하던 상인의 원만함과 친절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순간 두 사람 사이는 화기애애하고 분위기도 아주 좋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는 손을 펴 즙이 다 빠진 보라색 꽃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발로 짓이겨 진흙 속에 파묻었다.

괜찮았다. 그가 국경에서 돌아오면 월령안과 함께 보낼 시간이 수두룩했다.

육장봉은 뒷짐을 짓고서 계속하여 말했다.

"소함연과 서남쪽 혼사는 결정되었소. 나씨 가문 장남 나신(羅辛)이오. 나신은 이미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 변경으로 떠났다 하오. 이 혼사는 나씨 가족이 먼저 청한 것이오. 나씨 가문 상황은 매우 복잡하오. 나신은 비록 나 토사의 적장자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소. 그 자신이 나 토사의 총애를 받지 못하오. 그가 소함연을 맞아들이게 된 것은 아마 그를 버린 바둑돌로 사용하려는 듯하오."

청주의 일에 대해 말하자 육장봉은 어느 정도 흥이 났다. 월령안이 진지하게 듣는 것을 보고 계속하여 말했다.

"서남에 가면 조심하시오. 꼭 필요하지 않으면 현지 토사들과 접촉하지 마시오. 범씨 가문과의 십 년 다툼에만 전력을 다하시오. 내가 조정에서 임명을 받으면 직접 가서 서남 토사를 만나 이야기할 것이오. 서남 토사들이 당신을 번거롭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청주는 줄곧 그 몇 노친네들이 장악하고 있소. 청주의 관리는 이미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소. 지금 청주에 남아 있는 관리들은 모두 그 노친네들 사람이오. 청주에 도착하면 현지 관아와 절대 접촉하지 마시오. 그들이 약점을 잡고 공개적으로 당신에게 손쓰지 못하게 해야 하오.

관료 사회의 일은…… 많은 일에서 시비곡직(是非曲直 -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이 따로 없다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고 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마시오.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가시오."

육장봉은 아주 자세하게 말했다. 월령안도 아주 열심히 들었다.

이런 일들은 비록 그녀도 적지 않게 조사했지만 결국 육장봉의 정보보다는 자세하지 못했다.

월령안은 꼼꼼하게 듣고 육장봉이 말한 몇 명의 이름을 전부 기억했다.

그러나 그녀는 듣다 보니 육장봉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육장봉이 코피를 흘렸다.

무림맹의 한담(寒潭) 물고기는 과연 명실상부했다. 월령안과 단둘이 있은 지 일각만에 육장봉의 코피가 터졌다. 게다가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월령안은 그에게 조금도 체면을 남겨 주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가리키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 교주께서는 먼저 가서 처리하시는 게 어떨까요?"

월령안은 아주 좋은 청중으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설령 그녀가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는 일일지라도 언제나 예절을 지켜 끝까지 들어 주었다.

육장봉은 말하는 중에 갑자기 월령안이 끼어들며 중단시키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월령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의 몸이 한순간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담담하게 코 밑을 훔쳤다. 달빛 아래 손에 묻은 피가 보였다.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손수건을 주시오."

육장봉은 너무나 예사롭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손에 가득 묻은 피는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월령안은 잠깐 멍해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육장봉은 손수건을 받아 느긋하게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는 아주 느리고 세심하게 닦았다. 그냥 닦는 동작이지만 그가 하자 정중하고 경건한 느낌이 났다. 마치 제사를 모시는 것같이 엄숙하고 정중하여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감히 방해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기세에 영향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회를 틈타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그가 손가락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

육장봉은 손가락을 일일이 섬세하고 깨끗하게 닦았다.

월령안은 그가 손수건을 뒤집어 피가 묻은 부분을 안으로 하여 반쪽으로 접으며 네모반듯하고 모서리가 분명한 작은 네모로 접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육장봉이 손수건을 다 개자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다.

그런데 육장봉은 손수건을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그 동작은 무척이나 익숙해 마치 수없이 해 본 것 같았다.

"남 교주, 그 손수건은 제 것입니다."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말로 일깨워 주었다.

"음."

육장봉은 대답했으나 손수건을 꺼내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모르는 척하자 차갑게 웃으며 직접적으로 말했다.

"돌려주세요!"

"더러워졌소."

육장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중에 손수건 열 개를 배상할 거요."

월령안은 손수건을 돌려받지 못할 거란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더는 실랑이질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손수건일 뿐이에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육장봉은 잠깐 생각하더니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월령안은 육장봉 때문에 화가 나서 웃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육장봉처럼 이렇게 후안무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월령안은 뻔뻔스러움으로는 육장봉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는 그와 실랑이질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돌아서서 떠나갔다.

"시간이 늦었어요. 남 교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육장봉은 입을 열어 만류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월령안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멀리 가자 그는 후다닥 몸을 돌려 무림맹 뒷산으로 달려갔다.

그가 뒷산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다. 한담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발자국만이 소리 없이 수횡천과 소육자도 왔다 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담 생선을 많이 먹은 결과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월령안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을 보기만 했다.

"수횡천, 기억해 두겠어."

육장봉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한담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육장봉은 물속에 뛰어들어 한담의 물과 하나가 되었다.

차가운 한담 물이 그의 가슴속 열기를 가라앉히자 점차 진정할 수 있었다.

잠시 뒤, 육장봉은 물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그의 몸에 쏟아졌다. 젖은 검고 긴 머리가 그의 몸을 휘감고 있어 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물방울이 뺨에서 흘러내려 가슴에 떨어지며 그의 탄탄한 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달빛 속의 육장봉은 힘이 넘쳐 보였다. 그 아름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칠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순간 뒷산에는 육장봉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육장봉은 물속에서 솟아오른 뒤, 천천히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한담 물을 빠져나가는 순간, 그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열기가 다시금 가슴에 차올랐다. 밖에 드러난 피부는 순식간에 다시 뜨거워졌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욕을 퍼부었다.

별수 없었다. 육장봉은 다시 한담 물에 몸을 담갔다.

이렇게 거듭 반복하며 날이 밝아서야 육장봉은 한담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담에 너무 오래 담그고 있어서인지 육장봉의 눈썹과 속눈썹에는 모두 서리가 내렸다.

육장봉은 온몸의 한기를 무시하고 한담에서 걸어 나왔다. 냉담한 얼굴로 옷을 하나하나 입고서 차가운 얼굴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온몸으로 사람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한기를 뿜어냈다. 마치 누가 그의 돈을 떼먹은 것 같았다.

수횡천은 줄곧 산자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장봉이 물기를 머금은 채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자 그가 밤새 한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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