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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93)화 (593/1,004)

593화 당신이 화낼까 두려웠소

육장봉은 손을 들어 월령안의 머리카락 사이에 떨어진 보라색 꽃을 잡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월령안…… 나한테 화내지 않으면 안 되오?"

그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육장봉은 말을 마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월령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끔 바람에 보라색 등꽃이 떨어지며 두 사람의 몸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육장봉도 월령안도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육장봉은 말을 마치고 월령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묵묵히 육장봉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서 아저씨의 일에 대해 그녀는 얼마간 알고 있었다. 무장의 처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직접 들려준 소식은 얻어들은 소식에 비해 훨씬 더 놀라웠다.

그녀는 육장봉의 짧은 몇 마디에서 주나라 무장의 무력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주나라의 무장들이 문관 앞에서 하나같이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정당하게 받아야 할 군량, 마초와 물자라도 확실하게 손에 넣으려면 여전히 문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무장들은 병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려고 해도 문관들에게 뇌물을 먹여야 했다. 문관이 황제 앞에서 그들을 위해 좋은 말을 하고, 전투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말해 주어야 했다. 그들 스스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주나라의 무장은 처지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나라 무장의 처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퍽 더 어려웠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화나지 않았어요."

육장봉이 그녀보다 더 억울하다고 하는데 그녀가 또 어찌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육장봉 앞에서 한바탕 소리를 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속에 있었던 응어리는 그녀가 육장봉에게 따질 때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월령안은 줄곧 긴장 상태에 있다 보니 아주 불편했다. 그녀는 육장봉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더는 소용없는 헛짓을 하지 않았다. 몸의 긴장을 풀고 편한 자세로 육장봉의 품에 기대 가벼운 목소리로 변명했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알려드릴게요. 저는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숨긴 데 대해서도 불만이 없고요."

월령안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말투는 아무 기복이 없이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당시 우리 사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부였지만 사실 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당신이 저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게 정상이에요. 마치 제가 월씨 가문에 철광산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어떤 비밀은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녀는 육장봉이 숨긴 데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그녀였더라도 똑같이 처사했을 것이다.

"제가 화내고 분노한 것은 당신이 저한테 숨기고 저를 속였기 때문이 아니에요. 다만 갑자기 이 소식을 들으니 일순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에요. 더하여 지난 삼 년 동안 짝사랑에 빠져 스스로 당신에게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여겼던 것을 생각하니 난처한 동시에 자존심이 상했을 뿐이에요."

월령안은 여기까지 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말할 수 있는 억울함은 더는 억울함이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정말로 억울하지 않았다. 그녀가 육장봉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다른 원인이었다.

"저는 좀 전까지 정말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달려와서 제가 묻지 않은 것을 탓하고 마치 제가 잘못한 것처럼 구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성낸 거예요."

육장봉은 잠깐 멍해 있다가 말했다.

"어…… 나도 당신을 탓하지 않았소."

월령안은 무언가를 오해한 것이다

육장봉은 잠시 주저하다가 어색해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화낼까 두려웠소."

그래서 월령안이 따지지 못하게 선수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다.

월령안은 뾰로통해서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제가 왜 당신을 탓하겠어요? 당신 눈에는 제가 그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사람인가요?"

"물론 아니오."

육장봉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인했다. 월령안과 눈을 마주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영리하며, 유능하고 가장 훌륭한 아가씨이오."

그는 단지 너무 아낀 나머지 조금이라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육방봉은 말하는 동시에 슬며시 월령안을 더욱 꽉 껴안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월령안은 그의 눈빛이 불편하기만 했다. 좀 전에 숨이 막혀서 빨개졌던 얼굴이 지금은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차마 육장봉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거두고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 좀 놓으세요…… 저 좀 일어나자고요. 당신 몸은 너무 딱딱해 기대면 불편해요."

"음."

육장봉은 대답만 할 뿐 그녀를 놓아 주지 않았다. 대신 긴 다리를 뻗고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혀 그녀가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한편 조용히 방향을 바꿔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미인이 품 안에 있다. 육장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당분간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월령안이 일어나려는 생각을 잊게 하려고 육장봉은 계속 말을 하면서 그녀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당신은 혼자 짝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독선적이지도 않소. 이 몇 년 동안 당신은 나를 아주 많이 도와주었소. 당신이 없었다면 주나라와 북요의 일전은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당신이 없었더라면 주나라 장병들의 사상은 더 심각했을 것이오. 당신이 없었더라면……."

"됐어요. 저를 위로하지 마세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월령안은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육장봉의 말을 중단시켰다.

"상인은 낯가죽이 두껍거든요. 상한 제 자존심은 스스로 회복되니깐 당신의 위로가 필요 없다고요."

육장봉은 고개를 저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게 아니오. 천목신교에 돈은 있소. 하지만 군량과 마초, 병기와 솜은 없지. 이런 것들은 돈이 있다고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소. 그 삼 년 동안 나는 변방에서 있어서 경성의 일을 알지 못하오. 하지만 그 삼 년 동안 군의 군량과 마초가 충족하고 겨울옷이 얼마나 두툼하며 병기가 얼마나 예리했는지는 알고 있소. 그런 것들은 예전에…… 군의 장병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물자들이었소."

다만 그는 줄곧 황제가 그것들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월령안이 밤낮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황제는 월령안의 모든 공로를 지워 버렸다.

때문에 진실을 알게 되자 그는 월령안이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월령안, 일개 연약한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 같은 사내대장부도 돈이 있어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전선에 필요한 군용 물자를 모두 마련할 수 없었다.

월령안은 시선을 내려 눈 속에 모든 감정을 감추었다. 육장봉의 팔을 툭툭 치며 일깨워 주었다.

"대장군, 이렇게 많이 말해도 소용없어요. 전 꾀임에 넘어가지 않아요. 이 정도 안았으면 됐어요. 일어나게 손 좀 놓으세요."

육장봉은 극구 변명하려 했다.

"나는…… 그런 게 아니오."

"아니면 더 좋죠. 어서 손 좀 놓으세요."

월령안이 재촉했다.

육장봉은 이를 갈며 말했다.

"좀 조용히 하면 안 되오?"

'이 여자는 좀 협조하면 안 되나. 조금만 더 안게 놔두면 안 되나? 내가 당신을 한 번 안는 게 어디 쉬운 일이오?'

오늘이 지나면 그들 중 한 사람은 청주에 가고, 한 사람은 변방에 가게 된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기약이 없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시간이 늦었어요. 저 짐도 꾸려야 해요. 내일에는 출발해야 해요."

"내일?"

육장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범씨 가문과 약속한 날짜가 다 되었어요. 저는 어서 청주로 가야 해요. 대장군."

"당신은 어제 피를 토했소."

육장봉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찡그렸다.

"솔직히 말하면 대장군께서 못 믿으시겠지만……."

월령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저는 화나서 피를 토한 게 아니에요. 뒷산 생선을 먹은 탓이에요. 제가 몸이 약해서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일은 이렇게 공교롭게 되었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수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모르는지라 그녀가 화가 나서 피를 토한 줄로만 여겼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수 오라버니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그녀가 자기를 위로하는 줄로 여겼다.

그녀는 정말 억울했다. 괜히 속이 좁다는 죄명을 들쓰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 믿소."

그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우연이라면 어떻게 그가 남상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때마침 몸이 받아들이지를 않는단 말인가.

월령안은 사람을 속이는 게 분명했다.

"저는 정말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저 정말 몸이 약해서 그 생선을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무림맹 뒷산 한담(寒潭)의 물고기는 대단한 보약이에요. 대장군께서 믿지 못하시면 저녁에 한번 드셔 보세요. 제가 약속하는데……."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성인 남자, 신체가 정상적인 남자, 정상적인 욕구가 있는 남자, 단지 그녀를 안기만 해도…….

흠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월령안은 곧 얼굴을 돌리고 육장봉을 외면했다.

이런 때에 육장봉과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몸보신을 해야 한단 말이오?"

육장봉은 갑자기 앞으로 몸을 기울여 월령안에게 다가왔다. 눈빛이 강렬하고 날카로웠으며 압박감이 대단한 것이 위험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월령안은 뜨겁고 서늘한 남성 기운이 갑자기 얼굴에 덮쳐들자 미처 막아 내지 못하고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육장봉이 끝까지 다가오자 화가 나서 밀쳐 버렸다.

"당신, 좀 저쪽으로 가세요."

몸부림치다 보니 손이 미끄러져 손바닥이 마침 육장봉의 아랫배 쪽으로 닿게 되었다. 월령안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보건대, 몸보신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월령안은 육장봉의 억눌린 신음 소리를 듣고 최선을 다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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